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화악-
돌풍이 휘몰아쳤다.
레오는 고개를 꺾어 휘몰아치는 오러의 폭풍을 피했다.
그리고 팔을 휘둘렀다.
꽈앙-!
오러와 오러가 격돌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시안이 튕겨 나갔다.
“크윽!”
시안은 눈을 부릅뜨고 레오를 노려보았다.
석실의 입구는 하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건 레오.
시안은 아까 전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경험했다.
하지만…….
‘녀석은 아트칸을 뚫고 이곳에 왔어.’
아트칸이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아바마마를 상대하기 위해 녀석을 놓아줬겠지. 하지만 곱게 놓아 주지도 않았을 거야.’
시안은 아트칸의 능력을 알고 있다.
시체를 수거하고 그 시체를 살아생전의 능력을 가진 채로 움직이게 만드는 권능.
‘더지(dirge).’
영웅의 세계를 클리어할 때마다 아트칸의 권능을 이용해 새롭게 얻은 힘을 시험하곤 했다.
그렇기에 그의 권능의 위력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레오의 몸 여기저기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얼굴에는 피로함이 느껴졌으며 숨이 가쁜 듯 어깨는 들썩이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멀쩡해.’
아트칸이 체력까지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었다.
‘게다가 지금 내 손에는 시작의 영웅이 사용했던 검이 있다.’
이 검은 단순히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뿐만이 아니었다.
검을 쥔 시안은 알 수 있었다.
신의 대장장이 드웨노가 만든 무구는 신기라 불린다.
그 이유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이 검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안은 검을 고쳐 쥐었다.
‘사용할 수만 있다면 레오 플로브를 쓰러트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안은 레오에게 검을 겨누었다.
“이곳에 오지 않는 게 신상에 좋았을 텐데 말이야.”
뚜벅- 뚜벅-
레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 시안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붉히고 발끈하듯 소리쳤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은 아까 전과는 다를 테니까.”
“뭐가 다르다는 거야?”
“지금 내게는 시작의 영웅 카일의 검이 있다.”
시안의 말에 레오는 시안이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꽤 특이한 형태의 검이었다.
검이 길이는 단검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짧았다.
하지만 손잡이는 일반적인 롱소드만큼 길었다.
사실상 칼날과 손잡이의 비율이 1:1에 가까운 이상한 검.
물론 처음 보는 검은 아니었다.
“그 검은 시작의 영웅의 검이 아니야.”
“뭐라고?”
시안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검의 이름은 에르퀸트야. 페어리 나이트, 베르키아의 검이지.”
에르퀸트는 카일 보다 루나와 더 연관이 깊은 검이다.
원래 에르퀸트는 드웨노가 루나에게 준 검이니 말이다.
루나는 그런 자신의 검을 제자인 베르키아에게 주었다.
베르키아는 카일의 제자이기도 하니 연관이 있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시작의 영웅의 무구는 아니다.
‘그나저나 찾아줬구나.’
레오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베르키아는 에르퀸트를 타르메티아 전투에서 잃어버렸다.
대영웅이 에레보스 토벌을 떠나기 전 참전했던 마지막 전투.
비하르는 스승이 선물해준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풀이 죽어 있는 베르키아에게 검을 찾아 주겠다고 이야기했었다.
‘돌려주지는 못한 모양이군.’
에레보스가 토벌된 후.
스승들의 유지를 받들어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두 사람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웃기는 소리, 페어리 나이트의 검을 왜 선조님이 보관하고 있는 거야!”
“이유가 있었겠지. 어쨌든 그 검이 에르퀸트란 건 루메른 영웅학 시간에도 배웠으니 확실해.”
작년 영웅학 교수였던 아르티안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의 무구에 대한 수업을 해준 적이 있다.
그 중 에르퀸트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너는 그 검을 제대로 다룰 수 없어.”
레오의 말에 시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난 듯이 떠들지 마라!”
분노한 시안이 레오를 향해 돌격했다.
그의 몸에서 강력한 오러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콰가가각-!
시안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시안은 레오의 급소를 노렸다.
“네놈은 지쳐 있어! 내 움직임을 쫓아 올 수 없을 거다!”
레오를 조롱하며 시안은 더더욱 가속했다.
레오는 숨을 가볍게 내뱉고 검을 들어 올렸다.
서걱-! 덥석-!
레오의 등을 베고 시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면으로 붙으면 패배가 불보듯 뻔했다.
‘이런 식으로 작은 상처를 늘려간다.’
시안은 레오의 눈을 피해 빠르게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림자의 능력.
그렇게 경멸하던 그림자의 능력을 사용했지만, 시안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괴물을 쓰러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안의 공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기 직전 레오가 시안의 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어설퍼.”
싸늘하게 말한 레오가 붉은색 눈을 번뜩였다.
“더 이상 보여 줄 건 없냐?”
레오
고오오오오오오-!
제르딩거의 불꽃이 타올랐다.
사용자조차도 집어삼킬 듯 부풀어 오른 불꽃을 본 시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콰가가가강-!
레오의 불꽃이 시안을 무참하게 불태웠다.
“끄으으…….”
가까스로 빠져나온 시안은 바닥을 기며 중얼거렸다.
“있을 수 없어…… 말도 안 돼…… 나는…… 난 선택 받았다고…… 대영웅이 될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왜……!”
힘겹게 버둥거리며 입구를 향해 기어가는 시안의 앞을 레오의 발이 가로막았다.
시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 살려줘! 넌 영웅 후보생이잖아? 난 시아의 가족이야! 영웅 후보생이 친구 가족의 목숨을 함부로 끊겠다고?”
화륵-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레오가 불꽃을 내뿜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안이 다급히 소리쳤다.
“나, 난 영웅이 될 거야! 너, 너도 영웅이 될 거지? 타르타로스와 맞서 싸울 거지? 한 사람이라도 강한 사람이 있으면 훗날 큰 도움이 될 거야!”
“확실히 그렇겠지.”
“그, 그러면……!”
레오의 긍정에 시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근데 난 네가 그렇게 대단한 녀석인지 모르겠어.”
레오는 빙긋 웃었다.
시안은 그 웃음이 사형선고라는 걸 직감했다.
“살려 둘 가치가 있는지는 더더욱 모르겠고.”
콰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악!”
피닉스의 불꽃이 시안을 덮쳤다.
발버둥 치며 방 안 곳곳을 굴러다니던 시안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이내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레오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에르퀸트를 들어 올렸다.
‘될 수 있으면 에이란에게 주고 싶은데.’
세이룬 2학년 차석이자 베르키아의 후손인 에이란.
에르퀸트는 되도록 에이란의 손에 맡겨지는 게 좋을 것이다.
‘비하르도 그걸 원할 테니까.’
비록 본인에게 직접 돌려주지는 못하지만, 그 후손에게라도 돌아가는 걸 비하르도 원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레오는 엉망이 된 기록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것들은?”
“모두…… 그림자의 기록이에요.”
첸 시아의 설명에 레오는 바닥 뒹굴고 있는 책 한 권을 들어 올렸다.
내용이 펼치자 어떤 그림자의 행적에 관해 쓰여 있었다.
“과연.”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책장에 기록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꽂아 넣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영웅을 향한 예우처럼 보였다.
그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첸 시아가 말했다.
“레오 도령의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는데요.”
“손을 더럽혔다고 이야기할 것까지 있어?”
레오가 덤덤히 말했다.
“배신자를 처단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
“돌아가자. 이대로 더 무단결석을 했다간 반성문으로 안 끝나.”
“데리러 와 준 건 고마워요. 정말 기뻐요.”
첸 시아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난 그림자에요. 영웅이 될 수 없어요.”
“왜?”
“신들은 절대로 날 인정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첸 시아는 자신의 손을 펼쳐보았다.
“레오 도령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난 더러운 일을 해왔어요. 그리고 잔인한 여자예요.”
첸 시아가 빙긋 웃었다.
“시안은 배신자라고 해도 내 쌍둥이에요. 그가 죽는 모습을 봤지만 난 이렇게 웃을 수 있어요.”
아무리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해도.
평생을 함께한 혈육이다.
그 혈육이 죽었음에도 첸 시아는 무덤덤했다.
“나 같은 영웅 후보생이 있나요?”
“없겠지.”
“그것 보세요. 난 영웅 후보생에 어울리지 않아요.”
미소 짓는 첸 시아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해 보였다.
“이런 나를 신들이 인정해줄까요?”
“인정해주지 않겠지.”
“네, 전 절대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리지 못할…….”
“근데 그게 중요해?”
“예?”
“신들의 인정이 그렇게 중요해?”
예상치 못한 대답에 첸 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영웅이 되고 싶어서 루메른에 입학한 거 아니었어? 넌 왜 영웅이 되고 싶었던 건데?”
“……많은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첸 시아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래서? 영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지금은 사람들을 돕기 싫어?”
첸 시아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아뇨. 그림자의 방식으로…….”
“사람을 돕는데 방식이 어디 있어?”
레오가 피식 웃었다.
“그 마음이 변함없다면 넌 지금도 영웅이 되고 싶은 거야.”
첸 시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넌 분명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영웅이 될 거야.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리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마음이 술렁인다.
자신도 부정한 꿈을 긍정해준다.
어둠 속에 발이 잠겨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망설이던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것만 같았다.
눈부실 정도로 환한 빛에 어둠이 가시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만나고 싶지 않았어.’
기껏 다짐했다.
하지만 자신조차 부정한 꿈을 긍정해주는 레오를 보며 그 다짐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자신도 모르게 빛을 향해 손을 뻗는다.
“돌아가자, 루메른으로.”
“……네!”
첸 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도…… 가볼래.’
중요한 건 히어로 레코드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첸 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첸 시아를 보며 피식 미소 짓던 레오가 멈칫했다.
‘신력……?’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록실 구석 책장.
그곳에 낡은 가죽 표지가 보였다.
레오가 책장으로 다가가 그 책을 꺼냈다.
‘오러의 봉인?’
오러의 봉인.
오러에 의지를 담아 남겨 선택받은 자만이 열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다.
‘비하르의 오러로군.’
레오는 제자의 오러를 느끼며 회색의 오러를 일으켰다.
레오의 오러에 반응하여 봉인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건…….
“히어로 레코드……?”
신력을 내뿜는 페이지를 보며 첸 시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오가 당황하는 순간.
[당신의 세계를 여시겠습니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걸 본 레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때까지의 히어로 레코드와는 달랐다.
몇 번이고 영웅의 세계에 들어갔지만 이런 식의 메시지는 처음 봤다.
‘게다가 내 세계라고?’
당황하던 레오는 의지를 담아 대답했다.
‘아니.’
그 말과 함께 메시지가 사라졌다.
레오는 히어로 레코드를 내려다보았다.
눈 앞에 있는 영웅의 페이지의 뭉치는 강력한 신력을 품고 있었다.
마치 온전한 상태의 히어로 레코드를 보는 것 만 같았다.
다급히 레오 곁으로 다가와 히어로 레코드의 내용을 확인한 첸 시아가 입을 벌렸다.
“이건…… 그림자의 기록 같은데요?”
히어로 레코드에 기록된 행적.
이름은 지워져 있지만, 배신자들을 처단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가짜인가 생각을 해보았지만 루메른 학생으로서 보기에 이 히어로 레코드는 진짜였다.
“대체…….”
놀라는 첸 시아를 보며 레오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내…… 기록이군.’
페이지의 내용은 모두 카일 시절 레오가 했던 일들이다.
‘그렇군…….’
히어로 레코드를 보며 레오는 상황을 이해했다.
‘비하르가 그림자로서 남았던 내 기록을 모두 자신이 가져갔던 건가.’
대영웅 중 배신자를 처단한 건 카일 뿐이다.
그중에는 당연히 눈살을 찌푸려지게 하는 기록들도 많다.
누군가는 했어야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이들이 그걸 이해해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만약 이 기록이 온전하게 남아서 후대에 전해졌다면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 자신은 더러운 일을 했던 대영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비하르는 스승이 그렇게 기록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감춘 건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내버려 뒀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그림자들이 부정당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영웅조차 세계를 위해 어둠 속에서 활동했다는 게 알려졌다면.
그림자로서의 위업도 신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지금의 그림자들의 대우는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비하르 역시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레오가 깊은 한숨을 쉴 때였다.
파라라락-
갑자기 페이지들이 자동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빈 페이지가 생성되었다.
‘이게 무슨……?’
[영웅의 위업을 기록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첸 시아는 처음 보는 상황에 당황하며 빈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기록.’
레오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비하르
페이지 상단에 비하르의 이름이 떠오르더니 그녀의 위업이 페이지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우웅-!
히어로 레코드가 빛이 나더니 허공에 떠올랐다.
드드드드드-
기록 서고에 꽂혀 있던 그림자들의 기록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일제히 뽑혀져 나왔다.
그림자의 기록들이 히어로 레코드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우우웅-! 파라라라락-!
히어로 레코드에서 순백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림자의 기록들이 일제히 히어로 레코드로 빨려 들어갔다.
파앗-!
강력한 빛이 공간을 가득 메우더니 이내 사라졌다.
서고 가득히 꽂혀 있던 그림자의 기록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이, 이게 대체.”
첸 시아가 놀라고 있을 때.
커다란 책 하나가 허공에서 떨어졌다.
텁-!
레오의 손 위로 떨어진 검은색 표지의 책.
그 표지를 본 첸 시아가 입을 떡 벌렸다.
레오는 표지를 쓸어보았다.
‘그렇군.’
레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피브아의 말이 떠올랐다.
히어로 레코드는 카일의 것.
즉…….
‘내게도 기록 권한이 있다는 건가?’
[히어로 레코드-그림자의 서]
일평생 어둠 속에서 활약해온 그림자들의 위업이 인정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