【98】97.
네이그랑의 남쪽에 있는 호수에 도착한 레오가 혀를 찼다.
“여긴 아니군. 이걸로 두 번째 허탕인가?”
지도를 꺼낸 레오가 호수에 X자를 표시했다.
‘이제 동쪽에 하나, 북쪽에 하나. 마지막은…….’
레오가 고개를 돌려 폐허가 된 성을 보았다.
‘성터에 하나.’
일단 레오의 최종 목적지와 겹치는 만큼 성터에 있는 호수는 마지막에 확인하면 됐다.
‘그나저나.’
지도를 품에 갈무리한 레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계속 날 쫓은 이유가 뭐야.”
그 물음에 건물 사이에 있던 인기척의 주인공이 레오 앞에 나타났다.
“내가 쫓아 오는 걸 알고 있었나요, 레오 도령?”
“응.”
“역시 대단하네요.”
“그래서. 성터는 반대편이잖아? 왜 여기까지 날 따라온 거야?”
“레오 도령은 왜 이곳까지 온 거가요?”
“개인적인 볼 일이 있어서.”
“나도 개인적인 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
“뭔데.”
촤아아악-!
“승부요.”
첸 시아가 오러를 일으키자 그녀의 주변에 마치 비단 같은 물결이 생성되었다.
마치 날개옷처럼 그것을 몸에 휘감은 첸 시아가 오른손을 레오에게 펼쳐 보이고 왼손은 등에 붙인 상태로 자세를 낮췄다.
“갑자기 왜?”
“알고 싶어졌어요. 레오 도령과 나 사이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첸 시아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레오가 검을 뽑았다.
“그게 전부야?”
“학년 대표의 자리가 탐나기도 해요.”
그 말에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죠?”
“아니. 네가 솔직하게 야심을 드러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서.”
첸 시아는 1학년 최상위권 학생 중 하나다.
그리고 최상위권 학생들은 누가 됐든 레오의 학년 대표 자리를 노렸다.
평생 최고로 살아온 그들이기에 최고가 아니면 직성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중 유독 한발 물러선 학생이 있었다.
그게 바로 첸 시아였다.
‘분명 야심은 있었는데 말이야.’
“갑자기 야심을 드러낸 이유가 궁금한데.”
“배틀 로얄이잖아요. 진짜 실력을 가릴 수 있는 무대죠. 그리고…….”
그녀의 눈이 가라앉았다.
“보러 왔거든요.”
“뭐?”
파앗-!
땅을 박찬 첸 시아가 레오를 향해 달려들었다.
‘먼저 공격을?’
기본적으로 첸 시아는 수비적인 성향이 강한 무인이었다.
물이라는 속성의 특성상 공격보다는 방어와 회피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기사학과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녀의 부드러운 방어를 뚫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는지 한참 토론을 할 때도 있었다.
‘가능성이 있다고 점쳐져 있는 게 셀리아와 듀란이었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기사학과 학생들도 동기 중 최강의 공격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두 사람이 첸 시아의 방어를 뚫을 수 있다고 확신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첸 시아의 방어력은 압도적이었다.
그 이점을 버리고 선공을 해온 것이다.
‘뭐, 그렇다고 공격이 약한 것도 아니지만.’
화륵-!
레오가 불꽃의 오러를 일으켰다.
첸 시아의 작은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뒤에 따라온 공격은 말 그대로 흉악스러웠다.
첸 시아의 물의 오러가 작은 물방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방울은 모두 날카로운 바늘이 되었다.
“……!”
레오가 다급하게 불꽃의 오러로 몸을 휘감았다.
파바바바밧-!
수백 개의 바늘이 사방에서 덮쳤다.
치이익!
물의 바늘이 불꽃의 벽과 부딪히며 수증기가 생성되었다.
엄청난 숫자의 바늘이었지만 불꽃의 장벽은 뚫지 못했다.
“바늘이 아니라 송곳이 필요하겠네요.”
첸 시아의 손에 손바닥 크기의 물방울이 생성되더니 이내 날카로운 송곳으로 변했다.
파앗-!
송곳 형태의 물의 오러는 불꽃의 오러를 뚫고 레오를 노렸다.
휘익!
레오가 몸을 젖혀 공격을 피했다.
몸을 일으키자 첸 시아의 발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첸 시아의 주력을 무투술.
무투술의 가장 큰 단점은 무기를 든 적을 상대로 거리를 좁히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단점은 반대로 말하면 거리를 좁히기만 한다면 상대를 속수무책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레오는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들어 첸 시아의 공격을 막아냈다.
콰앙-! 푸욱-!
오른손 팔뚝에 부러질 것 같은 충격이 엄습했고 흙바닥에 발이 움푹-! 파고들어 갔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발을 회수한 첸 시아의 주먹이 오른쪽 옆구리를 노렸기 때문이다.
오러가 담긴 공격에 레오는 검을 놓고 왼손으로 급히 첸 시아의 공격을 막았다.
퍽-!
거대한 방망이에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레오의 몸이 그 자리에서 튕겨져 나갔다.
첨벙-!
레오의 몸이 호숫가에 처박히며 물기둥이 높이 치솟았다.
“과연 레오 도령…… 그 와중에 반격을 하다니.”
첸 시아는 불타 너덜너덜해진 블라우스의 왼쪽 소매 부분을 찢으며 인상을 썼다.
튕겨 나가는 와중에도 레오의 불꽃 오러가 첸 시아의 방어를 뚫는 데 성공했다.
첨벙.
물가를 빠져나온 레오가 얼얼한 오른손을 흔들며 첸 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레오를 보며 첸 시아가 웃었다.
“역시 레오 도령은 대단해요. 온 힘을 다해 공격했는데 멀쩡하다니.”
“멀쩡? 네 눈에는 이게 멀쩡한 걸로 보여? 엄청 아파 죽겠거든.”
투덜거리는 레오를 보며 첸 시아가 쓰게 웃었다.
‘농담을 할 기운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멀쩡하다는 증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첸 시아는 레오의 공격에 대비했다.
‘기습적인 공격은 한 번 했어. 레오 도령은 같은 수에 당할 사람이 아니야.’
다른 수법도 있지만, 지금은 레오를 상대로 섣부르게 공격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때 레오 도령의 공격.’
첸 시아는 용자의 숨결을 배운 첫날을 떠올렸다.
‘그건 분명 레오 도령이 낼 수 있는 최대의 화력일 테지.’
고오오오-!
첸 시아가 오러를 방출했다.
그에 따라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는 사파이어처럼 푸르게 물들었다.
‘그 검격만 흘려보낼 수 있다면!’
“너답지 않아, 첸 시아.”
“네?”
“물은 항상 흐름에 맞게 변하는 힘이잖아.”
레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지금 넌 너무 딱딱해.”
“……!”
“무슨 일 있어?”
굳은 얼굴로 레오를 바라보던 첸 시아가 빙긋 웃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레오가 손을 뻗었다.
우웅-!
오러에 반응한 검이 레오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화륵-!
‘저 검격만 막으면!’
정신을 집중하는 첸 시아를 보며 레오가 검을 고쳐 세웠다.
고오오-!
강력한 열기가 첸 시아의 피부를 덮쳤다.
첸 시아가 온몸을 긴장시켰다.
‘온다!’
쿠구구구궁!
눈앞에 덮쳐 오는 레오의 불꽃 오러를 보며 첸 시아가 숨을 들이켰다.
용자의 숨결이 발동되며 그녀의 주변으로 강력한 물의 흐름이 생겨났다.
레오의 검격을 집어삼킨 물의 오러가 검격의 흐름을 바꿨다.
그 순간, 첸 시아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고작 이 정도 일 리 없는데.’
“말했잖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첸 시아는 흠칫했다.
“딱딱하다고.”
텁-!
레오의 손바닥이 등 뒤에 닿는 걸 느꼈다.
손바닥 끝으로 오러를 집중시킨 레오가 첸 시아의 등에 오러를 밀어 넣었다.
퍼엉-!
“커헉?”
압축된 오러가 폭발하며 첸 시아를 튕겨냈다.
처참하게 바닥을 뒹군 첸 시아는 자신의 목에 닿은 검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네가 졌어.”
첸 시아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 도령. 정말로 열다섯 살 맞아요?”
“그럼. 몇 살 같아?”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아저씨 같아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첸 시아의 머리를 레오가 쥐어박고 물러섰다.
“뭐죠? 탈락시키지 않는 건가요?”
순간 첸 시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평소의 그녀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무리 레오 도령이라도 용납할 수 없어요. 이딴 자비는 필요 없…….”
“착각하는 모양인데.”
레오가 피식 웃었다.
“이건 배틀 로얄이야. 패자를 어떻게 이용하던 내 마음이거든.”
“뭐라고요?”
“패자면 패자답게 승자의 말을 들어야겠지? 귀찮은 애들이 쫓아오고 있어서 말이야. 네가 처리해 줘.”
그 말을 남기고 레오는 몸을 날렸다.
“무슨…….”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첸 시아는 순간 건물 저편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걸 보았다.
“놈은 내 목표다. 방해 마라, 엘리자 헤르긴.”
“웃기지 마요! 레오 플로브는 내 먹잇감이에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호숫가에 도착한 듀란과 엘리자는 첸 시아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듀란 군, 엘리자 양. 성터는 저쪽인데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에 있지? 너도 레오 플로브를 노린 건가?”
인상을 찡그리며 다가오는 듀란을 보며 첸 시아가 쓰게 웃었다.
“너도라고 말하는 걸 보면 듀란 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네요.”
‘이런 의미였구나.’
귀찮은 것들을 처리해달라는 말뜻을 이해한 첸 시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진 건가?”
“네.”
“놈은 어디로 갔지?”
그 물음에 첸 시아가 말했다.
“저쪽으로 향했어요.”
듀란이 레오를 쫓으려 하자 첸 시아가 말했다.
“듀란 군. 제가 다쳐서 그런데 넬라 양에게 같이 가 주면 안 될까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지금은 학과대항전 중이고 듀란과 전 같은 학과잖아요. 설마 듀란은 개인적인 승부 때문에 학과 동기를 외면할 생각인가요?”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첸 시아를 보며 듀란이 얼굴을 찡그렸다.
“여우 같은 녀석!”
기사학과를 들먹인 이상 듀란은 첸 시아를 외면할 수 없었다.
“잘해보세요. 난 레오 플로브를 끝장내러 갈 테니까.”
엘리자가 이죽거리자 듀란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엘리자 양. 제가 걷기 힘들어서 그런데 태워주시면 안 돼요?”
“시아. 당신이 소환학과라면 도와줬겠지만 지금 우리는 적인 거 알고 있죠?”
“세상에! 평소에 내가 공부도 도와주고 했는데! 이제 이용 가치가 없어지니까 버린다는 거죠? 그런 거죠?”
“무, 무슨?”
“매일 필기 노트를 빌려 갈 때는 빚은 꼭 갚는다고 했으면서!”
“비, 빚은 꼭 갚아요! 그런데 지금 갚을 필요는……!”
엘리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엘리자는 전공 수업 이외의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은 아니었다.
늘 주변에 친절한 첸 시아는 중간고사 시험 때 그런 엘리자의 공부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때 일을 지금 들먹인 것이었다.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너도 다른 저열한 놈들과 다를 바 없었군.”
듀란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고 그 말에 엘리자가 눈을 치켜떴다.
듀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가 레오 플로브와 싸울 수 없다면 너 역시 레오 플로브와 싸울 수 없다.’
마치 같이 가자는 듯한 듀란의 미소에 엘리자가 소리쳤다.
“아! 같이 가면 되잖아요! 같이! 시아! 중앙 성터까지만 동행하는 거예요! 그 이후부터는 우린 적이에요!”
“고마워요, 엘리자 양.”
두 학생을 쥐락펴락한 첸 시아는 레오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뭐 때문에 중앙 성터로 가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마치고 와요. 레오 도령.’
***
중앙 성터.
“어딜 넘봐!”
화르르륵! 쾅!
“컥! 셀리아 제르딩거다!”
“제길! 조금만 더 가면 됐는데!”
당연하게도 이 도시에서 유일한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는 중앙 성터에는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중앙 성터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서남북에 뚫려 있는 성문을 지나야 했다.
성벽을 오를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주변에 포진해 있는 학생들의 집중포화를 맞기 딱 좋기에 섣부르게 성벽을 넘는 걸 시도하는 학생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문을 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바로 각 성문을 지키고 있는 다른 학과 학생들 때문이었다.
“젠장! 저기는 무리야! 다른 곳으로 가자!”
쥬레든 파티는 셀리아가 지키는 성벽을 떠나 서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서문을 지키고 있는 한 학생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클로에 뮐러!”
서쪽 성문에는 자신의 키만 한 높이의 지팡이를 쥐고 서 있는 클로에가 보였다.
‘이제 남은 건 남문이랑 동문. 그곳에도 다른 학과 탑급 학생이 지키고 있으면 골치 아픈데!’
소환학과 2위인 엘리자는 지금 레오를 쫓아갔다.
‘제발 워레든! 성문 하나만 차지하고 있어 줘!’
성터 바깥에 있다가 저주가 발동되어 약해지기라도 한다면 성터 안에 있는 학생들의 표적이 된다.
어떤 저주냐에 따라서는 제대로 된 저항도 전멸할 확률도 높았다.
입이 바짝 타는 걸 느끼며 쥬레든이 남문으로 이동하려 할 때였다.
키아아아악!
“응?”
위에서 들려 온 괴성에 쥬레든이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클로에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흉악하게 생긴 검은 비룡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블랙 와이번?”
“설마! 최상위 환수가 나타날 리가!”
쥬레든 파티가 놀라는 가운데.
쩌억-!
입을 벌린 검은 비룡이 쥬레든 파티를 향해 브레스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으아악! 이, 이거 뭐야!”
강력한 산성 효과를 지닌 브레스가 땅을 녹였다.
쥬레든이 굳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환수가 아니야! 설마 몬스터? 저렇게 생긴 몬스터도 있나?’
쥬레든은 머릿속의 정보를 이용해 정체불명의 비룡을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재앙의 시대 당시 대영웅들에 의해 멸종된 마수, 파프니르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입을 쩍 벌린 파프니르가 브레스를 뿜으며 쥬레든 파티를 노렸다.
캬아아아악!
“제길! 일단 피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