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5000년이 지난 후요? 그리고 환생?]
“그래.”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엘시를 보며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만요. 생각을 좀 정리할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제가 있던 시간대로부터 5000년이 지난 상태고 에레보스는 토벌되었다는 건가요? 그리고 당신은 ‘살아남는 영웅’ 카일의 환생이고요?]
“그래.”
[그럼 제가 어떻게 5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곳에 온 건가요?]
“지금 시대에는 히어로 레코드라는 게 있어.”
[히어로 레코드?]
“신들이 인정할 만한 위업을 이룬 자의 기록이 쓰이는 물건이야.”
레오는 엘시에게 히어로 레코드에 관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럼 지금 세상에는 과거의 정령이나 환수들이 가득한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 너처럼 히어로 레코드에 있던 정령이 현실로 넘어온 적은 내가 알기론 한 번도 없어.”
설명을 듣고 엘시가 또다시 창밖을 보았다.
불길한 붉은 달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하얀 달과 아름다운 별빛들만 가득한 세상.
그렇게 꿈꿔 왔던 밤하늘이 분명했다.
[이 광경을 본 이상 당신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네요.]
검은 눈동자에 한가득, 밤하늘의 별빛을 담던 엘시가 레오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평화의 시대겠군요.]
“그래. 하지만 완전히 평화의 시대라고는 할 수 없어.”
[어째서요?]
“내가 에레보스를 토벌한 건 사실이지만 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그리고 타르타로스도 여전히 건재해.”
[그렇군요.]
“그래서 난 놈들을 쓰러트릴 거야.”
[그렇다면 나도 돕겠어요.]
엘시가 다짐하듯 말했다.
[이게 현실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할 운명이겠죠.]
엘시도 자신이 레오에게 귀속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런 끔찍한 시대가 찾아오는 걸 용납할 수 없어요.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울게요.]
“그래.”
[그럼 다시 한번 잘 부탁드려요. 카일, 아니. 레오 플로브.]
“그래. 잘 부탁해, 엘시.”
***
아조니아에서 돌아온 날 이후부터 레오는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첼시는 레오뿐만이 아니라 레이나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레이나와 부쩍 친해진 첼시는 레이나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듣고 있었다.
“아, 그럼 바스테라의 여제가 레이나님이셨어요?”
지금도 전투학 수업에서 자주 하는 구기 종목.
바스테라에서 활약했던 이야기를 들으며 첼시가 놀라워했다.
“응.”
“와!”
아침 식사 시간.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둘을 보며 데이드가 웃었다.
“네 어머니가 네 친구와 잘 지내는구나.”
“그러게요.”
첼시는 최근 레이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레오. 담임 교수님의 가정방문 날이 오늘이었지?”
“네.”
“환영회 같은 걸 준비 안 해도 되겠니?”
데이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루메른의 교수라고 한다면 어느 나라에서나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거기에 더해 할린드라고 하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 교수.
그런 사람이 방문하는데 준비한 게 없으니 데이드로서는 살짝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할린드 교수님은 오히려 뭔가를 준비하는 걸 싫어하실 거예요.”
“맞아, 데이드. 할린드 교수님은 그런 겉치레를 싫어하셔.”
“우리 집에 방문하실 때도 차만 대접해드렸어요.”
레오의 말에 레이나가 맞장구를 쳤고 첼시도 거들었다.
그 말에 데이드는 살짝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아침이 끝나고.
레오와 데이드, 레이나는 할린드의 방문을 기다렸다.
시종이 할린드의 방문을 알리자 데이드가 살짝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플로브 가문의 저택 문이 열리고 할린드와 세나 부교수가 들어왔다.
데이드가 앞으로 나섰다.
“반갑습니다, 할린드 교수님. 본가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로브 후작님.”
할린드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학부모와 자식을 가르치는 교사입장에서 만난 만큼 두 사람 사이는 매우 진중했다.
“여기는 제 안사람 되는 사람입니다.”
할린드는 데이드의 소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는 레이나를 발견하고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할린드 교수님. 주름살이 많이 느셨네요?”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레이나 제르딩거.”
“지금은 레이나 플로브인데요?”
환한 미소를 짓는 레이나를 보며 할린드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왜인지 피곤한 가정방문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첼시 르왈린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
“넵! 방학 중에 레오 오빠의 집에 놀러 왔습니다.”
첼시가 절도 있게 대답했다.
첼시는 반에서 할린드에게 그나마 덜 혼나는 학생 중 한 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할린드 교수를 무서워한다는 건 변함 없다.
사실 할린드 앞에서 태연한 1학년은 레오가 유일했다.
아니, 학년 전체를 통틀어도 레오뿐이었다.
그렇게 거실에서 가정방문이 시작되었다.
레오, 레이나, 데이드 앞에 앉은 할린드가 옆에 선 세나에게 말했다.
“서류.”
“여기 있습니다.”
할린드가 데이드와 레이나에게 레오에 관한 서류를 넘겨주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아드님의 자질은 매우 훌륭합니다.”
할린드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기사학, 마법학, 소환학. 세 개의 학과에서 모두 학년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도 원만합니다. 아니, 오히려 리더십이 몹시 뛰어납니다.”
“올.”
레이나가 감탄하며 슥슥-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서도 할린드가 준비해온 레오의 평가 자료를 유심히 읽었다.
“뚜렷한 단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교사로서 걱정되는 부분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오러, 마력, 영력의 보유량입니다. 분명 폭발적인 공격력을 낼 수 있고 학기 초와 비교한다면 성장했지만 역시 레오가 상대적으로 장기전이 약점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음.”
데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학과 문제입니다. 지금은 모든 방면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 될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모든 방면에서 계속해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주력으로 선택할 클래스를 정해 두는 것을 권유 드립니다.”
할린드가 힐끔 레이나를 보았다.
“그 부분은 어머니 되는 레이나가 잘 하겠죠.”
레이나가 빙긋 웃었다.
“세 번째. 이건 어디까지나 제 사견입니다만.”
할린드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레오는 위기에 맞서는데 너무 서슴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데이드의 물음에 할린드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 그대로입니다. 1학기 동안 레오 플로브가 보여준 활약은 모두 놀라운 수준입니다. 단순히 올 클래스이기 때문에 전대미문이라 불리는 게 아닙니다. 아마 루메른 역사를 통틀어도 1학년 때부터 레오와 같은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준 학생은 몇 없을 겁니다. 열다섯 살의 소년이 흡사 영웅들에 비견되는 위업을 계속해서 달성하고 있죠.”
“그건 좋은 거 아닙니까?”
데이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데이드에게 대답해 준 건 레이나였다.
“마냥 좋다고는 볼 수 없어, 데이드.”
레이나가 진지한 눈으로 레오를 보았다.
“위업을 이룬다. 그건 목숨을 건다는 의미야.”
츄바른 토벌.
스켈레톤 킹 토벌.
기간테스 토벌.
1학년이 해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놀라운 위업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그건 레오가 매 순간 목숨을 걸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몹시 걱정되는 건 사실이야.”
데이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레이나는 엄한 눈으로 레오를 보았다.
“루메른에서는 이런 말이 있어. 시련에 함부로 맞서지 마라.”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시련은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이다.
하지만 시련은 언제나 죽음을 동반한다.
영웅 사관 학교는 영웅을 키우기 위한 곳이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학생들을 시련 앞에 내던지지는 않는다.
루메른을 졸업한 레이나는 레오가 거쳐 온 길이 얼마나 위험한 길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레오. 왜 이렇게 무리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
“걱정을 끼쳐드린 건 죄송해요. 하지만 무리하려고 무리한 건 아니에요. 그저 피할 수 없었을 뿐이죠.”
레오가 덤덤히 말했다.
“시련에 함부로 맞서지 않아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영웅을 목표로 하는 이상 시련은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 말에 레이나가 깊은 한숨을 쉬고 얼굴을 짚었다.
그녀 역시 한때 영웅을 꿈꿨던 몸.
그렇기에 레오의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할린드 역시 레오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실제로 레오가 무모하게 행동한 적은 거의 없다.
수학여행 때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이 어쩔 수 없이 시련에 맞서야 했던 사건이다.
‘확실히 레오는 다른 학생들과 달라.’
루메른의 아이들은 모두 영웅을 선망한다.
그래서 영웅 사관 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할린드가 보기에 레오는 영웅을 선망하지 않았다.
‘그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을 뿐.’
학기 초에 레오의 말을 떠올렸다.
‘제 목표는 에레보스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그때는 그저 큰 포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로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할린드가 입을 열었다.
“루메른에서는 학생들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비록 걱정되는 부분도 있지만, 레오는 제가 가르쳐 본 학생 중 최고의 학생인 건 분명합니다. 그러니 2학기 때는 두 분이 좀 더 걱정을 덜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도하겠습니다.”
할린드가 진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세라 역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학생이 영웅을 꿈꾼다면 말릴 수 없다.
그건 영웅 사관 학교의 취지에 어긋나는 행동.
다만 학생이 죽지 않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할린드 교수님.”
데이드와 레이나 역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들이 루메른을 목표로 한순간 위험한 일을 할 것이라는 건 각오 했었다.
이제 와서 그걸 막을 수는 없었다.
가정방문이 끝나고 레이나가 말했다.
“그나저나 세라 부교수님. 할린드 교수님 밑에서 일 할만 해요?”
“네. 무섭지만 잘해주세요.”
“후후후. 제가 할린드 교수님 약점 하나 가르쳐 줄까요?”
“네?”
“그러니까 할린드 교수님이 제 첫 담임이 되었을 때 말이죠.”
“레이나 제르딩거. 복도에서 손들고 있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저 이제 학생 아니거든요? 그리고 내 나이가 몇 개인데 그런 처벌을 받아요!”
발끈하는 레이나를 보고 할린드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레이나를 보며 레오는 고개를 저었고 세나는 입을 떡 벌렸다.
할린드에게 저런 식으로 따지고 드는 사람은 처음 봤다.
거실 바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첼시가 감탄했다.
“대박. 이 이야기 애들한테 해주면 아무도 안 믿겠지?”
재미있는 구경을 했다며 좋아하는 첼시였다.
***
가정방문이 끝나고 방학은 흘러갔다.
레오는 북부 지방에서 온 편지를 뜯어보았다.
세이룬의 학생인 루니아와 에이란에게서 온 편지였다.
‘야 이 박정한 놈아! 넌 편지 한 통이 없어? 아무튼! 어떻게 지내? 공부 게을리하는 건 아니지?’
‘레오님, 잘 지내시나요? 저는 루메른에 교환학생으로 가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있나 보군.”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답장한 레오가 창밖을 보았다.
이제 방학도 일주일 남았다.
‘모레면 다시 루메리아 시티로 가는군.’
2학기를 기대하며 레오가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