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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를 한껏 치켜세워주는 렌을 보며 부교수 안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방학 동안의 눈물겨운 분투기가 떠오른 것이다.
안나는 아공간을 열어 렌이 쓴 논문을 꺼냈다.
아직 학계에 발표되지 않은 렌의 최신 논문이다.
사실 렌의 밑에서 부교수 생활을 하는 건 몹시 힘든 일이었다.
‘정말이지 뼈 빠지게 부려 먹으시니까.’
그것뿐이면 다행이다.
가끔 마법과 관련될 때면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폭주한다.
안나 역시 몇 번이고 부교수직을 때려치우고 싶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여전히 렌의 부교수를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사람이 천재이기 때문이야.’
그 누구보다 마법에 열정적이며 재능이 깊다.
마법 이론학과 관련된 그의 발상력과 응용력은 가히 마법 이론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혀를 내두르게 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그의 마법 이론학은 단순히 이론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 이론을 끝없이 연구하며 마법의 발전을 계속해서 앞당기고 있다.
그는 이미 학계를 몇 번이나 뒤바꾼 위대한 이론 마법사였다.
이번 겨울 방학 동안 그가 저술한 [별의 마법 입문서] 역시 그러했다.
렌의 이번 논문은 단순히 마법 학계의 판도를 바꾸는 게 아니라 역사를 뒤흔들 만큼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논문이었다.
이 논문 저술을 돕는 과정에서 안나는 별의 마법에 입문했다.
그녀 역시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별의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체질은 아니었다.
물론 별의 마법에 입문했다고 해도 엘프들과 동등한 수준의 별의 마법을 구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별의 마법에 입문한 것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의 가지 수는 엄청나게 늘어난다.
마법사에게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의 숫자는 실력을 판가름하는 척도 중 하나였다.
‘이런 사람이니까 이 사람 곁을 떠날 수 없는 거야.’
안나에게 있어 렌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마법사였다.
탐구는 마법사의 본질.
그렇기에 뼛속까지 마법사인 안나에게 렌은 존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들! 이 위대한 논문의 공동 저자인 레오 플로브를 박수를 보내주길 바란다!”
‘……저 발작병을 볼 때면 진짜 부교수 직을 때려치우고 싶어져!’
안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공동 저자라니.
물론 이번 논문은 레오의 아이디어가 없었으면 쓰는 게 불가능했을 논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전에 레오나 자신에게 말도 없이 공동 저자로 발표하다니.
‘언질이라도 줘야 할 거 아니야!’
렌에 의해 강제로 강의실 앞으로 끌려 나온 레오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안나를 보았다.
지난 1년 동안 렌의 수업을 들어 온 레오다.
렌이 가끔씩 마법과 관련되면 폭주를 한다는 사실은 레오를 포함한 다른 학생들도 잘 안다.
이제는 렌이 폭주할 때면 자연스럽게 안나를 찾게 되었다.
“렌 교수님께서 자신이 쓴 논문의 공동 저자로 레오 학생의 이름을 올린 모양이에요.”
“대체 왜요?”
“이 논문을 쓰는데 레오 학생의 고유마법 바이블 술식의 도움이 컸으니까요. 사실 마법 이론의 뼈대는 레오 학생의 고유마법이에요.”
파라라락-
안나는 두꺼운 논문을 파라락 넘겨 맨 마지막 저자의 이름이 쓰인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논문 공동 저자의 이름에 레오의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 응? 내 이름은 또 왜 있는 거야?’
안나는 공동 논문 저자로 자신의 이름까지 올라가 있는 걸 발견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요, 교수님. 공동 저자에 제 이름은 왜 올라가 있나요?”
“당연한 거 아닌가? 안나 부교수. 자네가 없었다면 이 논문을 완성 시키기 힘들었을 거야. 나를 보좌해주고 자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마법 이론 완성에 큰 도움이 되었지.”
렌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오 학생의 마법 술식과 자네의 아이디어를 엮어 이 논문이 완성되었으니 우리 세 사람의 공동 논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렌의 말을 듣고 레오는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이블의 술식을 차용한 모양이군.’
세상의 모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레오의 고유마법 체계.
물론 마법 체계를 이해한다고 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아니다.
바이블 자체가 레오가 가진 순수라는 마나 특성이 있어야 발동되는 마법 체계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 발동시킬 수 없어도 술식을 응용해서 다른 결과물을 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레오는 작년에 마법 학계에 자신의 마법을 등록할 때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마법 특허 신청을 하지 않았다.
특허를 신청했다면 신청된 술식을 이용한 파생 연구가 진행될 때마다 인센티브를 받을 권리를 주는데 그걸 포기한 셈이다.
연구를 통해 마법 발전에 도움이 되면 좋다고 생각했고 또 이 술식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몇이나 될까? 라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렌은 보란 듯이 레오의 술식을 응용해 새로운 마법 이론을 만들어냈다.
‘이 사람도 천재는 천재야.’
레오가 감탄하는 사이.
안나는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저의 보잘것없는 도움을 그렇게 높이 평가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자네의 도움은 절대 보잘것없지 않아. 난 자네가 내 부교수인 게 자랑스럽네.”
렌은 환하게 웃으며 안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니 논문 발표 이후 학회 참석은 공동 저자인 자네가 도맡게. 난 마법 연구와 수업 때문에 바쁘고 레오 학생은 학생 신분이니 학회에 참석해서 논문에 대해 토론할 사람은 자네뿐이야.”
우지직-!
순간 안나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잠깐만요. 그걸 왜 제가 해야 해요? 논문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저자인 렌 교수님이잖아요.”
“후후. 겸손하군. 안나 부교수. 자네 역시 이 논문을 잘 이해하고 있지 않나?”
“당신! 솔직히 말해! 귀찮은 일 나한테 다 떠넘기려고 날 공동저자로 넣었지?! 그런 거지?!”
“슬프군. 내 고마움을 그렇게 받아들이다니 말이야.”
“그럼 당장 저자에서 제 이름을 빼 주세요!”
“거절한다.”
“귀찮은 일 떠넘기려고 날 공동 저자로 넣은 거 맞잖아!”
이성이 마비된 안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렌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었다.
“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빨리 말려!”
클로에가 다급히 소리치며 대강의실 앞으로 나왔다.
“안나 부교수님! 그만 하세요.”
“진정하세요. 부교수님.”
따라 나온 첼시도 클로에와 함께 안나의 양팔을 붙잡고 렌에게서 안나를 떼어냈다.
“이거 놔요! 오늘 저 작자랑 끝장을 볼 테니까! 오늘로 부교수직을 때려치울 거예요!”
“하하하. 부교수직을 그만둔다고 해도 학회에는 참석해주게. 자네는 이 논문의 공동 저자니까.”
“캬아아아악!”
눈이 돌아간 안나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결국 주문까지 외우려 들자 여학생들이 기겁하며 안나의 입을 틀어막고 대강의실에서 끌고 나갔다.
“……대체 학회 참석이 뭐라고 저렇게 분노하시는 거야? 엄청 영광스러운 일 아니야?”
칼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아바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학회 참석이 문제라기보다는 논문의 내용이 문제지.”
“뭐?”
“학회 참석은 네 말처럼 영광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이번에 렌 교수님이 만든 마법 이론은 엘프 이외의 종족도 누구나 별의 마법을 익힐 수 있는 혁신적인 마법 이론이야.”
“그런 이론을 발표하면 더욱 큰 영광 아니야? 마법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 건데.”
“그렇기는 한데…… 보수적인 엘프 마법사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까?”
“아…….”
아바드의 말을 들은 칼은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 학회는 각 종족을 대표하는 저명한 마법사들이 참석하여 마법을 주제로 토론하는 곳이다.
학회에서 엘프 마법사들은 특히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걸로 유명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
성운의 시조의 마법을 익힐 수 있는 특별한 종족이라는 특권 의식을 대다수 엘프가 가지고 있다.
엘프들이 스스로를 마법의 종족이라 칭하는 이유 역시 시조의 마법이 엘프에게 최적화된 마법이기 때문이다.
렌의 마법 이론은 그런 엘프의 자부심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위대하고 대단한 마법 이론이라고 해도 마법계에 정착하기까지는 큰 진통과 난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학회 발표를 공동 저자라는 명목하에 모두 안나에게 떠넘겨 버린 것이다.
학회에 가게 되면 분노한 엘프 원로 마법사들에게 넝마가 될 정도로 물어뜯길 게 불 보듯 뻔한 일.
“안나 부교수님이 눈이 돌아가실 만도 하네.”
칼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는 사이 레오는 안나가 내던진 논문을 주웠다.
그리고 파라락- 넘기며 논문 내용을 확인했다.
‘확실히 엄청나네.’
렌이 고안해낸 마법 이론과 술식은 레오로서도 감탄이 나올만한 것들이었다.
‘내 술식을 이렇게 응용했군.’
호오- 감탄사를 터트릴 때였다.
뚜벅- 뚜벅-
“어떤가, 레오 학생.”
“정말 대단한데요? 그런데 제가 공동 저자일 필요가 있을까요?”
“후후. 자네의 아이디어에서 발생 된 마법 논문이네. 자네가 기본 골자를 만든 것이니 공동 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리고 이만한 위업을 이루게 되면 역사는 레오 플로브를 위대한 마법사로 기억하게 되겠지!’
기사와 소환사로서의 레오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렌은 레오가 오러와 소환술을 쓸 줄 아는 위대한 마법사이기를 원했다.
‘후후후. 아둔한 선배님들. 이제 혈통이라던가 피닉스의 계약자라던가. 그런 쓸데없는 수식으로 레오 학생을 기사학과와 소환학과로 부를 수는 없을 겁니다!’
아인과 유라를 떠올리며 렌이 음험하게 웃었다.
‘그리고 감히 레오 학생을 세이룬으로 전학시키려는 귀쟁이 녀석들에게도 알릴 수 있지! 레오 플로브는 루메른의 마법학과 학생이라는 것을!’
콰앙-!
“렌 호르스으으으으!”
“야! 야! 안나 부교수님 말려!”
여학생들에게 붙잡혀 대강의실을 바깥으로 나갔던 안나가 문을 박차고 다시 대강의실에 들어왔다.
학생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나를 막으려고 했다.
‘수업은 그른 것 같네.’
레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첫 수업부터 개판이군.’
***
“끄아! 끝이다.”
“그나저나 대단했어! 렌 교수님은 괴짜이기는 하지만 역시 마법 실력만큼은 진짜 존경심을 거둘 수 없다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지?”
“그나저나 안나 부교수님 괜찮을까? 거의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계시던데.”
“……마법 학회에 나올 정도의 엘프 마법사들에게 집중 공격받는다고 생각하니…… 으으! 생각만 해도 토 나온다.”
마법 수업이 끝나고 마법학과 학생들이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새로운 마법 이론을 배운다는 흥분감에 빠진 학생들은 열띤 토론을 하기 바빴다.
“너 진짜 대단하긴 하다.”
칼은 클로에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첫 수업부터 별의 마법에 입문 하냐?”
“별의 마법은 원래부터 연구하고 있었으니까. 렌 교수님의 이론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어.”
클로에는 첫 수업에 바로 자체적으로 별의 마법을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
렌은 그런 클로에를 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클로에는 레오에 이어 2학년 중 두 번째로 별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학과생이 되었다.
“아바드와 첼시는 감을 못 잡던데.”
“그 두 사람은 혈족 마법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그래도 금방 익힐걸?”
“그나저나 점심은 뭘 먹지?”
“나랑 먹지 않을래요?”
클로에와 칼이 점심에 대해 고민할 때였다.
불쑥-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함께 걷던 레오는 느닷없이 등장한 인물에 멈칫했다.
은발에 안대를 한 아름다운 여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1학년 마법 이론 담당 교수님인 멜 교수님이시죠?”
학교 소식에 능통한 칼은 멜을 알아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네. 칼 학생. 만나서 반가워요.”
“오! 절 아시나요?”
“네, 재간둥이로 유명하잖아요?”
“재간둥이…… 하하.”
칼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 학생, 클로에 학생, 칼 학생.”
멜이 빙긋 웃었다.
“세 사람을 점심에 초대하고 싶은데요.”
칼과 클로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레오는 그 초대에 응했다.
그러자 클로에와 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