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공략 목표(Hidden): 창천의 수호자 아곤을 구원하십시오.]
사라지지 않은 공략 목표를 본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공략 목표는 충족되지 않았어.’
이미 실제 역사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히든 공략 목표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고아원이 안전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다.
레오가 불의 마법을 이용해 시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화르륵-!
‘이대로는 가면 결과는 같다는 건가?’
원래 공략 목표는 카일의 기억으로 쉽게 해결했지만 히든 공략 목표의 달성은 쉽지 않았다.
‘아곤을 불러와야 하는 건가?’
지금 모든 사태는 아곤이 고아원을 비웠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하지만 지금 아곤은 영주성에 있어.’
어쩌면 오늘 밤에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얼굴을 찡그리던 레오가 엘시를 보았다.
‘아니, 어쩌면 아곤이 있다고 해도 막기 힘들지 몰라.’
히든 공략 목표가 뜬 건 레오가 엘시와 만난 이후부터다.
즉, 엘시가 가드스론으로 떠나지 않았는데도 고아원의 아이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대정령 조차 막지 못할 죽음.
레바이튼이 무얼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아곤을 불러온다 해도 아이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는 건 그 녀석뿐인가.’
친우를 떠올리며 레오는 아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아르가 겁에 질린 고아들을 다독여 주고 있었다.
“왔어?”
조금 전 레오를 떠올린 아르가 머뭇거렸다.
아르는 레오가 그들을 어떻게 했는지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탓할 생각은 없다.
그들에게 동정의 여지는 없다.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려 했으며 그대로 보냈다면 또다시 쳐들어왔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영웅의 세계.
아무리 진짜 같아도 그들은 가짜다.
하지만 이제 열다섯 소녀인 아르로서는 손에 피를 묻히는 행위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레오가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검은 토끼. 괜찮아?”
조심스럽게 묻는 아르를 보며 레오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신경 안 써 줘도 돼.”
또래 소년답지 않은 거친 손길은 아르의 목을 살짝 짓눌렀다.
‘어른 같아.’
묘한 성숙함을 느끼며 아르가 고양이처럼 레오의 손길을 빠져나갔다.
“그나저나 이걸로 끝나지는 않겠지?”
“그렇겠지.”
“괜찮아! 아곤 아저씨가 올 때까지 검은 토끼랑 내가 잘 버티면!”
“쉽지 않을 거야.”
레오의 말에 아르가 움찔 몸을 떨었다.
“조금 전 쓰러트린 녀석들보다 더한 실력자들이 올 거야.”
“으음! 그래도 검은 토끼랑 내가 힘을 합치면……!”
“단순히 쓰러트리는 건 그렇겠지, 하지만 아이들을 지키면서 버티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그, 그런…….”
아르의 귀와 꼬리가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레오가 말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뭔데?”
늘어졌던 꼬리가 쫑긋 섰다.
“아르온을 찾는 거지.”
“아르온님을? 하지만 아곤님이 아르온님은 레이사르를 떠났다고…….”
“아르온은 레이사르에 머물고 있어.”
레오가 성벽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확인했는데 성벽 밖으로 나갈 수 없었거든.”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고? 그렇다는 건 우리 활동 범위는 레이사르 내부뿐이란 거잖아?”
“맞아.”
“그럼 네 말대로 아르온님은 레이사르에 있는 게 확실하네!”
아르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런데 이 넓은 도시에서 아르온님을 어떻게 찾아? 당장이라도 그놈들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확실히 이 드넓은 난민 도시에서 수인 한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레오가 힐끗, 고아원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영웅의 세계는 이미 공략했어.’
히든 공략 목표는 말 그대로 선택지일 뿐.
꼭 달성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공략해낸다면 더 큰 보상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일지 몰랐다.
특히나 영웅의 세계에 있는 이들은 이미 원래 역사에서는 죽고 사라진 자들.
이들을 살린다고 죽은 자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고아원 동생들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던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곤이라는 남자가 용자 아르온을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라면.
이 아이들은 아르온이 그 힘겨운 싸움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게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
세상의 사람들이 편히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아르온의 소망은 자기 동생들같이 불행한 아이들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만들어진 소망이었다.
그렇기에 레오는 이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 아이들뿐만 아니야.’
누가 뭐라 해도 레오는 이 시대를 살았다.
결코 레오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었다.
“아르.”
“응?”
“우리는 공략을 완료했어. 그러니까 이 이상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레오의 말에 아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빤히 레오를 보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
“흥! 말은 그렇게 하면서 넌 이번 일에서 안 빠질 거잖아? 너 혼자만 멋있는 일 하려고 그러지? 다 알고 있거든?”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
“그딴 거에 겁먹을 줄 알아? 난 아르온님의 이야기를 동경해서 영웅을 꿈꾸게 되었어.”
아르가 가슴을 활짝 폈다.
“그런 내가 겁쟁이 같이 물러설 리 없잖아? 게다가!”
“게다가?”
“너 혼자 활약하면 나중에 아르온님이 너만 예뻐해 주실 거 아니야!”
아르는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열심히 할 거야! 열심히 해서 아르온님께 잘했다고 칭찬도 받고! 쓰다듬을 받고 싶어!”
아르온이 자신을 칭찬해주는 생각을 했는지 아르는 몸을 배배 꼬아댔다.
그러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레오의 시선을 눈치채고 헛기침했다.
“어쨌든! 아르온님을 찾을 방법이 떠오른 거지?”
“응.”
“그럼 찾아 와! 그때까지 내가 여기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원래 아르를 피신시키고 엘시에게 이곳을 지켜달라고 부탁하려 했던 레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자식이 너처럼, 아니. 네 반만 했어도 내가 그런 개고생은 안 했을 텐데 말이야.”
“응? 무슨 뜻이야.”
“혼잣말이야.”
고개를 저은 레오가 진지하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올게. 위험하다고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물러서.”
“걱정 마시라!”
자신만만하게 팔을 굽혀 보이는 아르를 보며 레오가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아르가 양손을 치켜들었다.
“좋았어! 열심히 해서 아르온님께 잔뜩 칭찬받는 거야! 아자!”
***
“제린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레이사르의 영주성.
아곤이 영주 로데안을 대면한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고아원으로 보냈던 제린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아직 없어.”
“쓸모없는 것! 설마 당한 건가!”
“그 고아원에는 저항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애들만 있는 거 아니었어?”
“아까 봤을 때 외부인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두 명 있었습니다. 그 녀석들에게 당한 듯하군요.”
“외부인이라.”
잠시 흥미를 보이던 여인이 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오늘이 샤텐을 얻을 절호의 기회인데 이대로 놓칠 거야?”
“설마요. 고아원을 건드린 걸 안 이상 아곤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레바이튼이 순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정말 샤텐을 아곤이 숨겨두고 있는 게 확실합니까?”
“확실해. 내가 했던 말 중 틀린 게 있었어? 아니면 이제 와서 불안해진 거야?”
“그, 그건 아닙니다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날개가 꺾여 은거한 영웅이 뭐가 무섭다고 벌벌 떠는지 모르겠네.”
비웃음을 짓던 여인이 이내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서워도 상관없어. 창천의 수호자가 영웅인 이상, 그는 아무것도 못 해. 영웅이란 그런 족속이거든.”
여인의 불길한 황금색 눈이 번뜩였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대의를 지키는 어리석은 족속. 놈은 절대 이 레이사르를 위기로 몰아넣지 않아. 그러니 안심하도록 해. 레바이튼.”
“아,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직접 고아원으로 가서 샤텐을 회수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황급히 방을 나서는 레바이튼을 보며 여인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샤텐은 부러진 게 맞나 보군. 그럼 잡아먹기 쉽겠어.”
여인은 샤텐이 정령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여인이 입술을 날름거렸다.
“과연 대정령도 요정왕만큼 맛있을까?”
***
레이사르의 거리로 나온 레오는 곧바로 아르온이 찾아갈 만한 곳에 대해 생각했다.
‘녀석이라면 어디 틀어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을 게 분명해.’
레오는 과거 아르온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레이사르는 아르온이 10년 동안 살았던 곳.
그런 만큼 마음을 추스를만한 추억의 장소는 얼마든지 있었다.
레오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5000년 전, 레이사르에 처음 도착한 이후 한 달 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했던 만큼 지리에는 능했다.
그 기억과 아르온이 이야기 했던 장소를 대조했다.
‘제일 자주 갔다고 했던 곳이 종루였지?’
레오는 거대한 종이 달린 탑을 향해 달려갔다.
타르타로스의 침공이 있을 때 위기를 알리는 거대한 종이 있는 장소였다.
탑 꼭대기에 도착한 레오는 아르온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르온이 없다는 걸 확인한 레오는 곧바로 다음 장소로 향했다.
자주 갔다는 공원.
혼자 수련했다는 뒷골목의 공터.
아르온이 이야기했던 장소들을 뒤졌지만 도통 아르온을 찾을 수 없었다.
“허억. 허억.”
레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거의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진 레오조차도 숨이 벅찰 정도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더 이상 떠오르는 장소가 없는데.’
레오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과거에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아르온, 그렇게 강하면서 레이사르에 있을 때는 한 번도 타르타로스와 싸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마족들이 무서웠으니까.’
‘오히려 마족들이 널 무서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신기하다는 듯 말하던 루나의 말에 드웨노가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말게. 아르온은 자네와 달리 섬세하지 않은가?’
‘무슨 소리야! 나도 섬세해!’
‘자네에게 있어 섬세한 구석이라고는 그 고운 외모밖에 없네. 물론 그 외모조차도 자네의 곱지 못한 성격에 의해 빛이 바래는 듯하지만.’
‘죽어어어어!’
분노한 루나가 지팡이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하지만 드웨노는 얄밉게 그 공격을 모조리 방어해낼 뿐이었다.
일행은 두 사람의 싸움이 익숙하다는 듯 내버려 두었다.
‘그래도 싸우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있지 않아?’
리시나스의 물음에 아르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있어. 그래서 한 날은 레이사르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용기를 내보려고 다짐했었어.’
‘높은 곳을 싫어하지 않았어? 왜 그런 곳에 간 거야?’
‘스승님과 동생들이 사는 도시를 꼭 지키고 싶었거든. 지키고 싶은 곳을 직접 보면 용기가 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어.’
아르온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무 겁쟁이여서 용기가 생겼을 때는 동생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였지만.’
레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레이사르에서 가장 높은 첨탑으로 향했다.
저곳이라면 레이사르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게 분명했다.
***
첨탑 내부로 들어온 레오는 계단을 올라 순식간에 꼭대기 층으로 달렸다.
끼익-!
원래 잠겨 있어야 할 문은 방문객이라도 있는 듯 열려 있었다.
터벅-
숨을 몰아쉬며 레오가 발걸음을 옮겼다.
넓은 크기의 첨탑은 둥근 형태로 되어 있었다.
터벅- 터벅-
둥근 형태의 난간을 따라 입구의 반대쪽으로 향한 레오는 걸음을 멈추었다.
텁-
난간에 기대 도시를 내려다보던 아르온의 하얀 늑대 귀가 꿈틀했다.
그리고 놀란 듯 레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
앳된 티가 남아있는 아르온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이때 아르온이 아마 18살이었나?’
대영웅 중 유일하게 재앙의 시대에 태어난 영웅.
어이가 없을 정도로 겁이 많았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용기를 가졌던 친구.
오랜 세월 함께 싸웠던 전우를 보며 레오는 목이 메는 걸 느꼈다.
다시 한번 대화를 나눌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비록 영웅의 세계라 할지라도.
친구가 자신을 몰라도.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입을 열었다.
“너를 데리러 왔어, 아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