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세이룬의 교정 내부 분위기는 어두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이는 민간인.
영웅을 선망하는 그들의 무용담에 가슴은 떨리지만, 영웅은 아니었다.
더더욱 영웅 후보생들조차 아니었다.
타르타로스의 군단장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야기 속에서나 접할 수 있는 머나먼 존재였다.
그런 이들에게 세이룬으로 타르타로스의 군단장이 쳐들어왔다는 말은 커다란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워프 게이트는 아직인가!”
“어서 빨리 이곳에서 탈출하게 해 줘!”
“젠장! 이번 루세전을 관람하러 오는 게 아니었어!”
여기저기서 패닉에 빠져 소란을 피우는 이들.
“위대한 성운의 시조시여, 악을 물리치고 우리를 구해주소서.”
“우리의 적과 싸우는 영웅들을 보살펴주소서.”
혹은 조용히 대영웅에게 기도하는 자들.
숨죽이며 바깥의 소리에 주목하는 이들.
“영웅님들께서 알아서 해주실 거야!”
“맞아요! 맞아요!”
아이들은 주먹을 꼭 쥐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런 가운데 루니아는 워프 게이트를 발동시켜달라고 소란을 피우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진정해주세요, 여러분 덕분에 많은 이들이 불안해하고 있잖아요!”
“넌 뭐야?”
“세이룬의 1학년 대표 루니아 엘 룬드아입니다.”
루니아는 강경한 목소리로 인간을 향해 말했다.
그런 루니아를 보며 인간 관람객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세이룬의 1학년 대표라고? 그럼 너 굉장한 실력자일 거 아니야?”
“굉장한 실력자는 아닙니다. 부족한지만 가까스로 1학년 대표 자리를 유지할 뿐이죠.”
“그딴 건 관심 없어! 너도 영웅 후보생이라면 이런 안전한 곳에서 우리와 있지 말고 나가서 싸우란 말이야!”
인간 귀족으로 보이는 그는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며 루니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1, 2학년의 임무는 교정 내의 사람들을 지키는 거예요.”
“흥! 무서워서 꼬랑지를 내린 건 아니고? 영웅 후보생이라고 한껏 떠드는 주제에 뭐야? 우리랑 수준이 똑같다는 거냐?”
킬킬킬 웃으며 조롱을 내뱉는 그를 보며 루니아가 얼굴을 구겼다.
‘박살 낼까?’
“어쭈? 얼굴 보니까 한 대 치겠다? 쳐봐. 쳐봐. 난 루메른의 특별 귀빈으로 이번 루세전을 관람했다! 세이룬의 학년 대표가 위기 상황에서 날 폭행했다고 까발려 줄 테니 한 번 쳐…….”
뻐억-!
루니아가 망설임 주먹질을 하려 할 때였다.
뒤에서 뻗어 나온 주먹이 그의 안면을 함몰시켰다.
허공에 몸이 붕 뜬 그 남자는 이제 처참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털썩!
“케헤에에에엑!”
얼굴을 감싸 쥐고 비명을 내지르는 인간 귀족을 보며 루니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루니아를 향해 주먹을 내지른 듀란이 말했다.
“놈은 루메른 측 손님이다. 네가 함부로 건드린다면 외교 문제로 귀찮아지겠지.”
듀란은 불쾌하다는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더니 옆으로 손을 뻗었다.
“손수건을 빌려줬으면 하는 군, 일리아나 라덴.”
“이봐요, 난 당신 시녀가 아니거든?”
듀란과 함께 있던 일리아나가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순순히 손수건을 빌려주었다.
듀란은 그걸 닦고 얼굴을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자에게 던졌다.
“앗! 야! 왜 멋대로 버리는 거야? 그거 비싼 거란 말이야!”
일리아나가 항의하자 듀란이 코웃음을 쳤다.
“잊어라. 저런 천박한 것의 피를 닦은 손수건을 다시 가져가 봤자 품위만 떨어질 뿐이니까. 더 좋은 걸로 사주지.”
“어머. 왕자님이라 역시 뭔가 다른 걸?”
일리아나가 아싸~하고 좋아하며 웃었다.
“아니, 당신네들 손님이면 댁들도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루니아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자 일리아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래라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듀란이니까 괜찮아.”
루니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이익! 네놈! 루메른 학생이지? 학년과 이름을 밝혀라! 당장 이사회에 고발해서……! 아니! 고발까지 갈 필요 없다! 우리 가문의 힘으로…….”
“듀란 모이라다. 이거면 답변이 됐나?”
“헉!”
흥분에서 소리치던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듀란은 단순히 학년 탑의 성적을 지닌 학생이 아니다.
중앙 대륙 모이라 왕국의 왕자.
거기에 왕위 계승이 유력한 왕세자에 가까운 인물.
비록 모이라 왕국은 공국에 불과하지만, 그 명성은 어지간한 대국에 못지않다.
기사 왕국이라 불리는 만큼 명성 높은 기사들이 모이라의 깃발 아래 모여 있다.
모이라의 군대는 수천으로 이루어진 기사단.
아무리 규모가 작다고 하여도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그런 만큼 아무리 루메른의 귀빈이라도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의 학생이었다.
“듀란 왕자님! 결례를 범했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자 듀란이 싸늘하게 웃었다.
“결례를 범했으면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 그런!”
“그 잘난 가문의 이름을 말해보도록.”
“듀란 왕자님! 제발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보며 루니아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기고만장하던 인간이 자신보다 까마득하게 어린 소년에게 무릎을 꿇다니.
‘인간들의 권력은 이해가 안 되네.’
엘프로서 이런 모습은 굉장히 신기한 루니아였다.
그런 가운데 일리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에 말대로 순찰 돌기를 잘했네.”
너무도 많은 루세전 관중들이 한꺼번에 세이룬의 교정으로 들어온 상황이었기에 1, 2학년들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분란을 만드는 이가 없는지 듀란과 일리아나는 순찰을 돌고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상황이 마무리되자 루니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에 듀란이 코웃음을 쳤다.
“종족을 망신시키는 놈을 입 닥치게 했을 뿐이다. 감사는 필요 없다.”
그 반응에 루니아가 일리아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사람 원래 이렇게 새침해요?”
“응. 그래서 가끔 보면 귀엽…… 아야야야야야!”
“여기서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다음 장소로 가지.”
“이, 이거 놓고…… 아파! 아파!”
귀를 잡혀 허우적거리는 일리아나를 끌고 듀란이 다음 장소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리던 루니아가 자리에 앉았다.
‘바깥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으려나?’
루니아의 손이 살짝 떨렸다.
1학년치고는 많은 일을 겪은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번 일은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깥에 많은 선생님이.
친하게 지냈던 선배들이.
그리고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영웅과 영웅 후보생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섭고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영웅이라고 완전무결한 존재는 아니니까.’
루니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 완결무결하다고 칭송받는 루나조차도 약한 면모가 있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말하는 완벽한 영웅은 없다.
영웅도 겁에 질리고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짊어진 것들을 위해 용기를 내는 것이리라.
‘레오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어떤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친구를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궁-!
세이룬의 학교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고성의 형태를 한 세이룬 전체가 흔들리자 관중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니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였다.
“루니아! 사람들을 학교 깊숙한 곳으로 대피시켜!”
“무슨 일이죠?”
세이룬 2학년 선배의 말에 루니아가 다급히 물었다.
그런 루니아를 보며 세이룬 2학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또 다른 군단이 쳐들어왔어!”
***
영웅 연합이 이변을 눈치챈 건 리벤이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1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저게 대체 뭐야?”
“구멍?”
“저런 게 언제 생긴 거야?”
하늘에 뚫린 시커먼 구멍에 영웅 연합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게 대체 뭐지? 엄청 불길하게 생겼는데?”
하르크가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그러게요, 마치…….”
옆에서 마법을 난사하고 있던 엘레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괴물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네요.”
그때였다.
콰득-!
마치 하늘에 난 구멍을 찢기라도 하듯.
기형적으로 생긴 기다란 팔이 뻗어 나오더니 하늘의 구멍을 미친 듯이 넓히기 시작했다.
마치 땅을 파기라도 하듯.
게걸스럽게 파헤쳐진 구멍은 이내 기괴하게 생긴 괴물의 상체를 내뱉었다.
그걸 본 영웅 연합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 저게 뭐야!”
“기운을 본다면 마족 같은데?”
“그것도 그냥 마족이 아니야! 군단장급의 마력을 지닌 괴물이라고!”
또 다른 군단장의 등장에 영웅 연합은 패닉에 빠졌다.
그 군단장의 상체는 단단한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그 모습만 본다면 드래곤을 연상시켰다.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드래곤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드래곤의 뭉툭하고 짧은 다리가 아닌 기형 형태의 비늘이 덮인 기다란 팔.
거기에 마치 곱추를 연상시키기는 했지만 사람 형태의 상체를 지니고 있었다.
입에서 드러난 송곳니는 무엇이든 씹어 부술 것처럼 날카롭고 무자비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거대한 용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외형.
하지만 무엇보다도 영웅 연합을 공포로 물들인 건…….
“저런 군단장이…… 있었던가?”
엘프 영웅 한 사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랬다.
눈앞의 군단장은 말 그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군단장이었다.
키아아아아아아아악!
입을 벌린 군단장, 제르디악이 포효를 내질렀다.
입을 쩍-! 벌린 제르디악이 세드젠이 만들어낸 성벽을 향해 보라색 브레스를 내뿜었다.
키이이잉!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엄청난 속도로 날아든 브레스는 세드젠의 성벽 한 축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실라투나의 군단을 증발시켜 버렸다.
그걸 본 실라투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아? 과연 온전한 상태로 현세로 넘어 온 건 아니군.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건 이런 뜻이었나?’
동포를 마중 나가려 했던 헬 카이저는 계획이 어긋났다며 세이룬의 침공하는 걸 실라투나에게 맡겼다.
그 이유가 아무래도 제르디악이 본능만 남은 파괴의 괴물인 상태로 현세로 넘어올 것이란 사실을 헬 카이저는 예상을 한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지.’
과거의 동포가 파괴의 본능만 남은 괴물이든 아니든.
어찌 되었든 제르디악은 군단장.
그 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멍청하면 오히려 다루기 쉬운 거 아닌가?’
실라투나는 눈을 빛냈다.
‘그나저나 정말로 성공하다니.’
이것이 바로 헬 카이저의 계획이었다.
대영웅의 히어로 레코드에 기록된 과거의 군단장을 불러오는 것.
‘증오스러운 신들의 유산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날이 올 줄이야.’
실라투나의 눈에 희열이 떠올랐다.
‘이것으로 이 증오스러운 세계를 불태울 수 있어.’
실라투나의 몸이 떨렸다.
‘신께서 우리에게 준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됐어!’
세상은 불탈 것이다.
지상의 생명체들은 절망에 빠질 것이다.
비록 신은 아직 잠들어 있지만 머지않을 것이다.
5000년 전.
그립고 그립던 그 시절로 돌아갈 날이.
그때의 풍경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실라투나는 확신했다.
“공포에 떨어라 버러지들아! 루메른과 세이룬은 멸망하게 될 것이고 세상은 다시 어둠으로 물들게 될 거다!”
기워어어어어어어어!
실라투나의 말에 동의하듯 제르디악 역시 포효를 내질렀다.
앞에도 군단장.
뒤에도 군단장이라는 절망스러운 상황.
영웅 연합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울 때였다.
“베네트.”
칼리안이 덤덤히 베네트를 불렀다.
“자네가 알비, 엘런, 체이드군을 이끌고 저 군단장을 막아주게.”
“뭐라?”
세이룬의 교장 베네트가 얼굴을 굳히며 칼리안을 바라보았다.
“자네와 리벤은?”
“우리는 마물 여왕을 막겠네.”
스윽-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알비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항명은 듣지 않겠네. 이건 명령일세.”
칼리안이 빙그레 웃었다.
“지금 우리 세계의 가장 큰 희망은 어린 새싹들일세. 알비군.”
터벅- 터벅-
칼리안이 실라투나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 자신의 시대를 맞이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시대를 넘길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지.”
칼리안의 검이 실라투나에게 향했다.
“이건 시대를 짊어진 사람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네. 그러니 내 걱정은 말고 가게나.”
“교장 선생님.”
체이드가 이를 악물었다.
“가자.”
알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자 체이드가 큭-! 신음성을 내뱉으며 전장을 이탈했다.
엘런 역시 고개를 숙이고 이탈했으며 마지막으로 베네트가 말했다.
“부탁하네, 검성.”
그들이 전선을 이탈하자 실라투나가 혀를 찼다.
“아아, 결국 너희 둘만 남게 되었네. 상대하는 게 결국에는 다 늙어빠진 인간과 용이라니. 시시해라.”
실라투나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에 네 입으로 말했지. 검성, 나를 막는 건 시대를 짊어진 자로서 의무라고. 그래, 맞아. 나는 시대를 짊어진 수많은 영웅을 봐 왔어. 너희들이 말하는 위대한 선대들이지. 그래서 장담할 수 있어.”
마물 여왕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너는 내가 아는 시대를 짊어졌던 영웅 중 가장 형편없는 영웅이야.”
“칭찬으로 듣겠네.”
“끝까지 빈정거리는구나.”
고오오오오오-!
마물 여왕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흑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예의는 차려 줄게. 죽음을 각오한 영웅이 제일 성가시니까.”
뿌득- 뿌드득-
실라투나의 모습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네놈의 최후를 가장 처참하게 짓밟아주마.]
쿠구구궁-!
흉포한 본 모습을 드러낸 실라투나를 올려다보며 칼리안은 웃었다.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눈 앞에 넘을 수 없는 절망을 조우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짊어진 검성은 웃었다.
‘불가능에 도전을 하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