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11.
갑작스러운 사태에 콜로세움 전체는 혼란에 빠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베르가 교관! 큰일이네! 아르온님의 영웅의 세계가 열렸네!”
“뭐라고?”
베르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전 일어난 현상이 영웅의 세계가 구축되는 전조 현상이라는 것쯤은 베르가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진짜 영웅의 세계가 오픈되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영웅의 세계를 여는 데 필요한 것은 영웅 본인, 혹은 강한 인연이 깃들 물건이다.
지금 시대에는 대영웅과 관련된 물건은 고사하고 대영웅들의 페이지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래서 지금껏 열리지 않은 페이지는 앞으로도 영원히 오픈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페이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중 하나가 열린 것이다.
“폭주인가?”
“그런 것 같네!”
어떤 이유에서든 아르온의 세계가 열린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폭주로 인한 던전화라고 해도 공략만 한다면 아르온의 힘을 계승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지금 아르온의 세계에 들어간 이들이었다.
자신의 딸과 오랜 지기의 아들.
아직 애송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솜털들.
‘아르온님의 세계를 그 아이들이 공략할 수 있을까?’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베르가가 이를 악물었다.
***
“이게 아르온님의 세계라면 지금은 재앙의 시대라는 거잖아?”
“그런 것 같아.”
레오가 하늘에서 시선을 때고 대답하자 아르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영웅의 세계가 발동된 거지?”
“글쎄. 일단 바깥과 통신을 해보자.”
그 말에 레오가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붙인 상태로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그 상태로 집중하자 희미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레…… 아니. 카일입니다. 들리십니까?”
정상적인 영웅의 세계라면 바깥과 통신을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레오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바깥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레오가 힐끔 아르를 보았다.
아르 역시 외부와의 통신에 실패한 듯 낭패어린 표정을 지었다.
폭주로 인한 영웅던전? 그렇다면 갑자기 왜? 지난 수천년동안 서장 페이지는 열렸다는 기록이 한 번도 없는데.“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아르를 보며 레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느닷없는 아르온 페이지의 폭주.
이 사태에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영웅학 수업 때와 베르키아에서 내가 내 영웅의 페이지를 만졌을 때 영웅의 세계가 오픈됐어.’
리시나스와 루나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던 레오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 페이지였어. 지금 이건 누가 봐도 아르온의 페이지인데?’
[공략 목표: 레이사르에서 아르온을 찾으십시오.]
그때 레오와 아르 앞으로 메시지가 떴다.
”공략 목표? 그렇다면 이건 영웅 던전이 아니라는 소리잖아?“
아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웅 던전에는 공략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략 목표가 떴다는 건 아르의 말대로 폭주로 인한 영웅 던전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정식으로 열린 세계라면 왜 바깥과 연락이 닿지 않는 거지?“
”그, 글쎄?“
그 의문에 대해서는 아르도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열렸기 때문이 아닐까? 영웅의 세계를 통제하려면 세계를 열 때 필요한 열쇠가 필요한데 그 열쇠를 찾지 못한 거겠지.“
”열쇠라.“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쨌든 공략 목표가 아르온님을 찾는 거라면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르의 말에 레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 레이사르에서 아르온을 찾는게 과연 쉬울까?”
레이사르.
재앙의 시대 때 존재했던 난민 도시.
수많은 종족을 수용했던 만큼 도시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르온님은 유명하니까, 쉽지 않겠어?”
“아르온이 명성을 얻은 건 에레보스 토벌대에 참여해 레이사르를 떠난 후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아르온님인걸? 토벌대에 들어가기 전부터 엄청나게 명성이 높았다고 문헌에 기록 되어 있잖아? 리시나스와 루나도 그런 아르온님의 명성을 듣고 레이사르를 찾아 갔던 거고.”
‘하긴 지금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겠군.’
기록된 역사와 실제 역사는 다르다.
이 시절의 아르온은 전혀 유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이 시대를 살았던 레오 뿐이었다.
‘영웅의 세계 공략은 일단 옛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
머리를 벅벅 긁은 레오가 한숨을 쉬었다.
‘아르 입장에서는 내가 이 시대에 아는 척 떠들어 봤자 별로 믿음이 안 갈 거고. 직접 경험하는 게 납득 하기 편하려나.’
“흩어져서 아르온님에 대한 정보를 모으자!”
“여긴 영웅의 세계야. 함부로 흩어지면 안 돼.”
“음! 그렇네! 그럼 같이 찾자!”
선망하는 아르온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르는 의욕적으로 탐문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아르온님이라고 아시나요?”
“아르온? 그게 누군데,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저기요. 아르온님이라는 분을 찾고 있는데요?”
“그딴 영문도 모르는 놈을 내가 어떻게 알아?”
“거기, 수인! 아르온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죠?”
“전혀.”
온종일 사람들에게 아르온에 대해 묻고 다녔다.
그리고 해가 저물 무렵.
“왜 아르온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데! 아르온님은 에레보스 토벌대에 합류하기 전부터 이미 유명했던 거 아니었어!?”
우갸! 소리치는 아르를 보며 레오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실제 역사와 기록 된 역사는 다른가 봐.”
“으윽!”
레오의 대답에 아르가 움찔했다.
한편 레오는 탐문 과정에서 모은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했다.
‘지금 시대는 알테그라력으로 1462년.’
재앙의 시대가 시작되고 20년이 지난 시기였다.
‘이때라면 아예 맨땅에서 아르온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니야.’
“일단 쉴 곳부터 찾자.”
“이런 도시에 쉴만한 곳이 있을까?”
아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루 동안 레이사르의 거리를 활보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살던 시대와 재앙의 시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불친절하고 거칠었으며 이곳저곳에서 싸움은 밥 먹듯 일어났다.
단순히 치안이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이가 세상이 끝날지 모른다는 원초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말 그대로 살아가는 세계가 달랐다.
“괜찮은 곳을 찾아봐야지. 거리에서 자는 건 위험해.”
“그럼 여관을 찾자.”
‘여관은 안 되는데.’
레오가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 카일조차도 레이사르에 왔을 때 잠자리 때문에 상당한 고생을 했었다.
‘제대로 된 여관이 하나도 없었지.’
지상 최대의 난민 도시이다 보니 수많은 사람이 레이사르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숨 쉬듯 당연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악질적인 놈들도 존재했다.
물론 그런 범죄자들은 낮에 활동하지 않는다.
이 도시를 지키는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치안을 유지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은 아니었다.
도시는 해가 지는 순간 거리는 공포로 물든다.
골목 곳곳에는 범죄가 일어났으며 치안이 나쁜 구역에는 살인조차 빈번하게 일어났다.
과거 이 도시에서 이곳저곳을 헤매던 카일 일행도 한 달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안전한 곳을 찾게 되었다.
‘거기로 가야 해.’
게다가 그곳은 단순히 안전하기만 한 장소가 아니었다.
“저기에 가보자.”
아르가 주변에 여관을 가리켰다.
레오는 그런 아르의 뒤를 따랐다.
딸랑- 딸랑-
문이 열리자 1층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일순간 그들의 시선이 아르에게 꽂혔다.
그에 긴장하던 아르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주인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하긴 했지만, 주인은 엘프였다.
그걸 본 아르는 살짝 안도했다.
엘프는 자존심은 강했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종족이었다.
그런 만큼 허튼짓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저기요, 오늘밤 머물 수 있는 방이 있나요?”
“아니. 오늘은 남은 방이 없는데. 뭐, 내 방이라도 좋다면야.”
비릿한 웃음을 짓는 주인을 보며 아르가 당황했다.
설마 엘프가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추파를 던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아르의 얼굴이 싸늘해지는 것을 본 레오가 아르의 손을 잡고 여관을 나왔다.
“아무래도 멀쩡한 곳을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네.”
“그러네.”
아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리 시대와 이 시대는 상식선이 완전히 다르구나.’
이후에도 레오와 아르는 잠잘 곳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하지만 안전해 보이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 머물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아르는 어두운 얼굴로 레오의 뒤를 쫓았다.
한편 레오는 헤매는 척하면서 아르를 자신이 알고 있는 장소로 유도했다.
‘다 왔다.’
레오가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아르는 그런 레오를 보며 멈칫하더니 주변을 보며 당황했다.
‘언제 이런 곳으로 왔지?’
레오가 도착한 곳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거리 한복판이었다.
화악-!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에서 살기를 느낀 아르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주먹을 휘둘렀다.
덥석-!
하지만 아르의 공격은 상대에게 손쉽게 막혔다.
공격이 막혔음에도 아르는 당황하지 않고 손톱을 세워 오러를 담았다.
그걸 본 레오가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 아르! 싸우지 마!”
하지만 싸움을 말리기에는 이미 불똥이 제대로 튄 상태였다.
콱-!
오러가 담긴 아르의 날카로운 손톱이 상대의 가슴팍에 박혔다.
하지만 아르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상대의 오러 아머에 막힌 것이다.
이를 악문 아르가 다급히 상대의 손을 떨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그가 먼저 아르의 목덜미를 잡는 게 빨랐다.
“컥?”
“네놈들은 누구냐? 왜 이곳에 침입한 거지?”
이를 악문 아르가 반격을 위해 오러를 일으켰다.
그런 아르를 보며 미간을 좁힌 고양이 수인은 그대로 아르를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커억?”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아르는 의식의 끊기기 직전 힘겹게 말했다.
“검은 토끼, 너라도 도망……!”
혼절한 아르를 내버려 둔 그는 살기 어린 시선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왜 이 구역에 들어온 거지?”
“여기로 가라는 말을 듣고 왔어.”
“누가? 여긴 출입 금지 구역인데?”
그 말대로였다.
이곳은 저주받은 땅이라 불리며 버림받은 곳이다.
상대방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게 심호흡하고 양손을 든 레오가 진지하게 말했다.
“겁쟁이 아르온이 우리를 여기로 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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