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신의 탑을 나선 레오는 바르하르룬을 걸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히어로 레코드가 나뉘게 된 건 단순히 영웅 사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군.’
3000년 전.
에레보스의 한 조각이 부활했을 때 영웅의 세계의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에레보스의 조각을 토벌한 후 히어로 레코드는 다섯 개로 나뉘었다.
그 히어로 레코드의 힘으로 종족별로 영웅을 육성하기 위한 영웅 사관 학교가 설립되었다.
레오는 그것이 의문이었다.
‘굳이 히어로 레코드를 다섯 개로 나눌 필요가 있었을까?’
게다가 히어로 레코드를 나누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페이지가 소실 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영웅들의 힘을 계승할 페이지가 상당수 소실 되었으며 심지어 그 과정에서 카일은 잊혀진 영웅이 되었다.
게다가 레오가 발견한 자신의 페이지는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말 그대로 치명적인 손실.
그걸 본 레오는 단순히 영웅 사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히어로 레코드를 나눈 것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영웅 사관 학교의 설립자들이 히어로 레코드가 망가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어.’
몰랐다 해도 온전한 히어로 레코드를 나눌 때 생기는 부작용은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히어로 레코드를 나누었다.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대서고에서 과거의 숨겨진 역사를 알아보려 했던 것이다.
‘신이 만든 물건이 단순히 찢긴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겠지. 잃어버린 페이지를 찾아 파괴하는 무리가 분명 있어. 뻔하지. 타르타로스야.’
자신의 페이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건 타르타로스에서 카일의 페이지만을 노렸기 때문일 것이다.
에레보스는 그들에게 있어 신과 같았고 레오는 그 신을 토벌한…… 타르타로스의 입장에서는 증오의 대상임과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가드스론만 봐도 알 수 있어. 마족들이 재앙의 시대 당시에 자신들과 맞서 싸웠던 흔적을 지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지상의 종족들은 이제 그 시절에 대한 것을 문헌으로밖에 알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타르타로스에는 그때부터 살아온 군단장들이 있으니까. 어디에 어떤 게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지.’
레오는 타르타로스의 군단장들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의문인 점은…… 타르타로스가 어떻게 히어로 레코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냐는 건데.’
히어로 레코드는 신이 만든 물건이다.
아무리 타르타로스의 군단장들이 강하다고 해도 그들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물건이다.
레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일단 의문은 묻어두도록 하자.’
지금 중요한 것은 루나의 세계를 공략하는 것이다.
레오는 손에 쥐어진 폴리움을 바라보았다.
과거 친우였던 루나가 사용했던 마도 지팡이.
신의 지식으로 만들어진 최강의 지팡이는 그 자체만으로 사용하기 몹시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강력한 위력 증폭 효과가 있는 건 물론이고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는 지팡이였다.
대마법사들도 제대로 다루기 힘든 물건.
‘루나는 아무렇지 않게 다루었지만.’
루나가 폴리움을 다루는 걸 떠올리며 레오가 지팡이에 마법을 사용했다.
이곳은 하이 엘프의 도시.
그리고 폴리움은 이 도시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위대한 엘프왕의 상징이다.
비록 폴리움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이 지팡이가 엘프왕의 물건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런 폴리움을 레오가 들고 다니면 큰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루나 녀석은 가지고 다니기 무겁다고 팔찌 형태로 바꾸었는데.’
레오가 폴리움에 변형 마법을 걸었다.
키이이잉-
폴리움은 레오의 마력에 반응해 팔찌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걸 팔목에 찼다.
‘설마하니 폴리움을 직접 쓰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헛웃음을 터트리며 아킨트의 연구실로 향했다.
‘일단 하딘을 지하감옥에서 꺼내야 하고 루니아와 엘레나도 찾아야 해.’
루나의 세계 공략에 대해 레오는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레오가 아는 한 별의 마법이 완성된 건 다름 아닌 바르하르룬에서였다.
재앙의 시대 이전의 엘프들은 지금처럼 마법의 종족이라 불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마나와 친숙한 종족의 특성 덕분에 엘프는 신의 시대 당시부터 강력한 마법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바르하르룬은 그런 엘프의 마법 역사가 한데 모인 곳이기도 했다.
비록 많은 하이 엘프가 타락의 길을 걸을 만큼 썩었다고 해도 정말로 고결했던 그들의 선대들이 남긴 유산마저 더럽혀진 건 아니었다.
레오는 바르하르룬의 중앙에 높이 뻗은 나무를 바라보았다.
지금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나무.
엘프들이 사랑하고 가꾸었던 세계수 였다.
과거의 수많은 엘프들이 남긴 유산을 이어받은 루나는 결국 ‘별의 마법’을 완성했다.
‘결국 머나먼 과거부터 이어져 있다는 거지.’
고대 엘프들의 위대한 유산은 루나에게로.
그 유산을 발전시킨 ‘별의 마법’은 지금의 엘프들에게로.
세대와 세대가 이어 온 의지는 계승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만약 이 세계의 목표가 루나가 별의 마법을 완성시키는 거라면 공략자들은 옆에서 돕기만 하면 돼.’
꽤 간단한 공략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어느 영웅의 세계든 ‘서장’ 의 경우 공략조건이 단순한 경우가 많았다.
아킨트의 연구실 앞에 도착한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연구실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나.”
“아……!”
루나가 놀란 눈으로 레오를 돌아보았다.
“아킨트 선생님.”
“무슨 일이지?”
“오늘은 에르겐 전하의 생신이잖아요.”
그 말에 레오가 멈칫했다.
엘프왕 에르겐의 생일.
이 기간은 모든 엘프족의 축제와도 같은 날이다.
“세계수의 광장에서 파티가 열리는데…… 그…… 저는 초대장을 받지 못해서요.”
루나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루나의 얼굴을 어두웠다.
“혹시 저와 같이 가 주실 수 있을까요? 꼭 전하를 뵙고 싶어서요.”
그 말에 레오는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바르하르룬에서 루나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가문이 아닌 오로지 압도적인 실력과 재능으로 바르하르룬에 발을 들인 천재 소녀.
그런 만큼 바르하르룬 내에서 적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루나라는 인물에게 호감과 경의를 느끼고 그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지금 레오가 빙의해 있는 아킨트였다.
‘바르하르룬에 입학하자마자 엘프왕의 후원을 받았다고 자랑했었지.’
비록 신분은 학생일지라도 루나는 선생들과 동급의 대우를 받았다.
수업을 받지 않고 마법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덕에 루나는 별의 마법의 초석을 이곳에서 완성했다.
그런 루나가 엘프왕의 생일날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뭐지? 루나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나?’
아니, 그럴 리 없다.
루나에 대해서는 레오가 잘 알고 있다.
자존심을 세운다고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뭘까?
아직 엘프왕의 후원을 받기 전이란 말인가?
‘아니, 루나가 바르하르룬에 입학한 건 열세 살이야.’
지금 루나는 누가 봐도 십 대 중반이다.
‘그럼 대체 뭐야?’
레오는 위화감을 느꼈다.
“루나.”
“네?”
“에르겐 전하의 후원을 받는 네가 왜 초대장을 받지 못한 거지?”
“제게 에르겐 전하의 후원이 끊긴 건 벌써 한 달 전의 이야기잖아요.”
루나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이는 루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을 본 레오가 얼굴을 굳혔다.
‘역사가 바뀌었어.’
영웅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역사를 바꿀 수 있다.
공략자가 긍정적으로 바꾸어 실제 역사보다 더 대단한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면 초과 달성을 이룰 수 있다.
반대로 공략자가 잘못된 쪽으로 역사를 바꿔 악영향을 끼친다면 공략은 실패한다.
그러니 영웅의 세계에서 역사가 바뀐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우리는 루나의 세계에 들어온 건 고작 몇 시간 전이야.’
그 시간 동안 역사에 영향을 끼칠만한 일이라면 제라의 몸에 들어간 하딘이 히르키안을 묵사발로 만든 것뿐이다.
하지만 그 행동이 한 달 전의 역사를 뒤트는 건 말이 안 된다.
‘영웅의 세계가 폭주해서 영웅 던전이 되면 역사 자체가 뒤틀리는 일이 있나? 아니, 그런 사례는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러면 대체 뭐지?’
고민하던 레오의 머리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레오여. 이 세계, 아니. 히어로 레코드에 어둠이 드리웠을지 모르네.’
조금 전 만났던 신의 계시.
비록 가짜라 해도 그 능력만큼은 진짜다.
‘어둠…… 설마?’
무언가를 떠올린 순간 등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영웅 던전에 타르타로스가 들어 올 수 있는 건가?’
***
지하감옥에 투옥된 하딘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어리석었어.’
엘프의 역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위대한 루나를 모욕하는 걸 보고 너무 감정이 앞섰다.
영웅 던전에서는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감정이 앞섰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후우. 창피하군. 다른 학교라고는 하나 1학년에게 추태를 보이다니.’
하딘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라도 너무 지저분하군.’
아무리 그래도 동족을 가두는 감옥이다.
그런데 이런 환경이라니.
‘확실히 머나먼 고대는 지금과 다른 건가?’
하딘은 문화 충격을 느꼈다.
‘세이룬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보고 할 게 많겠군.’
던전 공략 이후의 상황에 대해 떠올릴 때였다.
끼익-! 쿵-!
지하 감옥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터벅- 터벅-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는 걸음걸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두 소녀를 보며 하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소녀는 척 보기에도 하프 엘프였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너저분했다.
“그대는…… 무언가?”
“무, 무슨 질문이신지…… 저는 노예이옵니다만?”
“노예? 어째서?”
하딘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이상한 걸 물으시는군요. 모든 혼혈 엘프는 노예가 아닙니까?”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덤덤히 대답하는 하프 엘프 소녀를 보며 하딘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노예? 그런 저급한 것이 있었단 말인가?’
지금 시대에도 혼혈에 대한 멸시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은 동족의 피가 흐르는 혼혈을 노예 취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시대에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인 엘프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의 벽에 하딘의 몸이 떨렸다.
‘이런 역사가…… 사실이란 말인가? 우리 엘프가 노예를 부렸단 말인가?’
지독한 혐오감에 몸을 떠는 하딘을 보며 다른 엘프 노예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또다시 지하감옥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터벅- 터벅-
발자국의 주인공은 하딘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다다가오고 있었다.
하딘에게 식사를 챙겨주던 노예 소녀가 다급히 옆으로 비켰다.
하지만 다른 소녀는 반응이 늦어 길을 비키지 못했다.
터벅-!
남자의 걸음이 멈추었다.
아름다운 백발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고귀한 인상의 하이 엘프는 힐끗-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노예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는…….
퍼억-!
“컥?”
소녀를 망설임 없이 걷어찼다.
소녀가 철장에 부딪히며 격한 숨을 내뱉었다.
그에 다른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에, 엔!”
소녀는 오늘 하루 조금 이상하게 반응하던 자신의 절친에게 허겁지겁 다가갔다.
“노예들 교육이 잘못되었군.”
퍼억-!
“컥!”
백발의 엘프는 무료하게 숨을 내뱉으며 또 다시 발길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하딘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하딘의 외침에 백발의 엘프, 사르만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작 노예가 아닌가?”
텁-!
“끄응…….”
자신이 걷어찬 노예의 머리를 밟으며 사르만이 비웃음을 날렸다.
“아니면 과거 자신의 선조들이 이런 추악한 짓거리를 했다는 걸 납득 하지 못하는 건가?”
“뭐라고?”
사르만의 말에 하딘의 얼굴이 굳었다.
“어떻게 들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이룬의 개여.”
고오오오오오-!
사르만의 손에서 흑마력이 일렁였다.
콰드득-!
들어 올린 팔은 흉축한 괴물의 팔이 되었다.
“네놈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타르타로스?”
하딘이 경악하며 오러를 일으켰다.
하지만 하딘의 팔에 묶여있는 구속구가 오러의 발현을 방해했다.
물론 이걸 파괴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위험해 질 수 있었다.
‘어떻게든 방어해서 일단 도주를…….’
콰득-
“컥?”
피가 튀며 고통에 찬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역시 하딘. 당신이었군요.”
사르만에게 걷어차였던 노예 소녀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빙긋 웃으며 분홍빛 마력을 일으키는 소녀를 보며 하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레나?”
“그 한심한 꼴은 대체 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