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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교실동에 있는 카페.
리스는 주문한 커피를 들고 와 레오 앞에 앉았다.
주변 1학년들이 레오와 리스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수군거렸다.
1학년 대표와 5학년 대표이자 학생회장의 회동이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 레오의 외가가 제르딩거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 세대 제르딩거의 주인과 그의 사촌.
누가 봐도 제국의 패권을 논할 수 있는 조합이다.
그때 몇몇 여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리스에게 다가왔다.
“저! 학생회장님!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도요! 저희 기사학과거든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사인을 요청하는 두 1학년 여학생.
리스는 웃으며 두 사람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어려울 것 없지. 공부 힘내.”
“감사합니다!”
“와! 회장님의 사인이다!”
꺅-! 꺅-! 거리며 기뻐하던 두 여학생은 레오를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레오. 다음 수업 때 봐.”
즐거워하며 떠나는 두 여학생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엄청 익숙하시네요.”
“익숙하니까. 너도 학년 대표니까 후배들이 들어오면 이렇게 될걸?”
리스의 말에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학년 대표 선배들은 리스 형님처럼 이렇게까지 인기가 없는 것 같던데요?”
4학년 대표 하르크는 매일 자느라 주변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
3학년 대표 엘레나는 학교의 여왕.
레오는 편하게 보고 있지만 언제나 친위대가 주변에 잔뜩 깔려 있다.
2학년 릴의 경우에는 친절하고 살갑긴 했지만, 후배들을 위하는 마음이 커서 1학년 후배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한 번 잡히면 수 시간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덕분에 1학년들이 질려서 다가가는 걸 무서워한다.
레오의 말에 리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 그 녀석들이 조금 별나기는 하지.”
‘조금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리스가 말했다.
“뭐, 이런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기로 하고.”
달칵-
리스가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입에 한 모금 커피를 머금은 리스가 빙긋 웃었다.
“이곳 커피는 여전하구나.”
“오랜만에 오셨나 봐요?”
“1학년 때 이후로 처음이지. 너도 알겠지만 루메른 학과 일정이 생각보다 정신이 없어서 말이야.”
커피잔을 내려놓은 리스가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의외로 추억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거든. 이렇게 졸업반이 되어서야 추억의 장소에 가볼 여유가 생기더라고.”
리스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리스 형님은 제르딩거의 후계자이기도 하니까 더욱 시간이 없었겠네요.”
거대 영웅 명가 제르딩거의 후계자로서 리스는 더더욱 학교생활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셀리아 역시 빈틈없는 우등생으로 1학년 내에서 유명하다.
제르딩거의 직계로서 조금이라도 흠을 잡힐 수 없다는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그런 셀리아의 오빠에다가 제르딩거의 후계자인 리스는 완벽 그 자체의 학교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 성격상 셀리아보다도 더욱 자신에게 엄격했겠지.’
리스가 완결무결의 학생회장으로 불리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온갖 재능 넘치는 학생들이 넘치는 이곳 루메른에서 정점에서 올랐던 남자.
모든 학생의 인정을 받는 학생회장.
그것이 바로 리스 제르딩거였다.
“그래. 뭐, 그래도 열심히 한 덕분에 지금은 완전히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2학기가 된 이후부터 5학년들은 대부분 느긋했다.
장장 5년의 시간 동안 경쟁과 생존의 틈바구니 속을 굴러왔다.
이제 졸업을 앞둔 만큼 새삼 경쟁과 생존에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루메른 5학년들은 2학기가 되면 동아리나 학과 직책도 인수인계하며 느긋한 시간을 보낸다.
교수들도 크게 터치를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5년 동안 고생한 학생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었다.
리스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학생회 일은 인수인계를 끝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뭐, 아직 골치 아픈 일이 남았지만.”
“골치 아픈 일?”
“차기 학생회장.”
리스의 말에 레오는 현재 학생회장으로 거론 되고 있는 두 학생을 떠올렸다.
첫 번째는 4학년 하르크 리그아르드.
내년에 5학년이 되는 데다가 기사학과 전체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게다가 루메른의 3대 영웅 명가의 후계자이기도 하다.
“학년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배경으로 보나. 솔직히 하르크만한 녀석이 없긴 해.”
리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녀석은 학생회장 자리에 크게 관심 없거든. 스스로 학생회장의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의외네요. 소문에 의하면 엘레나 선배를 견제하기 위해 학생회장이 되고 싶어 한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하르크와 엘레나가 앙숙인 건 맞지만 하르크는 그녀가 학생회장이 되든 말든 크게 관심이 없거든.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건 4학년들이 엘레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야.”
리스의 말에 레오는 턱을 괴고 엘레나를 떠올렸다.
‘확실히 적이 많을 타입이지.’
레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한다.
단순한 철부지로 보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엘레나는 그럴만한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특히나 엘레나는 한 학년 위 기수의 선배들과 학기 초부터 트러블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는 나랑 비슷한가?’
그렇게 생각하던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2학년들이 와서 시비를 거는 거고. 그 애는 사건을 만들 타입이잖아. 난 온건파라고.’
“어쨌든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지금 3학년과 4학년은 사실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거든.”
3학년은 엘레나가 장악한 상태.
그렇다 보니 엘레나를 좋아하지 않는 4학년들과 3학년들의 사이가 자연스럽게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5학년들이 억누르고 있지만, 우리가 졸업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문제가 생길 거야.”
리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르크가 학생회장이 되어준다면야 중심이 어느 정도 잡힐 것 같지만. 싫다는 녀석을 억지로 시켜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게 분명하거든.”
“그렇긴 하겠네요.”
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걸 왜 1학년인 저한테 말하는 건가요?”
2학년인 릴과 상담을 하면 이해라도 한다.
어쨌든 1학년인 레오보다는 2학년인 릴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스는 굳이 레오에게 선배들의 이야기를 하러 왔다.
“본론은 지금부터야.”
리스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하르크가 저런 상태니까 엘레나 쪽으로 마음이 기운 건 사실이야. 4학년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마음이 없는 녀석에게 학생회장 자리를 넘길 수는 없어. 그렇다고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녀석에게 학생회장 자리를 맡기는 것도 문제거든.”
리스의 말에 레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리스라면 무난하게 4학년들에 학생회장 자리를 맡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3학년에게 학생회장 자리를 물려준다는 초강수를 두다니?
“제멋대로이긴 해도 3학년들을 장악한 모습을 본다면 엘레나는 학생회장으로서 자질이 충분하거든.”
리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지금은 학생회장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때라고 생각해.”
“중요한 때?”
“그래. 대외적으로 현재 세계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
오랫동안 숨죽여 있던 타르타로스가 준동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영웅 사관 학교에도 그 마수를 뻗치고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루메른이나 세이룬에서도 타르타로스가 직접적으로 영웅 사관 학교를 노린 적은 드물다.
루메른과 세이룬도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다.
“평소라면 그림이 썩 좋지 않겠지만. 이럴 때라면 학생회장의 임기가 긴 것도 결코 나쁘지 않아.”
일단 한 집단의 리더가 계속 리더 자리를 유지한다면 집단은 안정화 된다.
하르크가 학생회장이 되든 다른 4학년이 학생회장이 되든.
엘레나가 학생회장이 되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일찍 차라리 엘레나를 학생회장을 시키는 게 좋다는 것이 리스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1~3년까지는 몰라도 4, 5학년은 의외로 실력 차가 거의 나지 않거든. 뭐. 애초에 엘레나는 학년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실력자였지만.”
그 말에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엘레나 선배에게 학생회장 자리를 넘기면 되는 거 아닌가요?”
뭐가 됐든 차기 학생회장을 뽑는 건 현 학생회장이다.
게다가 루메른 역사에 3학년이 학생회장이 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네 말대로야. 능력이면 능력. 실력이면 실력. 엘레나는 학생회장에 어울리는 녀석이야. 본인 스스로 학생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기도 했고.”
리스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제없는 거 아닌가요?”
문제 있냐는 듯 묻는 레오를 보며 리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문제가 없었지.”
“……?”
느닷없는 리스의 말에 레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커피를 입에 한 모금 머금은 리스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평소에 감정 변화를 잘 드러내지 않는 그로서는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오늘 아침 엘레나를 불러서 학생회장 이야기를 꺼냈다.”
리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런데 학생회장 자리를 거절했다.”
“리스 형님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은 남 놀리는 게 취미잖아요.”
꼬인 구석이 있는 엘레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더구나.”
“다른 이야기?”
“그래. 자기는 학생회장 그릇이 아니라고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면서 학생회장 후보를 한 명 추천했지.”
“그게 누군데요?”
그 제멋대로의 엘레나가 다른 사람을 학생회장으로 추천하다니?
흥미가 생기는 걸 느끼며 레오가 묻자 리스가 검지를 펼쳤다.
“…….”
레오가 인상을 썼다.
“설마?”
“그래.”
리스의 손가락 끝은 정면.
정확하게 레오를 향하고 있었다.
“레오, 너를 학생회장 후보로 추천했다.”
‘그 여자가 진짜.’
레오는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
“흥- 흥- 흥-”
3학년 교실동.
카페 테라스에 앉은 엘레나가 깍지를 낀 손 위에 턱을 올리고 다리를 까딱거리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별일이군, 엘레나. 요즘 수업을 열심히 듣다니. 학생회장 자리를 노리기 때문인가?”
3학년 같은 반 동급생의 물음에 엘레나가 생긋 웃었다.
“딱히요. 이제 학생회장 자리 같은데는 관심 없어요.”
뜬금없는 말에 동급생이 얼굴을 굳혔다.
“뭐?”
“그보다 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그게 뭔데?”
엘레나가 빙긋 웃었다.
“비밀이에요.”
엘레나는 한 소년을 떠올렸다.
말 그대로 대영웅과도 같은 풍모를 내뿜는 하얀 머리카락의 소년.
‘레오 플로브.’
현재 엘레나가 가진 최대의 관심사.
그녀가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완전무결한 대영웅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