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아, 아킨트 선생님! 그러니까! 이건 말이죠.”
루나가 레오를 보며 허둥지둥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굳어 있던 레오는 정신을 차렸다.
‘아킨트?’
레오가 눈을 살짝 굴리며 상황 파악을 위해 고민에 빠졌다.
“수업에 빠진 건 맞지만 그……! 마법 연구라고 해야 할까? 그걸 위해 빠진 거거든요!”
소녀 시절의 루나가 다급히 변명했다.
그런 루나의 말을 들으며 턱을 쓰다듬던 레오가 문득 복도 옆에 있는 넓은 창 유리를 보았다.
희미하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상황 파악을 끝냈다.
‘그렇군. 빙의형 인가.’
영웅의 세계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지금 레오가 들어온 영웅의 세계는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의 몸에 빙의하는 유형의 세계였다.
그러니까 레오의 영혼이 지금 아킨트라는 인물의 몸에 들어온 셈이었다.
그리고 아킨트는 다행히도 레오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킨트 루베샤. 루나의 마법 선생 중 한 사람이야.’
카일이던 시절에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카일이 루나와 만났을 때 아킨트는 이미 고인이 된 이후기 때문이다.
루나가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 종종 언급하던 인물이었다.
자신의 은인이자 아버지 같은 인물이라며 그리워하던 루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레오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루나가 떨어트린 책들을 쌓는 걸 도와주었다.
그런 레오를 보며 루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디로 가?”
“네?”
“어디로 가냐고.”
“안 혼내세요?”
“네가 수업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윽.”
레오의 말에 루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레오가 루나의 몸으로 들기 힘든 책 무더기를 거뜬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도와줄게.”
순순히 자신을 돕는 레오를 보며 루나는 당황했지만 이내 혼나지 않은 것에 즐거워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단순한 건 어릴 때나 커서나 똑같군.’
자신이 모르던 시절의 루나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은 자애로운 성운의 시조로 알려진 루나.
‘자애롭기는. 그냥 괴팍한 왈가닥이었는데.’
성격 역시 매우 단순했으며 엉뚱한 구석도 많았다.
‘지금의 엘프들이 루나의 실제 모습을 본다면 엄청 충격받겠지.’
동화책이나 문헌 속에 알려진 루나의 모습을 생각하며 레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꽂히면 망설임 없이 달려가는 추진력은 대단했다.
별의 마법 역시 대단한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서 태어난 산물이었다.
레오는 기분이 좋은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통 튀듯 걸어가는 루나의 뒷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깊은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다.
지금의 루나는 카일을 만나기 한참 전의 루나다.
레오는 루나를 알았지만, 그녀는 레오를 알지 못한다.
비록 영웅의 세계 안에서지만 기껏 이렇게 만났는데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에 레오는 씁쓸함을 느꼈다.
어느새 루나는 어느 방 앞에 도착했다.
방은 허름한 창고였다.
“여기예요. 아킨트 선생님. 마도서는 주세요. 여기서 공부할 테니까요.”
그 말에 레오는 들고 있는 마도서를 루나에게 올려주었다.
쌓인 마도서 높이가 루나의 시야를 가렸다.
레오는 창고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고마워요! 아킨트 선생님!”
씩- 웃은 루나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꺄악!”
그러다 다리가 걸려 엎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 레오가 방문을 닫았다.
좀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금은 영웅 던전에 대해 파악하는 게 우선이야. 그리고 같이 들어온 세 사람도 찾아야 해.’
뚜벅- 뚜벅-
레오가 복도를 걸었다.
‘분명 가드스론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를 통과했는데 바로 영웅 던전에 들어왔었지?’
영웅 던전에 들어오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루메른에서 영웅 던전과 관련되어 배웠던 것들을 떠올렸다.
‘영웅 던전은 히어로 레코드가 폭주하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했던가?’
영웅 던전은 처음에는 현실의 일정 부분을 침범하여 던전 ‘입구’만 만든다.
하지만 폭주가 계속되면 영웅 던전은 현실 자체를 일그러트린다.
빨리 공략이 된다면 괜찮지만 공략하지 않고 내버려 둔 영웅 던전은 재앙으로 변한다.
‘영웅 던전의 괴물들이 현실을 넘어온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지.’
그 외에도 주변 일대 자체를 잠식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지금 이 세계는 루나의 세계야.’
영웅 던전에 입장할 때 이름이 지워지긴 했지만 분명했다.
바르하르룬.
이곳은 재앙의 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엘프 도시의 이름이었다.
‘정확하게는 거대한 학원이지.’
오직 선택받은 엘프들만 입학할 수 있는 학원.
이 당시에는 바르하르룬을 졸업하면 하이 엘프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지금의 세이룬처럼 바르하르룬은 어떤 후보생을 키우기 위한 배움의 장소이기도 했다.
‘엘프왕.’
엘프들의 왕은 혈통에 의한 계승이 아닌 하이 엘프들 사이에서 우수한 엘프가 선출되는 형식이다.
재앙의 시대를 거치면서 엘프왕이라는 직책은 사라졌다.
그러면서 바르하르룬 역시 역사 저편으로 잊혀졌다.
‘이 무렵이 루나가 열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라고 했던가?’
루나가 바르하르룬에 있었던 시기는 재앙의 시대 이전이다.
‘이때 루나가 이룬 위업이 대체 뭐지?’
레오로서도 이 시기에 루나가 이룬 위업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마법의 천재인 루나는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위업인 엘프였다.
‘자기가 학교 다닐 때 엄청 대단했었다고 떠들어댔으니까.’
레오는 루나가 자랑스럽게 떠들던 학창 시절 위업들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하나 같이 대단한 것들이라 더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레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단 루니아, 엘레나, 하딘과 합류해야 해.’
레오가 아킨트의 몸에 빙의를 했듯 세 사람 역시 다른 이의 몸에 빙의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겉모습이 달라서 찾기가 힘들 텐데.’
“아킨트 선생님!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응?”
누군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소리에 레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20대 초반의 남자 엘프를 보며 말했다.
“누구?”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수업 시간에 늦었습니다! 학생 전원이 항의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 말에 레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난 선생이었지.’
영웅 던전에 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기에 잊고 있었다.
‘일단 영웅의 세계를 제대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맡은 인물의 본분도 충실해야 하지.’
빙의 유형의 영웅의 세계는 빙의한 인물이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 만큼 바르하르룬의 선생으로서 조금의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영웅의 세계 공략 자체가 물건너 가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경험한 다른 세계와 다르게 여러모로 복잡하군.’
한숨을 쉬며 레오는 자신을 데리러 온 엘프 남자의 뒤를 따라 수업 장소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거대한 연무장이었다.
그 연무장에서 엘프들이 도열해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군.”
레오의 말에 대표로 보이는 엘프가 불만을 드러냈다.
“늦었다고 설명될 일이 아닙니다! 아킨트 선생님!”
그 외침에 다른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모두 엘프왕 후보! 가문과 종족의 긍지를 가지고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가르쳐줄 선생님께서 이리도 태업하시니! 우리가 어떻게 선생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 강경한 외침에 레오가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선생님의 교체를 원합니다!”
“원합니다!”
그가 대표로 외치자 다른 학생들이 따라 소리쳤다.
그 반응에 레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업 좀 늦었다고 선생을 교체해달라고? 이것들 제정신인가?’
게다가 루나의 말에 따르면 아킨트는 매우 우수했던 선생이었다.
“너, 이름이 뭐지?”
“……? 이상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히르키안 베스론입니다.”
‘히르키안이라고? 이 자식이?’
레오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카일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재앙의 시대, 악명으로 이름 높았던 엘프다.
‘동족학살자 히르키안 베스론.’
베스론은 재앙의 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엘프의 명가였다.
대대로 많은 엘프왕을 배출한 가문으로 재앙의 시대 이전 엘프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문이었다.
‘베스론 가문은 엘프들의 재앙이 되었지.’
바르하르룬이 엘프의 역사에서 사라진 건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살아남은 엘프들이 바르하르룬을 증오했기 때문이다.
‘타르타로스의 첫 침공 당시 강대하던 엘프 세력을 허무하게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후에는 바르하르룬 자체가 타르타로스에 항복을 했지.’
스스로 긍지를 높다고 부르짖던 하이 엘프들은 가장 먼저 종족과 지상을 배신하고 칼끝을 동족들에게 겨누었다.
‘모든 하이 엘프들이 배신을 한 건 아니지만.’
끝까지 종족을 수호했던 페어리 나이트를 필두로 한 자긍심이 강했던 하이 엘프들도 있었다.
하지만 종족의 자긍심이라 할 수 있던 하이 엘프가 종족을 저버렸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하이 엘프라는 이름은 재앙의 시대 당시 엘프들 사이에서 멸칭이 되었다.
엘프왕이라는 직책 역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그 여파로 바르하르룬과 엘프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배신의 최선봉에 섰던 자가 눈앞에 있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는 가문의 배경을 믿고 바르하르룬의 선생마저 좌지우지하려 하고 있었다.
“수업에 조금 늦은 걸 가지고 선생을 교체하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데.”
레오가 차갑게 말했다.
“진짜 이유가 뭐지?”
싸늘한 레오의 목소리에 히르키안이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질 수 없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히르키안 선생님께서는 자랑스러운 바르하르룬의 선생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종족의 수치라고 할 수 있는 ‘루나 루비넌스’를 편애하고 있지 않습니까.”
레오의 눈에 살기가 일렁였다.
세상을 구한 레오의 입장에서는 루나가 종족의 수치라는 말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하물며 그 발언을 한 게 히르키안이라면 더욱 용납할 수 없다.
‘영웅 던전이고 나발이고 개작살을…….’
레오가 이를 뿌득 갈 때였다.
“감히 누굴 보고 종족의 수치라고 지껄이는 거냐.”
살기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한 남학생에게 향했다.
작은 체구에 연약한 이상의 남학생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기세를 흩뿌리고 있었다.
“어떻게 엘프가 그딴 망발을 할 수 있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본능적으로 격한 분노를 터트리는 남학생을 본 레오는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시대는 루나가 엘프의 위인이 되기 한참 전의 시기다.
그런데도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루니아…… 아니. 그 하딘이라는 세이룬 3학년인가.’
***
바르하르룬의 외각에 위치한 탑.
신의 탑이라 불리는 높은 곳에 한 남자가 무료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기하군.”
무료함이 흐르던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신의 가호를 받는 영혼들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