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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알아?”
“아주 잘 알지.”
피식- 하고 대답하는 레오를 보며 실라투나가 팔짱을 꼈다.
명백한 비웃음을 담은 목소리로 실라투나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루메리아 시티에서 마안의 마법사가 내 또 다른 조각을 물리친 적이 있었지. 그때 네가 있었다고 했던가?”
킥킥- 소름 끼치는 웃음을 내뱉은 실라투나가 말했다.
“그런데 그때 잠깐 본 게 끝이 아닌가? 우리가 대체 어떤 사이지?”
“아주 아름다운 사이지.”
터벅- 터벅-
레오는 실라투나의 바로 앞에까지 걸어왔다.
“너를 포함한 군단장들, 그리고 에레보스까지. 내가 다 찢어 죽여 줄 거니까.”
“어머나. 패기가 넘치다 못 해 주제파악을 못하는 애송이로군.”
실라투나가 깔깔 웃었다.
“네놈이 올 클래스에다가 조금 잘 나간다고 뭐라고 되는 줄 아나 보구나? 너는 그냥 하찮은 버러지 중 하나일 뿐…….”
퍽-!
콰득-!
레오는 망설임 없이 실라투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털썩-
정강이가 부러지면서 실라투나가 중심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온전한 상태의 실라투나의 조각이었다면 레오 역시 함부로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실라투나의 조각은 검성에 의해 소멸 직전에 몰린 조각이다.
매우 힘이 약해진 상태이기에 레오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거치네.”
실라투나가 인상을 쓰며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감히 1학년 애송이가 나를 이렇게…….”
말을 하던 실라투나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얼굴을 굳혔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오의 눈빛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물 여왕 실라투나.
재앙의 시대 이전부터 가공할 공포의 재앙으로 군림해온 타르타로스의 군단장.
단언컨대 수천 년 동안 셀 수 없는 수많은 영웅들이 실라투나를 두려워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이들이 실라투나를 토벌하려고 노력했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한 자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실라투나는 영웅을 사냥하는 입장이었다.
영웅 포식자.
마물 여왕의 또 다른 이명.
군단장 중 가장 강대한 힘을 지녔지만 음험하여 전면에 나서지 않는 사령왕.
실라투나와 동급의 힘을 지녔지만 신중한 거인왕.
그 두 군단장과 달리 마물 여왕은 저돌적이고 잔혹했다.
전면에 나서서 수많은 영웅을 집어 삼켜왔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령왕과 거인왕 보다도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는 게 바로 실라투나였다.
그런 실라투나를 바라보는 레오의 눈빛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이게…… 1학년 애송이의 눈빛이라고?’
눈동자에 깃든 증오와 분노의 감정은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평소의 실라투나라면 비웃음을 날려 줬을 것이다.
하지만 레오에게 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실라투나를 바라보는 레오의 눈빛은 명백한 사냥감을 보는 자의 눈빛이었다.
이때까지 실라투나가 잡아먹어 왔던 영웅들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았다.
실라투나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뭐지, 이 애송이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미는 증오와 분노.
그와 함께 엄습하는 불길함까지.
“인간 따위가.”
실라투나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일렁였다.
“인간 따위가 건방지게 그딴 눈으로 나를 내버려 두지 말란…….”
콰득-!
레오의 검이 실라투나의 입에 틀어박혔다.
“그만 짖어. 듣기 싫으니까.”
“아! 아! 아!”
울컥- 울컥- 피를 쏟아내는 입가를 양손으로 틀어막으며 실라투나의 눈에 살기가 일렁였다.
부러졌던 무릎이 회복되었다.
실라투나가 몸을 세우려 하자 레오가 이번에는 반대편 무릎을 걷어찼다.
콰득-!
“꿇어.”
털썩-!
중심을 잃은 실라투나가 이번에는 앞으로 엎어졌다.
꾸역- 꾸역- 입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텁-!
레오가 발로 실라투나의 머리를 짓밟았다.
실라투나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엄청난 굴욕감을 느꼈지만, 몸이 떨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아득한 기억의 저편.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당시 실라투나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전율스러운 군단장을 떨게 만든 존재.
단 한 사람밖에 남지 않은 최대의 난적을 처단하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던 그 당시.
실라투나는 공포와 절망과 마주해야 했다.
그 당시도 지금과 같았다.
‘설마…… 설마…….’
텁-!
실라투나가 팔과 머리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는 레오의 발을 밀어내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레오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실라투나는 고개를 치켜든 상태에서 똑바로 레오의 눈을 직시했다.
순간.
풍경이 바뀌는 착각이 들었다.
우울한 잿빛 하늘.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
그토록 바라왔던 풍경이었지만 실라투나에게는 더 없는 두려운 풍경이기도 했다.
무릎 꿇은 마물 여왕 앞에 한 인간이 서 있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대영웅, 시작의 영웅 카일.
화악-!
일순간 그러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말도…… 안 돼.”
실라투나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 두려운 시작의 영웅과 눈앞의 애송이가 지금 겹쳐 보인다.
머릿속으로 떠오른 상황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런 부정을 비웃듯 실라투나의 말에 레오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카…… 일!”
씹어 내뱉듯 그 이름을 부르는 실라투나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이번에는 한 마리도 남기지 않는다.”
콰득-!
“컥?”
레오의 검이 실라투나의 가슴에 박혔다.
부왁-!
레오는 그대로 검을 쳐올려 실라투나의 상반신을 잔인하게 베어 버렸다.
사르륵-!
실라투나의 몸이 검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소멸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멸한 분신은 본체에 지금 상황을 전할 수도 없다.
실라투나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킥- 킥-!”
실라투나가 어깨를 들썩였다.
“키히히히힉! 키하하하하학!”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리며 소멸하는 실라투나의 조각이 광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구나! 카일! 그래서? 혼자서 무얼 할 수 있다는 거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들썩이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 곁에는 누가 있지? 언제나 겁에 질려 있던 아르온? 조잡한 쓰레기나 만들던 드웨노? 가증스러운 허세꾼 루나? 아니면 멍청하기 짝이 없었던 리시나스? 대체 누가 있다는 거야? 혼자서 우리를! 위대한 태초의 불꽃을 토벌하시겠다고? 꿈도 크시군! 끼하하하하!”
사아아악-!
검은 가루가 되어 소멸해가며 실라투나는 레오를 비웃었다.
“네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손가락 빨며 가까스로 구했던 세계가 다시 불타는 꼴이나 구경하겠지! 시작의 영웅 카일!”
번뜩-!
실라투나가 눈을 번뜩였다.
“네놈도 결국 네 동료들이랑 다를 바 없이 실패할 거다! 절망하며 죽게 될 거라고! 아하하하하!”
저주의 말을 내뱉는 실라투나의 머리를 귀찮다는 얼굴로 짓밟았다.
콰득-!
도자기가 깨지듯 머리가 파괴되었다.
사아아아-!
입만 남게 된 실라투나가 이죽거렸다.
“그때가 기대되는군. 우후후후후.”
사악-!
자취를 감추듯 사라진 실라투나를 내려다보며 레오가 중얼거렸다.
“혼자라…….”
“레오?!”
“야! 거기서 뭐 해?”
멀리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셀리아와 클로에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괜찮아?”
다급한 클로에의 물음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너희는?”
“난 물론 거뜬하지.”
셀리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마족들도 대충 다 정리가 되었어.”
“그래.”
“……? 무슨 일 있어?”
의아한 얼굴로 묻는 클로에를 보며 레오가 피식 웃었다.
“아니, 그냥.”
레오가 손을 뻗어 클로에의 머리카락을 흩트려주었다.
“든든하다 싶어서.”
그렇게 말한 레오가 앞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팔짱을 낀 셀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가 갑자기 왜 저러지?”
그러고는 얼굴이 빨개져서 입을 뻐끔거리는 클로에를 보며 말했다.
“클로에.”
“어, 으, 응!”
“좋겠네?”
자신을 놀리는 친구를 보며 클로에가 셀리아의 어깨를 살짝 때려준 후 얼굴을 부채질했다.
‘혼자가 아니야.’
레오는 루메른의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새로운 동료가 있어, 그리고…….’
레오가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녀석들과의 유대가 끊어진 것도 아니야.’
친구들이 전해줬던 지식이.
그리고 친구들이 남겼던 힘이 히어로 레코드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너희는 여전히 두려운 거야.’
레오가 주먹을 쥐었다.
‘오래전 사라졌던 대영웅들이, 그리고 다시 언제가 다시 탄생할 대영웅들이.’
***
타르타로스의 루메른 습격.
이번 사건은 말 그대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그리고 그 침입자가 삼대 클래스 학원의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세간을 뒤흔들었다.
“여러 나라에서는 곤란하게 됐겠다.”
칼이 혀를 찼다.
“1학기의 여러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압박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당하게 생겼으니.”
타르타로스에 위협당하는 루메른을 믿지 못하겠다며 압박을 가해왔던 다른 나라의 권력층 입장에서는 루메른 측이 거부할 빌미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칼의 말에 첼시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뭐 루메른에서 이걸 정치나 외교 카드로는 사용하지 않을 거야. 애초에 루메른은 중립이었잖아?”
“그렇지. 그래도 더 이상 찡찡대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을까?”
팔락-!
신문을 덮으며 칼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교장 선생님의 힘은 새삼 놀랐어.”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창공을 가르는 칼리안의 검격은 모두를 충격으로 빠트리기 충분했다.
검성의 명성은 유명하다.
그가 남긴 업적 역시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오랫동안 최전선으로 물러나 있었기에 요즘 이들 중 검성의 힘을 직접 경험해 본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
“어떻게 검으로 그런 게 가능하지?”
칼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첼시가 팔짱을 꼈다.
“으음! 우리 아버지도 최대한의 마력으로 마법을 쓴다고 해도 가능할지 모르겠네.”
칼과 첼시 이외에도 다른 학생들 역시 교장의 이야기로 정신이 없었다.
그때 일리아나가 울상을 지으며 반으로 들어왔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첼시의 물음에 일리아나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학년 게시판에 중간고사 기간이 나왔어.”
그 말을 듣고 여기저기서 탄식이 쏟아졌다.
칼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5반 학생들 역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곧 시험기간이라는 거 알았으면서 반응들이 왜 그래?”
“맞아, 맞아.”
첼시가 레오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래, 너희는 우등생들이라 그거지?”
“좋겠다! 이 우등생들아! 공부 비법 좀 가르쳐 줘!”
“합동 수업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못 했다고!”
일리아나가 대표로 소리치자 테이드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넌 합동 수업 아니라도 공부를 안 하잖…….”
“겁 없이 팩트로 때리는 게 이 건방진 입이냐!”
“이거 놔!”
자신의 입을 잡고 힘을 주는 일리아나를 테이드가 떨쳐냈다.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반 내부를 보며 첼시가 말했다.
“그래도 이번 중간고사는 좀 낫잖아? 필기보다는 실기 비중이 높잖아.”
그 말에 칼이 깍지를 낀 손을 뒤통수에 댔다.
“하긴. 이번 중간 고사는 ‘대련 평가’ 가 가장 큰 점수를 차지하지.”
“맞아. 패배해도 점수가 높아. 말 그대로 대련 평가니까 어떻게 싸우느냐가 중요하니까.”
“듣자 하니 이번 대련 평가는 랜덤으로 진행되지만 특정 상대를 지목해서 ‘도전’ 할 수도 있다고 하던…….”
드르륵-!
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방문을 열고 온 이에게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듀란이었다.
터벅- 터벅-
듀란은 레오 앞으로 다가갔다.
“레오 플로브.”
“왜?”
“이번 대련 평가 이야기는 들었겠지?”
듀란이 황금색 눈을 번뜩였다.
“이번에야말로 누가 최고인지 똑똑히 증명해 주마.”
“댁은 질리지도 않아?”
첼시가 삐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시끄럽다, 첼시 르왈린.”
“흥!”
언제나처럼 듀란과 첼시가 눈싸움을 할 때였다.
그때 문득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의아한 얼굴로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5반 학생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깐! 저 사람이 왜 1학년 교실동에?”
“와! 대박! 잘생겼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5반 문으로 한 청년이 들어왔다.
5반 전체가 숨을 죽였다.
그는 너무도 유명한 학생이었다.
터벅- 터벅-
“레오.”
“리스 형님.”
학생회장 리스 제르딩거가 레오 앞에 서 있었다.
리스는 레오를 보며 빙긋 웃었다.
“잠깐 대화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