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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급 영웅은 아카데미 우등생-120화 (120/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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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영웅의 세계를 해제할 방법을 못 찾은 건가!”

“어, 어쩔 수 없습니다! 영웅 던전이라 통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크윽!”

여유를 잃은 베르가의 눈에서 초조감이 감돌았다.

아르온의 세계가 열린 지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다.

영웅의 세계 자체가 풀리지 않는다는 건 레오와 아르가 잘 버티고 있다는 소리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아르! 카일이여!’

“어서 빨리 통제할 수단을 찾아!”

“으아아악! 베, 베르가 교관님!”

부교관의 멱살을 잡는 베르가를 보며 모든 이들이 당황할 때였다.

“진정해라, 베르가.”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베르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간 남자를 보며 부교관의 멱살을 놔주었다.

“아인.”

아인의 뒤를 이어 유라도 심각한 얼굴로 들어왔다.

“루메른의 교수들이 여긴 어쩐 일이지?”

베르가의 물음에 아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영웅의 세계와 관련된 일이니까. 경험을 공유하는 게 좋겠지. 우리 학교도 이번 1학기 때 불미스러운 사건이 여러 번 있었으니까.”

유라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아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중간고사의 영웅 던전화.

학기 말의 학과대항전.

이 두 사건은 잘 해결되긴 했지만 외부에서는 루메른의 치부로 취급되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외부인에게 서슴없이 꺼냈으니 유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조니아는 루메른과 다르다! 이건 단순한 사고야!”

“그렇다고 해도 힘을 합해서 나쁠 건 없지. 너와 아조니아의 교관들이 경험 못 한 일을 나와 내 후배는 경험한 적이 있으니까. 방해는 되지 않을 거다.”

그 말을 들은 베르가가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했다.

어느 상황에서나 냉정한 아인의 말을 들으니 흥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미안하네. 흥분해서 말을 함부로 한 것에 대해 사과하겠네.”

“괜찮아요.”

유라가 손사래를 쳤다.

“그나저나 대영웅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린 게 도대체 몇 년 만이죠?”

“올해 초에 루메른에서도 열렸다고 들었는소만?”

“그렇게는 한데, 우리는 정말 짧게 열렸다 닫혔거든요.”

“열렸을 때 어땠소?”

“우리도 갑작스러운 폭주였어요. 그래서 원인은 알 수 없었죠.”

베르가의 얼굴이 심각해질 때였다.

우웅-!

갑자기 아르온의 페이지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걸 본 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영웅의 페이지가 반응을 보일 때는 둘 중 하나였다.

영웅의 세계가 공략되었거나, 공략자의 죽음으로 페이지가 닫혔거나.

모두가 긴장하는 가운데 아르온의 페이지에서 레오와 아르가 튀어나왔다.

“아르!”

“아버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껴안는 베르가를 보며 아르가 환하게 웃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네! 아버지! 저 아르온 님의 세계를 공략했어요!”

“그건 상관없다! 아르! 내 딸이여!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딸을 부둥켜안으며 베르가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어릴 때 딸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혹독하게 수련시킨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딸이 죽지 않고 시련을 이겨 낼 힘을 키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르 역시 그걸 알기에 아버지인 베르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한편 레오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야!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레오는 빛의 보옥에서 느껴지는 엘시의 존재에 당황했다.

공략 보상 목록을 봤을 때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정령인 엘시가 어떻게 공략 보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조금 전 엘시와 맺은 계약 역시 유효했다.

이건 말 그대로 죽은 자가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엘시?’

[…….]

레오의 부름에도 엘시는 잠이 든 듯 묵묵부답이었다.

그에 레오가 머리를 벅벅 긁을 때였다.

“아버지! 여기 검은 토끼가 없었으면 공략을 해낼 수 없었을 거예요!”

“…….”

베르가의 시선이 레오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레오가 볼을 긁적였다.

어느새 평소의 위엄 있는 모습으로 돌아온 베르가가 진중한 표정으로 레오 앞에 섰다.

“카일이여.”

베르가가 레오를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레이나의 아들에서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건 베르가가 레오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놀랍구나. 아르온 님의 페이지를 공략해 내다니.”

“저 혼자 한 것 아닌데요.”

“훗, 겸손인가.”

웃음을 터트린 베르가 주먹을 쥐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아르와 너는 아르온 님의 세계를 공략해냈다! 이것이야말로 영웅 사관 학교, 아조니아의 학생으로 어울린다는 결정적 증거! 기쁘구나!”

베르가가 팔짱을 끼고 위엄 있게 소리쳤다.

“나 베르가가 네가 패도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마!”

아조니아 아카데미는 담당 교관을 선택해야 한다.

그중 유명 교관에게는 학생들이 몰리기 마련.

그리고 베르가는 누구나 배움을 원하는 최고의 교관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레오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대단한 명예이며 학교생활이 보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검은 토끼! 우리 열심히 해 보자!”

아르도 환하게 웃으며 레오를 환영할 때였다.

덥석-!

뻗어 나온 여성의 손이 레오의 토끼 귀를 붙잡았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유라가 베르가를 향해 양해를 구한 다음 환하게 웃는 얼굴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학년 대표씨? 여기서 뭘 하는 걸까나?”

“누구세요?”

레오가 뻔뻔하게 말했다.

유라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걸리는 순간 귀찮아진다는 걸 직감했다.

“누구세요? 누구세요? 이 자식이! 한 학기 동안 열심히 가르쳐 준 교수님도 못 알아봐? 아니면? 고작 마법 좀 썼다고 교수들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도끼눈을 뜬 유라가 힘을 주었다.

“야! 너 왜 여기 있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바른대로 말해. 루메른이랑 아조니아랑 간 보는 거야? 죽을래? 죽고 싶어? 엉?”

유라의 손에 힘줄이 우두둑- 솟더니 어렵지 않게 레오를 들어 올렸다.

레오는 귀가 잡힌 토끼처럼 대롱대롱 매달렸다.

“대체 무슨 소린가, 이게?”

베르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묻자 아인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 학교 학생이 실례를 저지른 모양이군. 어떻게 아조니아의 입학식에 참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개하지.”

유라의 뒤에서 빠져나온 레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폴리모프 마법을 해제했다.

레오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토끼 귀는 사라지고 머리카락은 하얀색으로 변했다.

인간으로 돌아온 레오를 보며 베르가와 아르가 입을 떡 벌렸다.

“이쪽은 레오 플로브. 루메른 1학년 학년 대표일세.”

“안녕하세요, 레오 플로브라고 합니다.”

*

레오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난리가 났다.

‘루메른 학년 대표라도 상관없다! 아조니아의 문은 열려 있다! 카일! 아니, 레오 플로브여! 아조니아에 입학하면 된다!’

‘우리 학교 기사학과 학생에게 무슨 헛소리냐?’

‘왜 기사학과야! 소환학과지!’

베르가의 외침에 아인과 유라가 투닥거렸다.

아르는 어딘지 모르게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레오가 사과하려고 했지만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럴 틈이 없었다.

‘레오 학생, 제발 부탁합니다. 자제 좀 해 주세요. 우리 너무 힘듭니다!’

카를로 부교수는 눈물을 흘리며 레오에게 애원했다.

안 그래도 레오의 학과 문제 때문에 교수들 사이에서는 신경전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영웅 사관 학교까지 끼어든다면 죽어 나가는 건 부교수와 조교들이었다.

그렇게 레오는 아조니아 입학식에 참석하게 된 이야기를 설명했다.

거기에 불법적인 일은 없었기에 일단 헤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조니아 관계자들은 여러모로 레오에게 아쉽다는 눈빛을 보냈다.

입학 전에 아르온의 세계를 공략한 신입생은 전대미문이었다.

아르 역시 그것을 해냈지만 기왕이면 공략자 두 사람이 같이 입학하는 게 보기 좋았다.

“방학 때 이런 식으로 사고를 친 건 루메른 역사상 네가 처음일 거다!”

유라가 레오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큰 문제가 생길 만한 일이 없었으니 상관없지.”

아인은 덤덤하게 반응했다.

학년 대표로서 다른 영웅 사관 학교 라이벌들을 체크하러 온 걸 꽤 긍정적으로 평가한 모양이었다.

“뭐, 입학식에는 참석 못 하게 되었지만요.”

레오는 사막 횡단 마라톤에 참석하지 못했다.

“당연하지! 너! 입학식 참석했으면 그대로 아조니아에 강제 입학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긴 하겠죠.”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공략 보상이 아쉽네.”

아르의 공략 보상은 아르온의 호흡.

문헌에만 나오는 아르온의 수화 능력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물론 공략 보상에 대해 알려지면 큰 후폭풍이 예상되었기에 함구령이 내려졌다.

아르가 제대로 된 학교생활이 불가능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내려진 조치였다.

이번 공략 보상에 대해 아는 건 그 자리에 있었던 소수와 공략 당사자들뿐이었다.

“인간인 너는 그런 공략 보상을 얻어 봤자 쓸 수 없잖아.”

“아르온의 세계를 공략해 낸 것만으로 만족해야죠.”

“그 사실도 알려지면 안 되거든?”

유라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헤프닝으로 넘어가긴 했어도 알려져서 좋을 건 없었다.

겉으로는 얻은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레오는 다른 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걸 공략 보상으로 얻었다.

‘엘시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소환술과 관련된 보상들은 대게 소환 촉매나 계약 자격이다.

이런 식으로 소환수가 직접적으로 공략 보상이 된 적은 없었다.

‘일단 그건 돌아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아르가 조금 걱정되네. 아르온의 호흡을 제대로 컨트롤을 못 하는 것 같았는데.’

완벽하게 수화하지 못한 데다가 힘을 주체 못 하던 아르를 떠올리며 레오가 혀를 찼다.

하루아침 만에 아르온의 힘을 손에 넣은 셈이니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도와줄 수 있을 텐데.’

“아무튼! 너 이번 방학 때 더 이상 사고 치지 마라?”

워프 게이트 앞에 도착한 유라가 경고하듯 말했다.

아인과 유라, 두 교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학년 대표가 순순히 집으로 갈 것 같지 않아 감시하기 위해 워프 게이트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더 이상 사고 칠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엄청난 사고를 친 게 들킨 상태라 말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2학기 때 뵙겠습니다, 교수님들.”

“오냐! 방학 끝나고 보자!”

“잘 쉬어라, 레오 플로브.”

교수들에게 인사한 레오가 워프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빛이 번쩍임과 함께 레오가 아즈렉을 떠났다.

“진짜 학교생활은 얌전하게 하면서 왜 가끔 이런 대형 사고를 치는 거지?”

유라가 지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아조니아에서 잘 넘어 가줬으니 더 이상 문제없겠죠?”

“나에게 매달 정식 교관이 되어 달라는 편지가 날아오는 걸 보면 모르겠나?”

유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우리 학교 잘 다니고 있는데 학교를 바꾸려고…….”

“그거야 알 수 없지. 일단 아조니아도 우리와 동등한 영웅 사관 학교니까.”

아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린드 교수님의 말에 의하면 세이룬에서도 전학 제의가 있었다고 하더군.”

“…….”

유라의 얼굴이 더욱 심각해졌다.

두 선후배는 서로를 보며 생각했다.

‘이거…….’

‘우리끼리 싸울 상황이 아닐지도.’

학생 쟁탈전에 외부 세력이 끼는 전대미문의 상황에 두 교수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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