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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학 수업.
수업 도중 레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리시나스가 자신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그 녀석이 나한테 그런 감정을 드러냈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지혜의 왕 리시나스.
세상의 구원이라는 숭고한 목표를 가졌던 에레보스 토벌대의 리더.
대영웅들을 규합하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던 고결한 흑룡.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빈틈없는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물론 친구들 앞에서는 아니었다.
특히 큰 전투가 있은 후 연회에서는 풀어진 모습도 자주 보여주었다.
그때면 술을 마시며 모든 재앙이 사라진 후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도 딱히 날 좋아하는 티를 낸 적은 없잖아? 그런데 왜 내가 못 알아준다고 욕을 해?’
인상을 찡그린 레오가 옛날 일을 떠올렸다.
***
그날 역시 연회가 한참인 날이었다.
가드스론의 광장에서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많은 이들이 영웅들을 축복해주었다.
그 자리에는 다섯 명의 대영웅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다른 영웅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인간.
그 선율에 맞추어 즐겁게 춤을 추는 엘프.
즐겁게 술을 따라주는 드워프.
음식을 만드는 수인.
아이들에게 영웅담을 이야기해주는 드래곤.
다섯 종족이 모여 손에 넣은 평화에 감사하며 즐겼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절망의 시대라는 것도 잊었다.
카일은 멀찍이서 그 희망찬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오는 두 명이 있었다.
그날 말을 걸어온 이는 평소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셨던 리시나스였다.
술기운에 홍조 어린 얼굴로 다가온 리시나스는 익숙하다는 듯 카일의 옆에 앉았다.
“카일.”
“왜.”
“에레보스를 토벌하면 뭘 할 거야?”
세상을 구원하여 빛을 되찾겠다는 목표가 있는 리시나스.
세상 한가득 꽃을 피우고 싶다는 루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파하겠다는 드웨노.
아이들이 울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던 아르온과 달리 카일은 큰 목표가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대로 살겠지. 난 갈 곳이 없으니까.”
그 말에 리시나스가 고개를 돌려 카일을 보았다.
“그럼.”
리시나스가 수줍게 웃었다.
“나랑 같이 드래곤의 영역에서 살지 않을래?”
“드래곤의 영역? 갑갑할 것 같아서 싫은데?”
“그럼 나도 너와 함께 세상을 여행해볼까?”
“그것도 좋겠네. 하지만 힘들지 않을까?”
“왜?”
“넌 세상을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태야 할 거 아니야? 게다가…….”
“게다가?”
“너랑 있으면 잔소리가 계속될 것 같거든. 그러니 속 편하게 혼자…….”
쩍-!
리시나스가 그대로 팔꿈치로 카일의 관자놀이를 찍어 버렸다.
“뭐야? 뭐야? 리시나스, 설마 지금 술주정 부린 거야?”
카일과 춤을 추기 위해 왔던 루나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술주정?”
“응. 카일이 그랬어. 넌 술만 먹으면 포악해진다고. 난 안 믿었는데 사실이었구나?”
“내 말 맞지?”
“응.”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얼굴을 구긴 카일의 말에 루나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시나스가 빙긋 웃었다.
“카일.”
“응? 컥-!”
그리고 냅다 드롭킥을 카일의 명치에 작렬시켰다.
“그냥 죽어. 이 망할 자식아!”
쓰러진 카일을 마구 짓밟으며 으르렁거리는 흑룡의 모습은 흉포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나가 팔짱을 끼며 음! 음! 고개를 끄덕였다.
“포악해. 포악해.”
리시나스는 그런 루나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어느새 리시나스와 루나는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르온이 술을 홀짝였다.
“쟤들은 왜 또 싸우는 걸까?”
“내버려 두게. 아무래도 셋 다 저쪽으로는 둔감한 바보들이니 어쩔 수가 있나?”
“저쪽?”
“이런 넷이었구먼.”
쯧쯧- 혀를 차는 드웨노에게 카일이 다가왔다.
“아오, 진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보기에 자네는 맞아도 싸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드웨노는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듯 카일을 보았다.
***
“…….”
그때 일을 떠올리며 레오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적이 제법 많았다.
그때마다 드웨노는 참으로 한심하다는 듯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곤 했다.
‘아니. 역시 억울해. 그럴 거면 직접 말하던가?’
“레오 학생.”
“예. 세드젠 교수님.”
“내 전투학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세드젠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세드젠은 지금 연병장에서 전투학 수업을 열정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10개의 반 모두가 모인 합동 수업.
그 합동 수업에서 대표 교수로 뽑힌 게 바로 세드젠.
중간고사를 앞둔 시점이라 모든 학생이 수업에 집중했지만, 레오만큼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요.”
“호오? 그렇다면 방금 전 내가 설명한 5인 파티 리더로서 파티 구성과 역할군 설정에 관해 설명해보도록.”
“리더가 어떤 클래스이냐에 따라 구성이 달라집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올 클래스이니 어떤 역할군도 소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니…….”
레오는 어렵지 않게 내용을 설명했다.
그걸 모두 들은 세드젠 교수는 손수건을 꺼내 물어뜯었다.
“크으-! 얄미워! 하지만 너무 엘레강스해! 그래서 더 얄미워!”
“교수님. 속마음으로 하실 말씀도 같이 입 밖으로 꺼내신 것 같은데요.”
“크오오오오오!”
1학년 학생 중 교수에게 이만큼 서슴없는 학생은 레오가 유일했다.
심지어 할린드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학생이니만큼 1학년들 사이에서는 이런 레오의 행동이 익숙했다.
잠시 후 수업 진행이 계속되었다.
“이론 수업은 이걸로 끝내도록 하고. 오늘은 합동 수업인 만큼 바스테라를 하겠다.”
바스테라, 전투학 전통의 스포츠.
반별로 팀을 짠 적은 있어도 반을 섞어서 팀을 짠 적은 없었기에 모두가 눈을 반짝였다.
“다른 반끼리 팀이라니. 재미있겠는데?”
“평소에 생각해뒀던 팀을 짤 수 있겠어!”
학생들이 유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역시나 성적 상위권자들이었다.
특히 레오에 대한 인기가 열렬했다.
“레오! 우리 같은 팀 짜자!”
“아니! 나랑 짜!”
“너희는 앞 라인 다 있네. 그럼 레오가 필요 없잖아?”
“웃기지마! 레오는 올 클래스라고! 어떤 포지션이든 소화 가능하거든?”
티격태격하는 다른 반 학생들을 보며 레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통- 통-
바스테라 전용구를 바닥에 튕기며 첼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 며칠간 레오 오빠가 조금 이상한데?”
“레오 도령이 뭐가 이상해요?”
“깜짝이야!”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첸 시아를 보며 첼시가 기겁했다.
1학년 중 가장 체구가 작은 두 여학생이 같이 있자 의외로 눈에 띄었다.
“첸 시아, 웬일로 여기 왔냐?”
칼의 물음에 첸 시아가 빙긋 웃었다.
“레오 도령이랑 같이 팀을 짤까 하고요. 그나저나 요 며칠간 레오 도령이 이상했어요?”
“좀 넋을 놓고 있긴 하지.”
“맞아. 반장은 언제나 빈틈이 없는데 요즘은 빈틈이 보인달까?”
테이드가 팔짱을 끼고 다가왔고 일리아나도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와 팀을 짜기 위해 다가오던 셀리아와 클로에도 그 말을 듣고 대화에 참여했다.
“나도 최근 느꼈어. 수업 중에 지적을 받다니.”
셀리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레오를 보았다.
“고민이 있는 걸까?”
클로에는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몰라! 어쨌든 지금이 기회야! 첼시! 공 줘 봐!”
일리아나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반장 머리에 공 맞춰 보겠어!”
키득키득 웃은 일리아나가 살금- 살금 – 레오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팀 참가 요청에 정신없는 레오의 뒤통수를 향해 냅다 공을 던졌다.
텁-!
레오는 일리아나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고 한 손으로 공을 낚아챘다.
그리고 역시나 시선도 돌리지 않고 공을 정확하게 일리아나의 안면에 명중시켰다.
“푸헙?!”
“저 바보.”
“아무리 넋 놓고 있어도 그런 거에 당하겠냐?”
공 자국으로 얼굴이 빨개져 돌아온 일리아나를 칼과 테이드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첼시! 쟤들이 나보고 바보래!”
일리아나가 울상을 지으며 첼시에게 매달렸다.
“바보 맞잖아.”
“너무해!”
일리아나가 서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5반 분들은 언제나 재미있네요.”
방긋 웃은 첸 시아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정말 왜 저럴까요?”
“뭐, 우리 나이 때 소년이면 뻔하지.”
칼이 팔짱을 끼며 음-! 음-!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 오빠랑 칼을 똑같은 레벨로 생각하긴 싫지만…… 한번 말해보도록.”
“여자야.”
그 말에 첼시, 클로에, 첸 시아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셀리아는 팔짱을 꼈다.
“쟤가 그런 문제로 넋을 놓을 것 같지는 않은데?”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여자가 어찌 이해하겠어?”
“잘난 척하는 게 묘하게 때리고 싶네.”
우쭐하는 칼을 보며 셀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저 녀석이라면 왠지 연상이랑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어른스럽잖아. 최근 엘레나 선배랑도 어울리는 것 같고.”
테이드가 이야기에 끼어들자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그런 의미에서…….”
슥- 참으로 딱하다는 듯 첼시를 보며 칼이 고개를 저었다.
“어린애 같은 넌 가망이 없…… 쿠헉!”
첼시는 칼의 옆구리에 망설임 없이 날아차기를 꽂아 버렸다.
그렇게 소란스럽게 팀을 정할 때였다.
“참고로.”
세드젠 교수가 입을 열었다.
“오늘이 바로 전투학 중간고사 실기 시험이다.”
일순간 1학년 전체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네에?”
“자, 잠깐만요! 교수님! 갑자기 실기 시험이라뇨!”
뜬금없는 말에 1학년 전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시험 기간인 만큼 실기 시험이 진행 되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벌어지는 이런 돌발 상태에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학생들을 아끼고 친절한 미소를 짓는 세드젠은 당황하는 학생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희들은 루메른이다. 1학년 제군들.”
세드젠이 팔짱을 꼈다.
“영웅을 목표로 하는 자라면 언제 어디서든 돌발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법 아닌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압도적인 포스의 세드젠을 보며 1학년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보며 워레든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상대는 같은 1학년들인가요?”
“후. 워레든 학생. 자네는 역시 상당히 엘레강스하군.”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려는 워레든의 태도에 세드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에게 한 가지 알려 줄 게 있다. 이번 중간고사는 필기시험을 제외한 모든 것이 ‘상대 평가’ 로 이루어진다.”
세드젠이 팔짱을 꼈다.
“1학년 1학기까지는 절대 평가 항목이 많았던 것과 반대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그 말에 학생들이 머뭇거릴 때 셀리아가 손을 들었다.
“대답해보도록, 셀리아 학생.”
“어중간한 실력자들은 이미 다 떨어져 나갔으니까 그런 거 아닌가요?”
“엘레강스.”
세드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1학기에서 자퇴 권고를 받은 학생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1학기까지는 영웅의 재목을 ‘걸러내는’ 과정이었지. 다들 느꼈을 테지? 1학기와는 완전히 달라진 자신을. 입학생 중 잠재력이 큰 학생들만 남았다는 뜻일세.”
그 말에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1학기에는 성장 가능성이 있는 학생을 뽑았다면 2학기는 잠재력의 가치를 평가한다.”
“잠재력의 평가는 어떻게 합니까?”
이번에는 듀란이 물었다.
그 물음에 세드젠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잠재력은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 드러나게 되지.”
모두가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루메른의 학생이라면…… 영웅을 꿈꾸는 자라면 ‘한계를 넘어’ 설 수 있어야 하니까.”
교수들 사이에서 학교 교훈이 나오면 엄청난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너희의 바스테라 상대는 같은 1학년이 아니다.”
“그렇다면?”
삐익-!
세드젠이 가볍게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와 함께 연병장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1학년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하. 서, 설마.”
“에이. 아닐 거야. 그냥 참관이겠지?”
어색하게 웃으며 부정했다.
그런 이들에게 세드젠은 냉혹하게 현실을 들이밀었다.
“너희의 상대는 바로 ‘5학년’ 이다.”
그 말에 1학년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선두에 선 리스는 후배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