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솨아아아-!
루메리아 호수를 가르며 정기선이 루메른으로 향했다.
각 학원의 학생들은 갑판 위에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바로 퇴교 처리당한 학생을 봤기 때문이다.
“저기.”
이코트 학생이 자신들을 통솔하는 학생 중 첸 시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조금 전 시리나를 내보낸 교수님은 이름이 어떻게 돼?”
“아인 교수님이세요.”
“헉!”
첸 시아의 말에 이코트 학생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인 엘랑듀.
빙해의 기사로 명성 높은 그가 설마하니 고작 인솔 교수로 왔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런 분이 인솔 교사로 왔다는 건 우리 학원은 그분에게 배운다는 거네?”
“네, 맞아요.”
“대단해! 역시 루메른이야!”
“빙해의 기사에게 배울 수 있다니!”
조금 전까지 우중충하던 분위기가 싹 날아갔다.
어딜 가서 아인 같은 기사에게 수업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코트 외에도 에메랄과 스카운에서도 탄성이 쏟아졌다.
그들도 자신을 인솔하러 온 교사가 렌과 유라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삼대 학원 학생들이 흥분된 반응을 보였다.
굳어 있던 분위기도 풀어지는 가운데 배는 점점 루메른에 다가갔다.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루메른 아카데미를 본 3대 학원 학생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저기가 루메른 아카데미.”
“영웅 후보생들이 공부하는 곳.”
몇몇 이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중에는 어딘지 모르게 열망 어린 눈빛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루메른의 입학 후보생들이었다.
선착장에 도착하고 배에서 내린 학생들이 우르르-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건 없네.”
“평범하잖아?”
“우리 학원이 더 좋은 것 같아.”
몇몇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1학년 교실동의 대강당에 들어섰다.
대강당의 단상에는 세드젠이 서 있었고 자리에는 루메른 1학년들이 학과별로 앉아 있었다.
“반갑네. 3대 학원 학생 제군들. 세드젠이라고 하네.”
세드젠 교수가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세드젠? 루메른의 명교수로 이름 높은 그 세드젠?”
“저분의 손을 거친 영웅들이 엄청 많다던데…….”
“대단해…… 놀라워!”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자 세드젠이 훗- 하고 웃었다.
“자리에 앉게. 왼쪽은 이코트, 중앙은 에메랄, 오른쪽은 스카운일세.”
세드젠의 말을 듣고 다른 학원 학생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루메른 학생들과 같은 자리에 앉다니.’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영웅 후보생이라 칭송받는 학생들과 같은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얘들이랑 내가 대체 얼마나 차이 난다는 거야?’
3대 학원의 학생 중에는 루메른의 입학 준비를 하는 학생도 있지만 여러 번 시도 끝에 끝내 고배를 마시고 3대 클래스 학원에 입학한 이들도 적지 않다.
어려서부터 또래에서 최고라 불린 만큼 자신의 지금 결과에 납득하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선망과 질투가 교차하는 가운데 세드젠이 말했다.
“반갑군. 제군들. 이런 뜻깊은 자리가 마련된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의 가치관을 교류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이걸 기회로 더 나은 길로 도약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세드젠이 학생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부디 많은 걸 얻어 갈 수 있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이상이다.”
***
이코트, 에메랄, 스카운의 학생들은 루메른의 학과 일정에 철저하게 따랐다.
비록 손님으로 초대했다지만 루메른은 그들을 위해 학과 일정을 바꿀 생각이 일절 없었다.
가장 처음 한 것은 바로 600명의 학생들을 섞어 반 배정을 하는 것이었다.
같은 3대 명문 학원으로 묶여 있지만 의외로 이코트, 에메랄, 스카운 학생들 사이에는 커다란 접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메른은 학과는 달라도 반을 통해 여러 학과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에 반해 다른 학원의 학생들은 엮일 일이 거의 없었다.
서로에 대한 경쟁의식은 있지만 서로 교류회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지극히 적었다.
그런 만큼 60명의 타 학원의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매우 서먹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와. 분위기 어색한 거 보소.”
반 교실에서 평소처럼 칼이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대고 깍지를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며 중얼거렸다.
의자를 젖혀 까딱거리던 칼이 씩- 웃었다.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붙임성 좋은 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5반 학생들은 얘가 또 뭔가를 하려나 보다……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다른 학원 학생들은 영문을 몰라 칼의 행동에 집중했다.
척- 척- 단상 앞으로 나간 칼이 말했다.
“반갑다! 얘들아. 난 칼 토마스라고 해! 나이는 15살! 학과는 마법학과지!”
칼이 씩- 웃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같은 반이 됐으니 잘 부탁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공간을 연 칼은 포션병을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쿵-!
“내가 만든 특제 피로 회복 포션이야! 1학년은 물론이고 선배들한테도 인기가 좋은 물건이거든?”
학기 초부터 칼의 인기 사업 아이템이었던 피로 회복 포션은 효능이 좋은 걸로 이미 유명세를 탔다.
덕분에 1학년들은 물론이고 2, 3학년들도 찾아와 애용하는 물건이 되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공부하려면 힘들 거야! 그래서 내가 너희들을 위해 특별히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려고 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라고?”
칼의 말에 다른 학원 학생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웅 후보생씩이나 되는 사람이 갑자기 장사라니?
하지만 5반 학생들은 익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 그럼 우리한테도 싸게 파는 거야?”
일리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야! 차별하는 게 어딨어!”
“우-!”
“장사꾼 녀석!”
“초심을 잃은 거냐!”
5반 사이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칼은 ‘안 들립니다요!’라고 하하하- 넉살 좋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긴장하고 있던 다른 학원 학생들은 긴장이 풀린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칼 토마스라고 했죠?”
뒤편에 앉아 있던 이코트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한 명이 피식- 같잖다는 듯 웃었다.
“일단 제가 내년에 루메른에 입학 예정이라서요. 선배님이 될 테니 존칭은 붙여 드릴게요.”
“그거 영광인데? 그런데 넌 누구냐?”
“하비든 비르센입니다.”
“비르센 왕국의 왕세자?”
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르센 왕국.
대륙 북부에 자리 잡은 강대국으로 명성 높은 기사단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사 강국이었다.
특히 비르센의 양대 기사단이라고 할 수 있는 윈터 기사단과 스노우 기사단의 단장은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린 영웅들이었다.
하비든은 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어릴 때부터 기사로서 재능을 인정받은 왕세자이기도 했다.
즉, 현재 이코트 학생 중에서는 제일 거물이라고 부를만한 학생이었다.
“진짜 영광이네.”
“네. 영광으로 아십시오. 그런데 말입니다.”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칼을 향해 하비든이 말했다.
“전 루메른 선배님들을 뵈러 온 거지 장사꾼을 만나러 온 게 아니거든요? 하물며 선배. 평민이죠?”
“응. 그런데.”
“하. 평민 나부랭이가 나대는 꼴이라니. 이 반에는 제대로 된 귀족이나 왕족이 없는 건가요?”
“내가 왕세자님을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네.”
칼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런 칼의 태도에 하비든의 눈이 꿈틀거렸다.
“루메른 학생이라고 건방 떨지 마시죠. 나도 내년이면 루메른 학생이 될 테니까.”
“딱히 건방 떤 적 없는데.”
“하. 진짜 평민 나부랭이가 나대네.”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은 하비든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하비든의 태도는 아까 전 시리나와는 명백하게 달랐다.
그는 딱히 교수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교칙을 위반할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명성 높은 학생들과도 척질 생각이 없었다.
루메른 입학을 노리는 만큼 신분을 앞세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칼은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저 정도의 마력으로 잘도 루메른에 붙어 있군. 내가 입학할 때쯤이면 남아 있지도 않겠어. 만약 남아 있더라도 마법학과니 엮일 일도 없겠지.’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하겠지만 평생 남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신분으로 살아온 하비든은 만만해 보이는 칼을 상대로는 참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사꾼 노릇은 어디 시장바닥에나 가서 하시지?”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하비든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칼이 포션병을 치우려 할 때였다.
“야. 보기 싫으면 너나 꺼져! 여긴 우리 반이고 심지어 넌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닌데 왜 네가 주인 행세를 해?”
하비든의 눈이 꿈틀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건 너무도 유명한 소녀였다.
“첼시 르왈린.”
하비든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첼시는 그가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나라가 다르다고 해도 왕족과 귀족의 차이는 크다.
하지만 첼시의 모국인 로드렌 제국은 대륙 서부 대부분을 차지한 광활한 제국이다.
거기에 더해 르왈린은 그 제국을 떠받치는 양대 산맥인 르왈린의 직계.
하비든에 절대 꿀리지 않는 신분이다.
거기에 더해 개인의 실력 역시 명성이 높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1학년인 셈이었다.
하지만 하비든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비든 역시 스스로의 실력에 굉장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첼시는 마법사였으며 하비든과 동갑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하비든은 첼시에게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반이라고 편을 드는 건가?”
“흥. 니가 내 친구한테 건방지게 굴어서 짜증 나는 것뿐이거든?”
“친구? 평민이?”
“친구에 평민 귀족이 어디 있어? 웩-! 재수 없어라.”
첼시가 혀를 빼물며 한심하다는 듯 하비든을 보았다.
그런 첼시를 보며 하비든의 눈이 꿈틀거렸다.
“첼시.”
칼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50% 할인 쿠폰 줄게.”
“야! 분위기 산통 깰래!”
첼시가 빽 소리치며 칼의 엉덩이를 마구 걷어찼다.
“어이가 없군.”
하비든이 입꼬리를 말아 올릴 때였다.
“그렇게 못마땅하면 실력을 확인해보지 그래.”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레오가 있었다.
하비든의 눈이 꿈틀거렸다.
“실력이라고요?”
“그래. 넌 아무래도 칼의 실력을 얕잡아 보는 모양인데.”
레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네 눈으로 직접 보면 되잖아. 루메른의 실력을.”
“호오.”
하비든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거 좋군요. 하지만 전 칼 선배를 상대하지 않을 겁니다.”
하비든이 첼시를 힐끗 보며 말했다.
“대신 첼시 르왈린이랑 대련하고 싶습니다.”
“웃기셔. 주제 파악도 못 하고는.”
“그렇게 해.”
“엑? 레오 오빠!”
첼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오를 보았다.
“첼시 파이팅! 루메른의 실력을 보여 줘!”
“내가 아니라 네가 보여 줘야 한다고! 네가!”
도끼눈을 뜬 첼시가 칼에게 주먹질을 날렸다.
“대신 칼 선배는 제 친구가 상대해줄 겁니다.”
하비든이 힐끗-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이코트 학생을 바라보았다.
덩치가 칼보다 머리 하나 반쯤은 큰 소년이었다.
“좋아.”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레오를 빤히 바라보던 하비든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레오 플로브 선배의 실력도 보고 싶군요. 그 대단한 올 클래스가 얼마나 놀라운지 말입니다.”
하비든의 말에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너를 상대하는데 내가 움직인다는 건 과분한 것 같지 않아?”
“그게 무슨…….”
“실력도 안 되는 녀석이랑 대련해서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뜻이야.”
“큭!”
하비든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첼시 르왈린을 쓰러트리면 다음은 당신입니다!”
“어머나. 꿈도 크셔라.”
첼시가 혓바닥을 쏙 내밀더니 앙칼지게 소리쳤다.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나댄 걸 후회하게 해줄 테니 각오해!”
***
“이런 건 좋지 않다고 보는데요. 최근 주목받고 있어서요.”
“알고 있다. 그러니 용건만 말하겠다.”
“빨리 말하세요.”
“목표물의 정확한 위치를 말해라.”
음산한 목소리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곧 이 지긋지긋한 임무도 끝인 모양이군요. 잘 됐군요.”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서고의 유물 창고의 최중심부에 있어요. 정확한 위치는 조만간 지도를 그려 건네드리죠.”
“그래. 위대한 검은 불꽃의 축복이 있기를.”
“위대한 검은 불꽃의 축복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