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쿠구구구궁-!
바르하르룬 성이 무너졌다.
엘프의 성역이라 불리는 도시가 불타고 있다.
대재앙의 조각이 만들어낸 참상은 말 그대로 공포와 전율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대재앙은 바르하르룬을 넘어 영웅의 세계조차 파괴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세계에 불이 붙었다.
터벅- 터벅-
바르하르룬의 외곽.
“끙차.”
신의 탑의 꼭대기 지붕에 올라온 피브아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인 그의 눈에는 세계가 불타는 게 느껴졌다.
“세계가 붕괴하고 있군.”
피브아는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쥐어진 술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고 있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어차피 이 몸은 가짜니까.’
미래의 자신이 천계로 돌아갔든 소멸을 했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신이라는 존재는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게 현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피브아의 눈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카일이여. 그대가 왜 대영웅인지…… 내게 보여다오.’
진한 미소를 지으며 피브아가 와인을 입에 털어 넣었다.
***
화르륵-
루니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세계가 붕괴하고 있어.’
아직 많은 경험을 한 건 아니지만 루나의 세계가 망가지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영웅의 세계가 공략되지 않고 망가지면 어떻게 되죠?”
“그건 나도 모르지. 문헌에도 그런 사례는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엘레나가 힐끗-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공략자들이 무사하지 못할 건 분명한 것 같네.”
‘그게 가능할까요…… 같은 건 바보 같은 질문이겠지.’
선택지는 없다.
지금은 전설속 대재앙을 쓰러트려야 할 때였다.
심호흡한 루니아가 자신의 양 뺨을 세게 때렸다.
찰싹-! 하는 소리에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니아를 보았다.
어느새 엘프 소녀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레오 녀석은 안 쫄았잖아! 더 이상 쫄아 있을 순 없어!”
‘당당하게 라이벌이라고 선언해놓고 나만 잔뜩 쫄아 있으면 쪽팔리잖아!’
따라잡겠다고 목표로 한 상대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 있다.
이대로 주저앉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는 루니아를 보며 엘레나가 물었다.
“뺨 안 아파?”
“안 아파요.”
“정말?”
쿡-!
“……!”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쿡-! 쿡-! 찔러대는 엘레나를 보며 루니아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을 놀리는 태도에 오기가 발동했다.
“안 아프다고요.”
“와. 터프한 아가씨네.”
콱-!
“이건 멀쩡한 상태에서도 아프잖앗!”
눈을 부릅뜬 루니아가 고함을 지르자 엘레나가 쿡쿡 웃었다.
“너도 꽤 특이한 엘프구나? 우등생다운 면은 모두 연기?”
눈에 눈물이 살짝 맺힌 루니아가 뺨을 감싸고 엘레나를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저 괴물은 대체 뭐지?”
“왔나요? 하딘.”
엘레나가 반갑게 하딘을 맞이했다.
“에레보스에요.”
“에레보스?!”
“정확하게는 에레보스의 조각 같지만요.”
빙긋 웃은 엘레나가 살기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지금 쓰러트릴 거예요.”
그 말에 하딘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상황이 여의찮아 보였다.
“레오 플로브는?”
“레오 군이라면 저기 있어요.”
엘레나가 앞을 가리켰다.
하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조님?”
아름다운 엘프 소녀가 하딘의 눈을 사로잡았다.
만약 지금 같은 상황만 아니었다면 엘프의 예를 다한 인사를 올리고 그녀의 존재에 감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하딘이 검을 다잡았다.
그런 가운데 레오가 루나와 함께 다가왔다.
“응? 한 사람이 늘었네. 당신도 동료?”
“그렇습니다. 루나님, 하딘이라 합니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한 줄기 별빛과 같은…….”
“네. 네. 잡담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요.”
미사여구를 붙여 루나를 찬양하려는 하딘의 말을 끊은 엘레나가 말했다.
“그래서 레오군. 저걸 쓰러트리자고 했는데 작전은 있나요?”
“네.”
“뭔가요?”
“나와 루나가 전방을 맡을게요. 루니아랑 엘레나 선배는 후방에서 마법 지원을 부탁해요. 하딘씨는 중간에서 저놈의 공격이 두 사람에게 향하는 걸 막아주고요.”
“마법사인 루나님을 후방에 배치하고 너와 내가 전방을 맡는 게 옳은 진형 아닌가?”
하딘이 의문을 표하자 루나가 히죽 웃었다.
“마법사라고 후방에 짱박히는 건 딱 질색이야. 그리고 저 괴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이 애랑 나 정도뿐일걸?”
“루나님이 그렇게 말한다면 따라야죠.”
엘레나가 빙긋 웃었다.
실제로 조금 전 에레보스가 주변 일대를 쓸어 버릴 때 루니아와 엘레나는 검은 화염을 보호할 수단이 없어 루나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레오군은 혼자서 불꽃을 막아냈어.’
이상한 일이다.
‘마력의 양으로는 나나 루니아가 레오군을 훨씬 앞서. 그건 레오군이 검은 불꽃에 대응할 만한 수단이 있다는 소리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전방을 레오와 루나에게 맡기는 게 최선이었다.
하딘 역시 루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루나가 폴리움을 다잡았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에레보스를 노려보았다.
“저 망할 시껌댕이를 박살 내버리자.”
“그 전에 하나만 명심해. 절대 저놈의 화염에 닿으면 안 돼.”
레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가 에레보스를 노려보았다.
“그럼 시작하죠.”
그 말과 동시에 레오와 루나가 에레보스에게 돌격했다.
엘레나와 루니아는 마력을 전개했고 하딘은 그런 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오러와 마력을 일으켰다.
루나는 자신의 앞에서 달려 나가는 레오의 뒷모습을 보며 망설이더니 물었다.
“있잖아.”
“왜.”
“이 일이 끝나면 널 따라가도 돼?”
그 말에 레오가 멈칫했다.
그리고 루나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해야 하는 게 있지 않아? 난 정체도 모를 수상쩍은 이방인이라고.”
그 물음에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 하고 싶은 게 있지. 하지만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널 따라가면 훨씬 값진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루나가 레오의 붉은 눈을 직시했다.
“분명 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을 보여 줄 것만 같아.”
“뭐야? 나한테 반한 거야?”
레오가 야유를 날리자 루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럴지도.”
“…….”
어딘지 모르게 수줍음이 느껴지는 그 환한 미소에 레오는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고 말했다.
“그 이야기는 우선 저 녀석을 쓰러트린 다음에 하자.”
“좋았어!”
루나가 의욕적으로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와 함께 루나의 마력이 전개되었다.
화르륵-
“헬 파이어.”
폴리움의 끝에서 시뻘건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화염계 마법 중 최강급의 위력을 자랑하는 지옥의 업화가 생성되었다.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드는 이 마법은 지금의 엘프들은 물론이고 과거의 엘프들도 배우기를 꺼리는 마법이었다.
엘프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 너무도 파괴적인 마법으로 취급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나는 그런 걸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화르르르륵-!
그런 루나의 마력에 반응하여 에레보스가 검은 불꽃을 내뿜었다.
“가라!”
콰가가강-!
루나의 마법이 에레보스를 향해 날아갔다.
에레보스가 팔을 휘둘렀다.
콰학-!
에레보스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검은 불꽃의 덩어리가 루나의 마법과 부딪혔다.
콰가가강! 화르르륵-!
검은 불꽃이 지옥의 업화를 집어삼켰다.
퍼엉-
하지만 지옥의 업화가 폭발을 일으키자 검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레오는 그걸 보고 검을 늘어트렸다.
고오오오오-
레오의 검에서 회색의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오러는 이내 유리 벽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검은 불꽃을 감싸 버렸다.
화화확-!
검은 불꽃이 레오의 오러에 튕겨 나갔다.
‘에레보스의 불꽃은 절대 꺼지지 않는 불멸의 불꽃.’
끝없이 타오르는 업화는 기본적으로 마나로 이루어진 모든 걸 불태운다.
세상을 멸망시킬 존재가 가진 힘의 근원이 불멸이라는 것은 지상의 종족에게 절망과도 같은 일이었다.
지금의 레오는 과거 카일처럼 강대한 힘이 없다.
그렇다고 루나처럼 뛰어난 재능과 마법 센스, 그리고 압도적인 마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언뜻 보기에는 전방을 맡는 건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레오는 에레보스의 파편을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그건 레오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별해. 하지만 카일. 우리 중에서 아마 네가 가장 특별할 거야. 네 마나 특성은 말 그대로 에레보스에게 있어 천적과도 같으니까.’
‘천적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가진 회색의 마나는 언뜻 보기에는 무속성이지.’
‘언뜻이 아니라 그냥 무속성이야. 아무런 특색도 없다고. 올 클래스인 걸 제외하고 내가 너희랑 비교가 돼?’
오러가 됐든 마법이 됐든, 소환술이 되었든.
동료들과 달리 카일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떤 능력이든 궁극에 이를 재능이 없었다.
‘너의 무속성은 다른 무속성과는 달라.’
하지만 리시나스는 카일의 탁한 회색빛 힘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무속성이지만…… 네 마나는 그 누구보다 순수해. 네 특성을 정의하자면 순수라고 할 수 있지.’
지혜의 왕이 붙여준 카일의 특성.
그녀가 붙여준 특성에 당시의 카일은 살짝 기분이 좋아졌었다.
물론 친구가 좋아하는 꼴을 보기 싫어 귀신같이 분위기 산통 내는 것들이 있었다.
‘순수래! 순수! 카일이랑은 진짜 더럽게 안 어울려!’
‘리시나스여. 순수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네. 그대의 말은 순수라는 이름에 대한 모독일세!’
‘……그래. 난 순수랑 거리가 멀다. 이 괴팍한 엘프랑 변태 드워프야.’
레오가 둘에게 동시에 해드락을 걸며 고함을 질렀다.
루나가 표독스럽게 카일의 팔을 마구 꼬집었고 드웨노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팔을 퍽퍽 쳤다.
그 모습을 보며 리시나스가 말했다.
‘아르온 네가 보기에 레오는 어때?’
‘역시 순수한 거랑은 거리가 멀지 않을까?’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이던 아르온의 모습.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리시나스 녀석이 말했지. 순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그래서 내가 올 클래스인 거라고.’
고오오오오-!
레오의 손에 마법 술식이 생성되었다.
그걸 본 루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건 뭐지?’
어딘지 낯이 익다.
루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내가 개발하던 마법 술식?’
당황하던 루나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만든 것과는 달라.’
지금 레오가 사용하는 마법은 루나가 만든 별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 마법은 특별했다.
무려 루나가 만들었으면서 루나가 사용할 수 없었던 유일한 마법이기 때문이다.
루나가 단 한 사람. 카일만 위해 만든 마법.
카일의 고유 마법.
다른 이의 고유 마법을 만든 시점에서 루나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이 마법은 특별한 효과나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단순히 레오의 마력 특성을 극대화 시킨 마력 덩어리의 탄환이다.
하지만.
‘순수한 네 마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카일. 하지만 그건 바꿔 말하면.’
대재앙을 토벌하겠다고 대영웅들을 규합했던 리시나스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걸 의미해. 즉, 에레보스가 가진 불멸의 힘에 대응할 수 있다는 소리야. 그게 네가 그 증오스러운 대재앙의 천적인 이유야.’
그리고 그 말 대로였다.
고오오오- 번쩍-!
레오의 회색 마력이 순백으로 변했다.
최후의 전투에서 몇 번이고 레오의 목숨을 살린 마법.
몇 번이고 불멸의 존재에게 치명상을 먹인…….
성운의 시조 루나가 만든 별의 마법이지만 오직 카일만을 위해 완성된 고유 마법.
“이노센트.”
화악-!
순백의 구체가 레오의 머리 위에 생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