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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을 따라 도착한 곳은 루메리아 시티의 중앙에 있는 시계탑 꼭대기였다.
‘시계탑 내부에 이런 게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일종의 감시탑인 셈인가?’
시계탑을 뒤덮고 있는 수많은 마법이 레오의 눈을 어지럽혔다.
‘전부 용언마법으로 이루어져있군. 마법사들이 보면 눈이 뒤집히겠는데?’
레오는 흥미롭다는 듯 시계탑을 구성하는 마법 술식을 살폈다.
지금 시대의 여러 마법 술식을 접하고 익숙해진 레오였지만 아직 접하지 못한 마법 체계가 있었다.
그건 바로 용언 마법이었다.
용언 마법은 드래곤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다른 종족이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별의 마법과 비슷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별의 마법은 엘프에게 최적화된 마법 체계다.
앨프들에게 맞추어진 술식을 인간의 형식으로 바꿀 수 있는 마법 센스만 갖추면 종족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용언 마법은 아니었다.
‘용언으로 이루어진 술식은 제대로 해석하기도 힘들고. 해석한다고 해도 가장 큰 문제가 있지.’
그것은 바로 마력.
용언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드래곤 하트가 발하는 마력이 필요했다.
드래곤만이 가진 특유의 마력 특성이 있어야 용언으로 이루어진 술식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용언 마법은 드래곤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접할 일도 없는 만큼 마법사라면 누구나 용언 마법을 연구하기를 열망한다.
뚜벅- 뚜벅-
앞서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던 리벤이 걸음을 멈추었다.
앞에는 작은 문이 있었다.
끼익-
리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 와라.”
리벤의 말에 레오가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 내부에는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공간 이동 마법인가.’
레오는 방 내부를 살폈다.
눈 앞에 펼쳐진 건 삭막한 풍경 방이었다.
티끌 하나 없는 크리스탈 바닥과 벽이 눈에 뜨였다.
그 외의 가구나 장식 등 으레 방에는 있을법한 요소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천장을 올려다본 레오의 눈이 커졌다.
천장 가득 한 드래곤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리시나스.”
“지혜의 왕의 본 모습은 다른 종족들 사이에서는 유명하지 않을 텐데. 바로 알아보는군요?”
레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건 옥좌였다.
드넓은 공간에 단 하나뿐인 거대한 옥좌.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건 열 살 남짓한 소녀였다.
소녀의 모습은 기이했다.
바닥까지 늘어진 기다란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는데, 은색 머릿결 사이로 뜨문뜨문 섞인 흑발이 눈에 띄었다.
고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감긴 왼쪽 눈과 그 주변에 불거진 힘줄 덕에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레오는 눈앞의 소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냥 드래곤도 아니야. 굉장한 고위급의 드래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을 느끼며 레오가 놀라고 있을 때였다.
소녀에게 예의를 표한 리벤이 레오에게 말했다.
“로드시네.”
그 말에 레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벤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자신을 드래곤 로드에게 안내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레오는 드래곤 로드를 향해 오른쪽 가슴을 세 번 두드린 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드래곤의 인사 예법이었다.
레오가 드래곤의 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가르쳐 준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왜 오른쪽 가슴을 세 번 치는 거야?’
‘드래곤 하트는 오른쪽 가슴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드래곤 하트의 고동 소리를 들려준다는 의미야.’
‘아, 그래? 그런데 내가 왜 드래곤의 예법 같은 걸 배워야 하는데?’
‘에레보스를 토벌하고 쓸 일이 많아질 테니까.’
‘전혀 없을 것 같은데? 그리고 있다 해도 내가 왜 드래곤 예법을 따라야 하는데? 그리고 그럴 거면 저기서 퍼질러 자고 있는 것들도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한밤중에 잠도 못 자고 팔자에도 없는 드래곤의 예법을 배우던 카일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레오의 반응에 리시나스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넌 토벌대에서 나 다음가는 위치잖아? 당연히 예법을 더 중시해야 하는 자리 아니야? 나중에 나랑 드래곤들 볼 일이 많을 거 아니야!’
‘왜 짜증인데?’
‘시끄러. 잔말 말고 똑바로 배우기나 해! 무릎 더 굽히고! 각도가 이상하잖아?’
‘제발! 잠 좀 자자! 잠 좀!’
싫다는 자신을 억지로 붙잡아 놓고 예법을 가르쳐주겠답시고 괴롭히던 리시나스가 떠올랐다.
물론 평생 동안 쓸 일은 없었다.
‘그걸 다음 생에 쓰게 되네.’
리시나스가 들들 볶은 만큼 레오의 자세는 완벽했다.
그리고 그걸 본 로드와 리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반응에 레오가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5000년 동안 예법이 바뀌기라도 했나?’
그렇다면 잠도 못 자고 밤마다 리시나스에게 시달렸던 나날은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푸훕!”
그때 로드가 양손으로 입을 막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흐! 푸흡! 킥킥-!”
“레오 플로브. 그대는 그 인사법을 어디서 배운 거지?”
“책에서 배웠는데 잘못된 건가요?”
“그건 아니야. 오히려 완벽해. 그런데…….”
“푸흐흐! 옛날 노친네들 같아! 아하하하하하하!”
결국 참지 못한 로드가 배를 부여잡고 자지러지듯 웃었다.
“오래된 고대 예법이네. 이미 돌아가신 선대 분들이 자주 쓰던 인사법이지. 요즘은 거의 안 쓰는 인사인데 자네가 쓰니 신기하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 리벤을 보며 레오가 자세를 풀었다.
‘결국 내 노력은 뭐였던 걸까?’
한숨을 푹 쉰 레오를 보며 로드가 ‘어흠!’ 헛기침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레오 플로브. 멜리나라고 합니다.”
“드래곤 로드께서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당신을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비록 겉모습은 작은 소녀였지만 눈앞에 있는 자는 드래곤의 정점, 로드였다.
멜리나는 레오를 바라보았다.
“과연…… 리벤 경의 말대로군요.”
고개를 끄덕인 멜리나가 리벤을 힐끗 보았다.
“당신은 다른 영웅들과는 다르군요.”
그렇게 말한 멜리나가 리벤을 향해 눈짓했다.
그에 리벤이 자리를 비웠다.
끼익-! 쿵-!
방 안에는 레오와 멜리나만이 남게 되었다.
“레오 플로브.”
“네.”
“당신은 누구인가요?”
“루메른의 영웅 후보생 레오 플로브입니다.”
“후훗- 내가 질문을 잘못했네요.”
멜리나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답니다.”
“올 클래스라서요?”
“예. 전대미문. 오직 전설 속으로만 존재하는 시작의 영웅 카일님과 같은 능력이었으니까요.”
멜리나가 빤히 레오를 바라보았다.
“시작의 영웅에 대해 관심이 많군요.”
“그럴 수밖에요.”
지금까지 카일은 가상 속 인물로 취급되었다.
그런 만큼 다른 대영웅들은 몰라도 카일에게 존칭을 붙이는 자는 보기 드물었다.
멜리나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타박- 타박-
맨발로 레오 앞까지 걸어온 멜리나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드래곤 로드. 위대한 지혜의 왕 리시나스의 유지를 잇는 자. 그렇기에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갈구하는 존재죠.”
일찍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탐구했던 리시나스.
레오는 왜 리시나스가 그토록 지식과 지혜를 탐구했는지 알고 있다.
‘발버둥이었지.’
어떻게든 에레보스를 토벌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대의 지식.
신의 지식.
모든 걸 가리지 않고 탐구했다.
하지만 얻어낸 해답은 절망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낸 게 바로 너희였어.’
리시나스를 떠올리는 레오에게 멜리나가 말했다.
“지식과 지혜를 갈구한 결과, 나는 시작의 영웅이 실존했다는 걸 확신했답니다. 하지만 도저히 물적증거를 찾을 수 없었죠. 이야기는 남았지만 카일님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답니다.”
천장을 바라보던 멜리나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구었다.
레오의 붉은 눈과 마주친 지혜로운 은색의 눈이 마주쳤다.
멜리나의 입매가 호선을 그린다.
“그러던 차에 레오 플로브.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카일님이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를 이 세상에 내놓았죠.”
“우연이죠.”
“맞아요. 모든 게 우연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올 클래스의 능력을 태어난 것도 우연. 칭송받아 마땅한 위업을 이루는 것도 우연. 대영웅의 세계와 끊임없이 연관되는 것도 우연. 그리고 시작의 영웅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찾은 것도 모두 우연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죠.”
양팔을 활짝 벌린 멜리나가 환하게 웃었다.
당연히 그런 우연은 존재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멜리나가 손을 내리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감고 있던 왼쪽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그 눈동자와 마주친 레오의 안색이 변했다.
힘을 주체할 수 없는지 그 눈동자는 평범한 인간의 것이던 오른쪽 눈과 달리 용 특유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가 놀란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눈동자가 개방되자마자 멜리나가 품은 마력도 변했다.
마치 눈을 뜬 게 신호라도 된 듯 마력이 변했다.
‘리시나스의 마력?’
“저는 오래전, 리시나스님의 세계를 공략하고 페이지를 회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공략의 보상으로 리시나스님의 마력을 일부분 계승할 수 있었어요.”
어느새 멜리나의 목소리는 정중하게 변해 있었다.
“매우 영광스럽게도 리시나스님의 마력을 오랫동안 다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힘이 제 말을 듣지 않아요. 마치 진정한 주인을 만난 것처럼.”
카일은 토벌대 최후의 생존자로서 동료들의 모든 것을 짊어졌다.
그중에는 리시나스가 남긴 드래곤 하트도 있었다.
드래곤들에게 있어 드래곤 하트를 물려받는다는 건 곧 ‘계승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멜리나가 빙긋 웃더니 아공간에서 무엇을 꺼냈다.
그건 아주 오래된 동화책이었다.
“이건 수천 년 전의 ‘시작의 영웅들’ 동화책이랍니다. 아마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그때 그 시절의 동화책일 거예요.”
파라라락-
책을 넘긴 멜리나가 후반부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내용은 지금의 동화책과 달랐다.
지금의 동화책은 다섯 명의 대영웅이 모두 힘을 합쳐 에레보스를 쓰러트리는 것으로 동화책이 끝이 난다.
수천 년 전의 동화책은 실제 역사와 똑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히어로 레코드가 온전하던 시절의 책인 만큼 실제 역사가 담겨 있을 테니까.
멜리나가 보여준 건 다름 아닌 리시나스가 눈을 감기 직전이었다.
“이 책에 의하면 카일님은 리시나스님의 드래곤 하트를 계승했다고 나오죠.”
멜리나가 조심스럽게 책을 덮고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한번 묻겠어요.”
엄숙한 멜리나의 눈에는 기대와 선망, 그리고 존경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레오는 리시나스의 힘을 계승한 드래곤 로드를 내려다보았다.
지혜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친우를 떠올리게 했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오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거참, 눈치 빠른 꼬맹이네.”
레오의 말에 멜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네 예상대로야.”
레오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