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설급 영웅은 아카데미 우등생-104화 (104/483)

【104】103.

레오는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용자의 숨결에 반동으로 레오의 왼팔 주변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 덕에 지도 역시 불타 알아보기 힘들었다.

‘위력은 엄청난데 빨리 조정이 필요하겠군.’

레오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오래전 폐허가 된 성터를 걸었다.

동기생들의 환호성이 멀어져 거의 들리지 않을 때쯤.

레오는 성터 구석의 호숫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손끝을 호수에 담갔다.

토옹-!

호수 전체에 파문이 일었다.

“…….”

몸을 일으킨 레오가 오러 스텝을 이용해 호수 중앙으로 걸어갔다.

까득-!

그리고 오른손 엄지를 깨물어 터트린 후 핏방울을 호수에 떨궜다.

레오의 영력이 담긴 핏방울이 호수에 떨어졌다.

하지만 핏방울은 퍼지지 않고 하나의 작은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로 복잡한 문양이 새겨졌다.

광휘의 정령, 루미너스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우웅-!

작은 빛과 함께 레오의 앞으로 작은 빛 망울이 레오 앞에 나타났다.

화악-!

잠시 후 빛 망울이 터지더니 손바닥 크기의 백발 정령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빛을 품은 정령의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뜨였다.

“오랜만이야. 루미너스.”

레오와 눈이 마주친 루미너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어떻게 저를 깨운 거죠?]

“나야. 카일.”

[카일? 당신이요?]

루미너스는 빤히 레오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 영력의 파장은 카일 당신이 맞군요.]

힘을 잃었고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대정령은 대정령.

레오가 카일이라는 걸 인정한 루미너스가 물었다.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시나스는 어디 있죠?]

“리시나스는…… 죽었어.”

그 말에 루미너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재앙의 시대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너무도 아름다운 하늘을 보며 루미너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지금 시대에서는 새삼스러울 게 없는 하늘.

그러나 재앙의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보고 싶은 푸른 하늘이었다.

[그 아이는 나와의 약속을 지켜주었군요.]

세상에 빛을 되찾아 주겠다던 맹약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루미너스가 말했다.

[내가 잠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동료들을 만나고 토벌대를 만들고 많은 희생 끝에 에레보스를 쓰러트린 이야기.

자세히 전하지는 못 했지만 루미너스에게 대영웅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루미너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5000년 동안 잠에서 깨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왜?”

[당신에게 이 말을 해 줄 수 있으니까요.]

가장 위대한 정령이라 불렸던 광휘의 정령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세상이 빛을 되찾아줘서. 그 아이의 소망을 이루어 줘서. 이 세상을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카일.]

고개를 든 루미너스가 말했다.

[비록 세상을 당신을 잊었다 해도 당신이 위대한 위업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아요. 정말…… 감사해요.]

그 시대를 살았던 자만이 전할 수 있는 감사.

레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에게 감사를 받는 건 처음이야.”

그 말에 루미너스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루미너스의 몸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소멸을 막기 위해 봉인되었던 루미너스다.

그 봉인이 풀린 순간 허락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레오! 어디 있어!”

그때 저 멀리서 레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아이들은?]

“다음 세대를 이어 나갈 새로운 영웅의 싹이야.”

[그렇군요.]

루미너스가 쓴 미소를 지었다.

에레보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상.

이 땅에 재앙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이번에도 싸울 건가요?]

“당연하지. 이 평화를 다시 잃을 순 없으니까.”

그 말에 루미너스가 손을 펼쳤다.

그녀의 손에 하얀빛이 담긴 보석으로 장식된 목걸이가 나타났다.

[대대로 빛의 대정령들이 지녔던 빛의 보옥입니다. 원래는 내 후대 빛의 대정령에게 물려줬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당신이 가져주세요.]

“이런 걸 내가 받아도 되는 거야?”

[네. 특별한 힘이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상징성은 크답니다. 이걸 보여주면 빛의 정령에게 대정령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굉장한 물건이다.

[이제 작별이군요.]

“그래.”

[당신에게 빛의 축복이 있기를.]

“편안한 안식을.”

정중한 카일의 인사에 루미너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레오가 목걸이를 품에 갈무리했다.

그와 함께 호숫가로 셀리아가 나타났다.

“레오, 여기서 뭐 해?”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어서 넬라에게 가서 상처부터 치료받아!”

“알았어.”

***

1학년들이 기간테스를 쓰러트리고 얼마시간이 지나지 않아 루메른의 구조대가 단절의 저주를 파훼시키고 네이그랑으로 들어왔다.

그 와중에 마수의 공격이 몇 번씩이나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큰 위험은 없었기에 1학년들은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이후 학과대항전의 사건은 엄청난 파란을 몰고 왔다.

가장 이슈가 된 것은 두 가지.

루메른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번 학과대항전은 타르타로스가 루메른을 노리고 벌인 공격이었다.

루메른의 대응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외부 세력의 압력이 가해졌다.

그보다 더 뜨거운 화제가 있었으니 바로 기간테스를 쓰러트린 1학년들에 대한 것이었다.

기간테스의 레이드는 말 그대로 위업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엄청난 활약이었다.

그렇게 모든 관심이 루메른으로 쏠리는 가운데.

“흑흑. 시험 완전 망쳤어.”

엎드린 칼이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1학년 전원은 필기시험에 시달리고 있었다.

학과대항전 일정과 시험 기간이 겹친 만큼 이번 시험은 특히나 어려웠다.

물론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있었다.

“칼, 1학기 내내 즐거웠어.”

첼시가 평소와 달리 친절하게 웃으며 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중간고사 때도 그 말 했었지?”

“응. 하지만 그때와 같은 기적은 없을 것 같네.”

“흑. 너무해.”

우등생들은 학과 일정이 어떻든 여유로웠다.

그 모습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열심히 했으니까 잘될 거야. 넌 학과대항전에서 활약이 뛰어났다면서.”

“역시 레오 너밖에 없다!”

마법 시험이 끝나고 세 사람이 평소처럼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레오 학생.”

“안나 부교수님. 무슨 일이세요?”

“렌 교수님이 레오 학생을 찾으세요.”

그 말에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갔다 올게.”

“응, 레오 오빠 우린 먼저 교실에 가 있을게.”

“잘 다녀와라.”

첼시와 칼이 자리에서 일어나 5반 교실로 향했다.

“교수님이 무슨 일로 절 찾는 건가요?”

“그건 교수님께 직접 들으면 되실 거예요.”

레오의 물음에 안나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후 렌의 교수실 앞에 도착한 안나는 노크를 한 후 문을 열어 주었다.

벌컥-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렌 교수가 교수실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는 온갖 복잡한 마법 술식 공식이 그려져 있었다.

“음. 왔군, 레오 학생.”

렌은 레오를 발견하고는 자리를 권했다.

“뭐라도 마시겠는가?”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렌은 진한 향을 풍기는 커피 잔을 가지고 레오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마법을 이용해 식은 커피를 뜨겁게 달군 다음 진지하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레오 학생.”

“예.”

“2학기부터는 마법학과로 전공을 선택하게.”

“학생에게 학과 강요는 교칙 위반 아닌가요?”

“물론 그렇지.”

달칵-!

렌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레오 학생! 자네의 재능은 너무도 아까워! 그 나이에 별의 마법을 쓰고 성운의 시조가 남긴 마법 술식을 풀다니! 자네는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그런 재능이란 말일세!”

“전 아직 기사학 수업과 소환학 수업도 듣고 싶어서요. 좋게 봐주신 건 고맙지만 2학기에도 세 개 수업을 다 들을 예정입니다.”

그렇게 말한 레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교수님. 1학기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레오는 렌의 교수실을 나갔다.

레오가 나가자 교수실로 들어온 안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 보세요. 잘 안 될 거라고 했죠?”

“아무래도 2학기부터는 레오 학생이 마법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여러 이벤트를 준비해야겠군.”

“이벤트요?”

“마법사라면 혹하지 않을 수 없는 강의를 만들어야겠어. 레오 학생도 마법사라면 혹할 수밖에 없겠지!”

열정에 타오르는 렌을 보며 안나가 미소 지었다.

‘가끔 폭주를 해서 주변에 민폐를 끼쳐서 그렇지 역시 이 사람은 마법에 대한 열정으로 타오를 때가 제일 멋있어.’

“렌 교수님을 응원하고 있겠어요.”

“그래, 그러니 안나 부교수. 방학 동안 나와 함께 다음 학기 준비를 하도록 하지.”

안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나와…… 함께 라뇨?”

“나의 가장 믿음직한 부교수인 자네는 나와 방학 기간 내에 아카데미에 머물면서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거지!”

“전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려고 학교에 휴가를 제출했는데요.”

“신청이라면 내가 이미 취소해두었네!”

“야! 이 인간아! 1학기 초에는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오라면서!”

격노한 안나가 렌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붙잡았다.

감히 부교수가 교수의 멱살을 붙잡는 하극상이었지만 렌은 그저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렌의 폭주의 민폐의 대상이 된 건 안나였다.

***

칼리안이 교장실에서 학교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문이 열리고 두 교수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할린드와 세드젠이었다.

루메른 최고참 교수인 두 교수는 루메른 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교수들이었다.

루메른 교수직은 원한다고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매해 엄중히 치러지는 자격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루메른 교수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오랫동안 루메른에 근속해온 두 사람은 교장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들이라 할 수 있었다.

“1학년 시험 기간 도중에 부탁해서 미안하네.”

칼리안은 이번 학과대항전 사건의 뒷수습을 두 교수에게 일임했다.

“아닙니다. 4, 5학년을 맡을 때 보다 여유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졸업을 앞둔 4, 5학년을 담당하는 건 확실히 엄청나게 많은 업무를 요구했다.

그런 4, 5학년을 맡다가 올해는 1학년을 맡았으니 손이 비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의심 인물들은 추렸나?”

교장의 물음에 세드젠이 종이 한 장을 교장의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그걸 본 칼리안이 혀를 찼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는 이들은 모두 추렸습니다.”

“이사회 쪽 추천 인물들이 제법 많군.”

종이를 내려다 두며 칼리안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쪽은 앞으로 내가 이야기해두겠네.”

“알겠습니다.”

“할린드. 자네 쪽은 어떤가?”

“일단 모든 나라에서 제법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히어로 레코드를 보유한 루메른은 수많은 인재를 육성한다.

자국의 인재를 믿고 맡길 수 있냐는 논쟁은 현재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 상태였다.

물론 근본적인 이유는 루메른의 영향력을 깎아내리기 위한 구실이었다.

오래전부터 루메른이 히어로 레코드를 독점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가진 나라는 많았다.

“그래서?”

“자신들이 추천하는 이들을 교수로 받아 달라는 게 그들의 요구입니다.”

“자신 파벌의 교수들을 늘려 루메른에 영향력을 늘리겠다는 생각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각종 사건으로 최근 인력이 부족하니 만큼 기간제 교수라면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군. 그 건은 할린드. 자네가 맡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칼리안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2학기부터는 교감을 복귀시켜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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