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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급 영웅은 아카데미 우등생-175화 (175/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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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칵-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레오는 책상에 앉았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이제 슬슬 여름도 끝나가나?’

선선해진 날씨를 느끼며 레오는 달빛이 내리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품에서 낡은 수기를 꺼냈다.

스윽-

가죽 재질의 표지를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리시나스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저녁마다 종종 이곳에 글을 쓰는 걸 봤었다.

가볍게 심호흡한 레오가 수기를 펼쳤다.

아까 전 금서고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빈 페이지가 보였다.

그걸 본 레오가 손끝에 마나를 일으켰다.

페이지에서 희미한 빛이 나더니 정갈한 리시나스의 문체가 떠올랐다.

수기의 시작은 카일을 만나기 전 부터였다.

정확하게는 재앙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부터였다.

팔락- 팔락-

‘모두 오래전 리시나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이구나.’

팔락-

과거 친구가 해주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추억하던 레오의 손이 멈칫했다.

[오늘 ‘살아남는 영웅’을 만났다. 소문대로 성격이 꼬일 대로 꼬인 녀석이다. 능력은 확실한데 이 비관적인 성격은 대체 어떻게 뜯어고쳐야 할까? 대체 이 녀석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까?]

‘이 녀석. 날 애초부터 토벌대에 끌고 갈 생각이었군?’

레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드스론에서 리시나스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첫 만남은 용병 길드에서였지.’

당시의 리시나스는 어리석은 자라 불렸었다.

절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에레보스를 토벌할 거라고 호언장담하고 다녔던 리시나스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절망적인 시대였으니까.’

그저 에레보스와 타르타로스가 쳐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절망적인 시기.

카일 역시 언제나처럼 용병 길드에서 술을 마시기 바빴다.

‘네가 살아남는 영웅 카일이지?’

‘그럼 넌 어리석은 자라 불리는 그 도마뱀이냐? 나에게 무슨 볼일이지?’

‘너. 내 동료가 되지 않을래?’

느닷없는 제안에 놀랐었다.

당시의 ‘살아남는 영웅’은 불행의 상징이었다.

누구도 카일과 동료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혼자인 게 익숙한 자신에게 내밀어졌던 손.

하지만 카일로서는 그런 리시나스의 제안이 달갑지 않았다.

‘미안한데 거절이야. 난 자살에는 취미가 없거든.’

“첫 만남은 최악이었지.”

이후에도 리시나스는 몇 주 동안 끈질기게 카일을 찾아왔다.

드문드문 적혀있던 수기가 그 기간은 매일 기록 되어있었다.

‘욕을 바가지로 해놨군. 하긴 어쩔 수 없나. 내가 워낙 틱틱댔으니.’

쩝- 입맛을 다시면서도 레오는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포기할 법도 한데도 리시나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타르타로스가 가드스론을 대대적으로 침공해왔다.

그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카일과 리시나스가 처음으로 파티를 맺었다.

그리고 시체가 쌓인 평원에서 리시나스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리시나스는 회색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너밖에 없어. 카일.”

리시나스는 환하게 웃었다.

카일은 그 웃음에서 왜인지 모를 빛을 봤다.

“네가 시작이야.”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내밀었던 하얗고 고운 손.

“나와 함께 가자, 카일. 네가 필요해.”

절망만이 가득했던 세상.

그 세상에서 저렇게 희망차게 웃는 리시나스가 처음에는 거슬렸다.

당시의 카일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세계의 멸망은 멀지 않았다고.

그저 오늘은 최대한 즐겁게 살자며 방탕한 나날을 보내며 끝없이 추락해가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리시나스가 거슬리는 건 당연한지 몰랐다.

카일은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고 있었다면…… 리시나스는 빛을 향해 걸음을 내딛고 있었으니까.

“왜 나지?”

“너는 강하니까.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 그리고.”

“그리고?”

“포기하고 절망했어도 네 눈빛은 아직 살아 있어.”

리시나스가 빙긋 웃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어.”

살면서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고결해 보인 순간은.

“네가 바라는 건 너무도 어리석은 비원이야. 불가능해.”

하지만 마지막까지 카일은 리시나스의 비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런 부정에도 이 어리석은 여자는 한결같았다.

“맞아, 카일. 내 비원은 너무도 어리석은 비원이지.”

내민 손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카일. 우리는 세상을 구원할 거야.”

포기하지 않는 그 마음이.

한결같이 고결한 그 모습이.

“함께 가자. 더 이상 네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 같은 건 볼 일이 없을 거야. 왜냐면 나도 강하거든.”

카일을 구원했다.

내민 손을 잡은 그때 카일은 생각했었다.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비원을 이루어주고 싶다고.

[드디어 이 말 안 듣는 빌어먹을 녀석이 토벌대에 참여 했다.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 놈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 한 발자국 내디뎠다. 이 만남은 분명 세계의 운명을 바꿀 것이다.]

이후에도 수기는 계속되었다.

루나가 들어 온 날.

아르온이 합류한 날.

그리고 드웨노까지 모인 날.

토벌대는 형태를 이루었고.

리시나스가 호언장담했던 대로 세상은 빛을 되찾아갔다.

[내일 최후의 원정이 시작된다. 모든 준비를 끝났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이제 에레보스를 토벌하는 것만 남았다. 부디 내 이상을 이룰 수 있기를.]

그것을 끝으로 수기는 끝이었다.

마지막 원정에서 리시나스는 이 수기를 놔두고 떠났다.

수기를 모두 읽은 레오는 빈 페이지를 파라라라락- 넘겼다.

그러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멈칫했다.

[카일에게]

레오가 숨을 삼켰다.

리시나스가 카일에게 쓴 편지가 분명했다.

‘리시나스가 동료들에게 남긴 편지구나…… 내게 남긴 편지가 보인 건 내 마나에 반응해서 그런 거고.’

친구의 편지에 심호흡하고 페이지를 넘겼다.

[이 편지를 내가 아닌 네가 읽고 있다면…… 세상은 구원되었지만 나는 마지막 원정에서 죽었다는 말이 되겠지.]

꾸욱-

레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넌 성격이 꼬인 녀석이야. 툭하면 비꼬고 욕하고. 진짜 마음 같아서는 명치에 주먹을 한 대 세게 꽂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참았지.]

‘……아니. 걸핏하면 내 명치에 드롭킥 날렸던 건 뭔데? 그건 주먹이 아니까 카운트 안 한다는 거야 뭐야?’

헛웃음을 터트리면서도 편지를 읽어나갔다.

[하지만……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만약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네가 있었기 때문에 세상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거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리시나스의 말을 부정했다.

[카일. 내 무모한 원정에 따라와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네가 살아남는 영웅이 되지 않기를 바랐어.

하지만 결국 친구가 죽는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말았구나.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그러니 네 미래는 행복했으면 해. 더 이상 혼자 남지 않게.

더 이상 혼자 살아남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해.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면…… 네가 정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카일]

뚝- 뚝-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너에게 축복이 있기를 바랄게. 리시나스가.]

편지의 내용이 흐릿하게 보였다.

어느새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편지의 내용을 적셨다.

“이 빌어먹을 도마뱀아…… 죽는 모습 따윈 안 보여 줄 거라면서…….”

그동안 동료의 죽음을 외면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겨내거나 극복하지도 않았다.

다만 덤덤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죽은 후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친우의 편지에……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먼저 떠나 버린 야속한 동료를 떠올리며 레오는 감정을 추슬렀다.

[추신:내가 진짜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거든? 근데 도저히 못 참겠다.]

그리고 페이지 끝자락에 있는 글을 읽고 의아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겼다.

[개자식. 등신. 병신. 머저리. 숨 쉬지 마. 나가 뒤져. 물에 코 박고 죽어 버려.]

감동적인 분위기를 산통 내고 페이지를 메울 정도로 커다랗게 쓰인 욕설과 저주의 말에 레오는 순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정갈했던 글씨체와 다르게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아니, 갑자기 뭔…….”

눈물이 멎는 걸 느끼며 황당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겼다.

[나 너를 좋아했어. 끝까지 모르더라?]

“…….”

리시나스가 남긴 마지막 말을 본 레오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몇 번이고 글을 곱씹어 보았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됐다.

‘그러니까. 이건 리시나스가 쓴 편지니까 나는 리시나스고. 이건 나한테만 보이도록 쓰인 편지니까 너는 나라는 거잖아? 그럼 나 너를 좋아했어 라는 말은 리시나스가 나를 좋아했다는 말?’

“엉?”

레오는 그답지 않게 멍청한 소리를 내고 수기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어엉?”

여전히 멍청한 얼굴로 수기를 멀찍이 본 후 이윽고 내용을 이해한 레오가 붉어진 얼굴로 경악성을 내질렀다.

“뭔데!!!”

***

휘오오오오오-

악취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시체의 냄새.

아마 평범한 생명체였다면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독기와 냄새에 질식해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곳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끔찍한 곳.

타르타로스의 총사령관, 사령왕의 본거지였다.

“오랜만이네요. 헬 카이저.”

마물 여왕, 실라투나의 말에 사령왕 헬 카이저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100년 만인가?”

인간으로서는 한 세대가 지날 정도로 기나긴 시간.

하지만 수천 년을 살아온 괴물들에게는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이번에 루메른에서의 이야기는 다 들었다. 수족들을 모두 잃은 모양이군.”

“수족뿐만이 아니에요. 저주왕 역시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어요.”

실라투나가 팔짱을 꼈다.

“꽤 많은 희생을 치러서 ‘데리고’ 나왔었는데 말이죠.”

저주왕을 부활시키기 위한 실라투나의 계획.

그것은 이번 일로 인해 모두 무산되었다.

그 덕분에 오랫동안 루메른에 침투시켜 놓았던 모든 것들을 날리고 말았다.

“기분도 안 좋아서 나라나 하나 멸망시킬까 생각하던 참이에요.”

“어느 나라지?”

“그 올 클래스인지 뭔지 하는 애송이 이름이 뭐였죠? 레오 플로브? 그 녀석의 나라가 변방의 작은 왕국이더라고요.”

마치 지나가는 개미를 밟는 투로 실라투나가 말했다.

“그 나라를 밟아 버릴까 하는데.”

“그곳은 변방이지만 로드렌 제국의 앞이다. 가볍게 칠 수 있는 곳이 아니지.”

“하지만 심심한걸요.”

군단장.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작은 왕국 정도는 하루아침에도 멸망시킬 수 있는 전율스러운 괴물들이었다.

실라투나의 말에 사령왕이 말했다.

“멋대로 날뛰기에는 아직 부족한 게 많지. 실라투나. 우리가 후임 군단장들을 키우기 시작한 지도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지.”

“네. 맞아요. 3000년 전에 잘 키워놨었는데 그 빌어먹을 것들에게 토벌당했죠.”

실라투나의 얼굴에 짜증이 일었다.

그 당시 일곱 군단장이 토벌되면서 지상 종족들의 전력 역시 절반이 괴멸했다.

하지만 피해 수준만 따지면 타르타로스가 더욱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 토벌되기를 반복…… 결국에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죠.”

지상의 종족들에게는 ‘군단장’이라고 하면 전율스러운 공포지만.

사령왕과 마물 여왕의 입장에서는 아직 애송이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최근 어떤 실험을 했지.”

“어떤 거죠?”

“우리의 옛 동지들을 ‘데리고 나오는’ 거다.”

“불가능하지 않나요?”

“우리 신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지.”

헬 카이저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검붉은 안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해골이 드러났다.

하얀 해골에 마치 커다란 루비를 박아 놓은 듯한 외모.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물론 완전한 상태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겠네요. 그래서 그 계획은 어디까지 진행됐나요?”

실라투나의 물음에 헬 카이저가 딱- 딱- 딱- 웃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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