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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둑- 툭- 솨아아아아아-!
추적- 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 곳곳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 소녀가 걷고 있었다.
차가운 봄비가 땅을 씻겨 내려갔다.
뚝- 뚝-
그녀의 몸에서 붉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커헉- 쿨럭!”
시커먼 옷을 뒤집어쓴 자가 피를 토하고 있었다.
유일한 생존자인 그를 내려다보며 첸 시아가 말했다.
“당신들을 타르타로스와 내통한 죄로 처단합니다.”
“크흐흐- 지독하군.”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남자는 조소를 내뱉었다.
“네놈 그림자들과 우리가 다른 게 무엇이지 궁금할 지경이야. 어린 소녀가 이 정도로 잔악하다니.”
“최소한 우린 자신의 탐욕을 위해 세계를 배신하진 않아요.”
“잘난 척 떠들긴! 그래 봤자 네놈들은 신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낙오자들일 뿐이다.”
남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서걱-!
그때 첸 시아의 뒤편에서 날아든 은빛 섬광이 남자의 목을 베어 버렸다.
푸확-!
피가 튀었다.
빗물에 의해 씻겨나가던 첸 시아의 몸이 다시 피로 물들었다.
첸 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황녀 전하. 사악한 무리의 헛된 말에 귀를 더럽히지 마옵소서.”
“네.”
덤덤히 대답한 첸 시아가 몸을 돌렸다.
이 마을에 숨어든 배신자들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다른 그림자들이 확인 사살을 하듯 시체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첸 시아는 깊은숨을 내뱉었다.
‘동급생들이 봤다면 눈살을 찌푸렸을지도 모르겠네.’
타르타로스의 흑마법에 의해 어떤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림자에게 있어 이 정도 확인 사살은 당연한 것.
하지만 고결한 행위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첸 시아에게는 이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풍경이다.
지난 1년 동안 그저 다른 세상에 가 있을 뿐이었다.
터벅- 터벅-
첸 시아가 걸음을 옮겼다.
첸 시아를 포함한 이들은 샨 제국의 그림자들이었다.
샨 제국.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방의 강대국.
그런 샨 제국에는 하나의 이명이 있었으니 바로 그림자의 나라였다.
대영웅들이 세상을 구원하고.
영웅의 시대가 열렸다.
재앙의 시대가 끝이 나고 2000년이 흐른 후.
재앙이 재림하고 히어로 레코드의 힘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에는 세계의 정세를 주도하는 건 영웅들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영웅을 선망하고 동경했다.
영웅들이 이룩한 위업을 칭송하며 자신 역시 영웅이 되기를 꿈꿔 왔다.
영웅 사관 학교가 설립되고 수많은 영웅 명가가 탄생했으며 영웅이 건국한 나라가 탄생했다.
많은 나라에서 영웅을 탄생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샨 제국은 아니었지만.’
샨 제국은 영웅을 육성하지 않았다.
영웅이 탄생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샨은 그림자를 더욱 중요시 여겼다.
‘이 나라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아니, 영웅의 시대 이전부터 우리는 싸워 왔으니까.’
샨의 공식적인 건국 시기는 4000년 전이지만 샨의 그림자들이 존재해 왔던 건 5000년 이전.
재앙의 시대부터였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세계를 수호해 왔다.
‘그 누구보다 고결하고…… 그 누구보다 추악한 자들.’
터벅- 터벅-
철저하게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했기에 그림자들은 자신들만의 정의를 관철한다.
첸 시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골목에서 숨어 있던 어린 남매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차가운 봄비 때문인지 남매는 덜덜 떨고 있었다.
처벅- 처벅-
“괜찮니?”
첸 시아의 물음에 남매가 서로를 더욱 껴안았다.
“많이 춥지? 누나랑 같이 가…….”
“히익!”
첸 시아가 아이들을 돕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남자아이가 여동생을 껴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비명 소리에 첸 시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머뭇거리던 첸 시아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겁을 먹게 한 모양이구나.”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무서운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여기에 있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렴. 여기에 있으면 감기에 걸려.”
그렇게 말하고 첸 시아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오빠, 예쁜 언니가 우리 도와준…….”
“쉿! 얼른 따라와. 저 사람은 마녀야!”
소년이 동생의 입을 막고는 다급히 골목 깊숙한 곳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봤구나. 내가 사냥하는 걸.’
첸 시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같은 깨끗한 손이다.
하지만 불과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피로 흥건했던 손이다.
익숙했다.
타인을 죽이는 건.
익숙했다.
누군가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건.
다만 가슴이 술렁이는 건…….
‘지난 1년 동안…… 꿈을 깊게 꿨나 보네.’
눈부셨던 1년의 나날 때문에 잠시 눈이 멀었던 모양이다.
‘그래.’
첸 시아가 주먹을 꾹 쥐었다.
‘내 자리는 이곳인걸.’
눈을 감았다.
함께 1년을 공부한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영웅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
주변이 항상 빛과 희망으로 가득 찬 새하얀 사람.
‘난…… 결국 레오 도령처럼 될 수 없는걸.’
태어난 태생이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며 첸 시아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후우.”
리이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가 아프군.”
제복을 입은 그녀는 목에 있는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임기 첫 달부터 사고가 터지네.”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은 리이나는 집무 테이블 옆에 있는 찬장에서 술병을 꺼내왔다.
그리고 술잔에 따르며 생각에 잠겼다.
‘결국 자기들 뜻대로 하겠다는 건가?’
집무 책상 위에 걸터앉은 리이나의 눈에 샨 제국 측에서 보낸 서신이 담긴 봉투가 있었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샨의 황녀 첸 시아가 자퇴한다는 내용이 담긴 서신이었다.
‘샨의 인재를 외부에 유출하고 싶지 않다는 황제의 뜻이겠지.’
샨의 황족들은 철저하게 베일에 쌓여 살아간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건 오직 황제뿐.
심지어 다음 황제가 될 인물조차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샨의 전통.
그리고 샨의 황족 중 황제가 되지 못한 재능이 있는 이들은 영웅이 아닌 그림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샨의 전통이었다.
‘그 나라는 이해가 안 된다니까.’
리이나 역시 반평생을 루메른의 그림자로서 살아왔다.
처음에는 그녀 역시 루메른의 입학생이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둔 리이나에게 루메른의 그림자 측에서 제의를 해왔다.
그 제의를 수락한 그녀는 그림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나 같으면 자기 자식에게 더러운 일 안 시키고 밝은 빛에서 살게 해주겠다!’
당장에 눈앞의 황제가 있다면 윽박이라도 질러주고 싶다.
그림자로서의 삶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그녀 역시 피비린내가 나는 길을 걸어왔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 없다.
과거로 돌아간다 하여도 그녀는 그림자의 삶을 살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일부러 그런 길로 떠미는 건 아니지.’
1학년 때의 성적만 본다면 첸 시아는 훌륭한 영웅 후보생이다.
영웅으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인재를 그림자의 길로 떠밀다니.
‘그 나라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야.’
리이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큰 문제는 첸 시아 본인도 영웅 후보생을 관두려는 의지가 있다는 건가.’
싫다는 걸 억지로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상대는 그냥 영웅 명가도 아닌 샨 제국의 황가.
게다가 신분은 황녀이다.
‘일단 내가 직접 찾아가 보는 수밖에…….’
리이나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똑똑-
“들어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교장실을 찾아온 이를 본 리이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학생회장이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이야? 수업이 있을 텐데.”
“빠졌습니다.”
“루메른 역사상 최고의 우등생이라고 하는데 의외로 불량한 구석이 있군?”
“교장님께서도 낮부터 술을 드시고 있잖습니까.”
레오의 말에 술잔을 흔들던 리이나가 탁-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럴 일이 있어서 말이야.”
리이나는 집무 책상 위에서 내려와 손님용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학생회장이 날 찾아온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레오는 소파 위에 앉았다.
“그래. 날 찾은 이유가 뭐지?”
“첸 시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첸 시아.”
소파에 등을 묻은 리이나가 말했다.
“세나 기숙사감에게는 이야기는 들었지? 집안 사정으로 자퇴를 할지 모른다고 말이야.”
“예.”
“그렇다면 학생회장이라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루메른이라고 특별할 건 없어. 교육기관인 만큼 자격이 있는 학생을 가르친다. 자격이 없는 학생은 가르칠 수 없어.”
“그 자격이란 건 본인의 의지를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성향을 마라는 겁니까?”
“무슨 뜻이지?”
“첸 시아가 그림자이기 때문에 자퇴를 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레오의 말에 리이나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첸 시아가 말했어?”
“아뇨. 그런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어요.”
“대단하네. 역시 최연소 학생회장은 달라도 뭐가 다르군.”
리이나가 턱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 되는데? 영웅과 그림자는 목표는 같지만, 사상적으로는 결코 섞일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아?”
리이나가 진하게 웃었다.
“영웅 후보생 중에는 그림자를 싫어하는 녀석들도 많고 말이야.”
그 말대로였다.
영웅 후보생 중 결벽증을 가진 이들은 그림자를 혐오하는 학생이 있다.
그림자들이 하는 일은 영웅과는 거리가 머니까.
“특히 과격파들은 큰 문제지. 고문, 학살 등의 일도 서슴없이 하곤 해. 배신자를 확실하게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도 많아.”
조소를 내뱉은 리이나가 레오를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에 말이야, 레오 플로브. 넌 영웅이 되기 위해 태어난 녀석이란 말이야?”
리이나가 턱을 괴며 다리를 꼬았다.
“첸 시아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친구이기 때문이야? 그림자와 관련된 일에 연관될 필요는 없어. 그저 고고한 영웅으로 있으면 돼.”
“고고한 영웅이라…….”
레오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을 하시는 분이 잘도 그림자 후보생들을 루메른에 받아들이셨네요.”
리이나의 서늘한 시선이 레오에게 닿았다.
“인솔 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몇몇 후배들이 그림자로 키워졌다는 걸요.”
리이나가 피식 웃었다.
“과격파는 영웅 중에도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학살한 영웅들도 많죠. 그저 명분이 있었냐, 없었냐의 차이일 뿐. 제가 보기에는 똑같은데요.”
“똑같다?”
리이나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영웅이나 그림자. 둘 다 다를 게 뭐죠?”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구나?”
리이나가 쿡쿡 웃었다.
“그래. 타르타로스와 싸운다는 점에서 볼 때 영웅과 그림자는 똑같지. 하지만…….”
리이나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
“결정적인 차이?”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리이나는 집무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술잔을 짚은 후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레오를 보며 말했다.
“그림자는 아무리 대단한 위업을 이루어도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릴 수 없어.”
리이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은 영웅의 위업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그림자의 위업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아.”
탁-
술잔을 내려놓은 리이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림자는 신에게 버림받은 존재라는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