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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룬의 학년 대표.
루니아 엘 룬드아가 같은 학교 학생을 폭행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모든 학교 학생들에게 퍼졌다.
“이상하군요. 그녀는 전형적인 세이룬의 우등생일 텐데 말이죠.”
아조니아 2학년 서열 3위, 여우 수인 르웬은 자신의 복슬복슬하고 탐스러운 꼬리털을 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형적인 세이룬의 우등생.
다른 영웅 사관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좋은 의미로 쓰이는 말은 아니었다.
엘프는 기본적으로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종족.
그리고 세이룬 학생들은 그게 도가 지나친 경우가 종종 있다.
전형적인 세이룬 우등생이란 말은 그런 경향을 지닌 세이룬의 탑 클래스 학생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었다.
르웬의 말에 보르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형적인 세이룬 우등생이라는 말이 뭐지? 싸우면 재미있다는 뜻인가?”
그 말에 르웬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머리에 싸움 밖에 없는 바보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네요.”
“뭐라고! 이 뒤 구린 여자가!”
보르만이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르웬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진정해라, 보르만. 르웬의 서열은 너와 나보다 우위에 있다.”
서열 4위, 곰 수인 타본의 말에 보르만이 코웃음을 쳤다.
“치사하게 마법으로 깨작거리며 승리를 취하는 저런 치사한 여자! 나는 인정 못해!”
“어머나, 그 치사한 여자에게 한 번도 이겨 본 적 없는 바보는 어디 사는 누구실까나?”
“야! 덤벼! 오늘이야말로 쓰러트려 줄 테니까!”
흥분한 보르만이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조용히 해라.”
디온의 말에 팔짱을 낀 보르만이 자리에 털썩 풀밭에 주저앉았다.
현재 아조니아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은 대강당의 뒤뜰이었다.
“르웬. 네가 우리를 모은 건 루니아 엘 룬드아 때문이 아닐 텐데? 왜 그 이야기를 언급하는 거지?”
서열 2위, 디온의 물음에 르웬이 진하게 웃었다.
“맞아요. 다만 그녀의 이야기를 꺼낸 건…….”
르웬이 여우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웃었다.
“그녀가 행동이 정보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가장 큰 경쟁 상대 중 한 사람. 그러니 잘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르웬의 말에 디온이 힐끗 뒤를 보았다.
“아르. 넌 지난 겨울 방학 때 로드렌 제국에서 루니아 엘 룬드아를 만나지 않았어? 그때는 어땠어?”
그 물음에 바위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아르가 대답했다.
“오래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르웬이 말한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는데, 웃차.”
가벼운 몸놀림으로 바위에서 내려온 아르가 물었다.
“검은 토끼한테 물어봤을 때는 깡패 같다고 말하긴 했는데.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지금 모습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세이룬 2학년 대표가 깡패?’
르웬이 기묘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어쨌든 르웬. 파벌 대장들을 부른 이유가 뭐야?”
아르가 본론으로 들어가 묻자 르웬이 말했다.
“이번 스미스 전속 계약에서 파벌 간의 협력을 요청하는 바에요.”
“네가?”
보르만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타본 역시 쉽게 믿을 수 없다는 듯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여우 수인 르웬.
아조니아 학생들 사이에서는 꽤 이질적인 학생이었다.
아조니아에서 파벌 간의 결투와 항쟁은 일상.
그렇다 보니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컸다.
물리적인 강함만이 진리인 아조니아에서 르웬은 책략가로 악명이 높았다.
다른 파벌 학생을 속이고 서로 항쟁을 붙여 이득을 취했다.
그렇다 보니 다른 파벌의 학생들은 르웬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서열 3위의 힘을 지니고 있어도 그랬다.
‘애초에 아조니아에서 마법사인 나는 이단이지만.’
르웬이 조소하며 말했다.
“네. 믿기 어렵겠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이에요.”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자.”
디온의 말에 르웬이 빙긋 웃었다.
“이번 스미스 전속 계약은 단순히 우수한 데미안 학생과 계약을 맺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르웬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인간, 엘프, 수인, 드워프. 네 종족의 형상을 한 마력으로 만들어진 인형이 허공에 떠다녔다.
“우리와 같은 세대의 영웅 후보생들이 한자리에 모였어요. 이런 자리는 우리가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다시 없을 대사건이에요.”
확실히 그랬다.
르웬의 말대로였다.
영웅 사관 학교끼리의 교류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영웅 사관 학교에서 한 학년 전체가 한자리에 모이는 건 졸업할 때까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루메른과 세이룬의 2학년 평판은 우리 아조니아를 앞서 있어요.”
르웬의 말에 보르만이 툴툴거렸다.
“동의하기 힘든데?”
“당신이 동의하기 힘든 것과 관계없어요. 루메른 2학년들은 1학년 당시 기간테스 토벌로 명성을 얻었어요. 그리고 루메른과 세이룬은 작년 마물 여왕이 토벌되던 그 장소에 있었어요.”
마물 여왕 실라투나의 토벌.
그 위업을 이루어낸 건 기적적으로 이 땅에 강림한 시작의 영웅과 성운의 시조였다.
하지만 전설적인 전장에 참전한 것만으로도 세간의 평가는 높아지는 건 당연했다.
“그것에 버금가는 실적이 없으니 세간에서는 우리 아조니아의 2학년들이 루메른과 세이룬의 2학년들 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어깨를 으쓱거리는 르웬을 보며 보르만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타본 역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르와 디온은 르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보르만이 발끈했다.
“야! 아르! 디온! 너희는 저런 말 듣고 분하지도 않아?!”
“우리가 루메른과 세이룬에 비해 성과가 없는 건 사실이야.”
아르가 쭉-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며 말하자 디온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걸 의식했기 때문에 교장도 우리에게 레오 플로브를 쓰러트리라고 지시했지.”
디온이 호전적인 미소를 쥐며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루메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를 무술 대련에서 꺾으면 아조니아의 평판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맞아요. 그래서 데미안에 있는 동안은 파벌끼리의 다툼을 멈추자는 거예요. 외부의 적에 더 집중을 하자는 소리죠.”
르웬이 빙긋 웃었다.
“수인과 드워프는 대대로 사이도 좋았으니까요.”
순수하게 강함을 숭배하는 수인은 그 어느 종족보다 무구에 진지한 태도를 보여줬다.
자연스럽게 뛰어난 무구를 만드는 드워프들과도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학교끼리의 대항전이나 다름 없는 이번 스미스 전속 계약에서 우수한 데미안 학생들을 우리가 선점하면 자연스럽게 세간에 대한 우리 평가는 올라갈 거예요.”
르웬이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마침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레오 플로브가 그런 식으로 데미안 학생들의 눈 밖에 났으니 훨씬 유리한 상황이죠. 괜히 레오 플로브와 정면으로 부딪쳐 봤자 그가 명성을 쌓는 제물밖에 안 될 테니까요.”
“흥! 웃기지 마! 그 말은 지금 레오 플로브와의 결투도 피하라는 거야? 아조니아 학생이라면 정면에서 맞붙어야지!”
“그래,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 르웬.”
보르만이 발끈했고 이야기를 듣던 타본도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못 이길 텐데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그럼 레오 플로브의 명성 쌓는 제물이나 되세요, 바보 호랑이.”
“누구더러 바보라는 거야!”
보르만을 무시한 르웬이 아르를 보았다.
“내 생각이 어때요, 아르?”
“나쁜 생각은 아니네. 다만 난 검은 토끼와의 대련을 피하는 건 반대야.”
아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검은 토끼에게는 배울 점이 많거든.”
“마지막 제안은 들을 거라고 생각 안 했어요.”
고개를 저은 르웬이 말했다.
“어쨌든 당분간 파벌 간의 싸움은 금지하고 우수한 데미안 학생들을 최대한 선점하는 건 동의할 거로 생각해요. 그러니…….”
르웬이 히죽 웃었다.
“다들 점심을 다 먹고 힘껏 날뛰어주세요. 강함을 어필하는 건 여러분의 장기잖아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파벌 우두머리들이 각자의 파벌 학생들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르웬에게 다가갔다.
“무슨 꿍꿍이야?”
“글쎄요?”
르웬이 키득거렸다.
“사냥의 기본은 사냥감의 힘을 빼놓는 거잖아요?”
여우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런 르웬을 보며 아르가 혀를 빼물었다.
“무슨 꿍꿍이인 줄 알겠네.”
“어머, 바보 두목 고양이가 눈치가 빨라 졌네요. 하긴 너무 단순한 계획이긴 하죠.”
“바보 고양이라고 하지 마앗!”
아르가 꼬리와 귀를 바짝 세우며 발끈했다.
그러더니 이내 음흉하게 웃었다.
“뭐죠? 그 기분 나쁜 웃음은?”
“평소 네 웃음을 따라 한 건데?”
아르는 키득키득 웃더니 말했다.
“마지막에 지친 검은 토끼를 쓰러트리려는 계획은 잘 알겠는데. 걔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괴물이야. 네가 아무리 꿍꿍이를 꾸민다고 해도 간단하게 뚫고 가버릴걸?”
“충고 고마워요. 하지만 아무리 거친 맹수라도 지치면 얌전해지게 되어 있어요.”
르웬이 빙긋 웃고 가버리자 아르는 혓바닥을 쏙 내밀었다.
‘잔머리 굴리다가는 된통 당할 거다.’
***
점심이 끝나고.
대강당에 도착한 세 영웅 사관 학교의 학생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있던 의자는 싹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마치 시장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데미안의 2학년 학생들이 각자 자신이 만든 무구를 전시하고 다른 영웅 사관 학교의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와, 어떻게 한 시간 만에 강당 내부가 이렇게 변할 수 있지?”
칼이 어이가 없다는 듯 감탄했다.
“드워프잖아.”
“드워프면 가능한 거냐?”
“드워프니까.”
레오의 대답을 듣고 칼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루니아 엘 룬드아!”
강당 뒤편에서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학생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세이룬 2학년 총괄 선생, 레베르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세이룬 학생들의 선두에 있는 루니아에게 향했다.
루니아는 삐딱한 표정을 짓더니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몇 번 후볐다.
뚜벅- 뚜벅- 뚜벅-
“너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서는 보고 받았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세이룬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네가 그런 추태를 보이다니!”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소리치는 레베르를 보며 학생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 교직원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데미안의 2학년 담당 스미스 데페토는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은 상황.
그렇다 보니 레베르를 만류할 이는 누구도 없었다.
아니, 다른 학교 학생들은 엘프 종족주의자인 그와 엮이지 않고 싶지 않았다.
세이룬 학생들은 감히 선생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다.
루니아는 자신 앞에 온 레베르를 보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도대체가 넌 세이룬의 학년 대표라는 자각이 있는 거냐!”
루니아 앞에 선 레베르가 권위적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루니아, 넌 강한 교정이 필요한 것 같군. 지금 당장 세이룬으로 돌아가라!”
그 말에 루니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은 중요한 학과 일정인데요?”
“지금 네게 필요한 건 세이룬의 학생으로서 갖춰야 할 예절과 품위다.”
레베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걸 갖추지 못한다면 시조님의 마법을 배울 수 있는 특권도 사라지게 될 테니까.”
“그건 레베르 선생님이 마음대로 정할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루니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루니아는 룬드아 가문의 후계자다.
엘프 사회에서도 지위가 굉장히 높았다.
레베르가 비록 지금 세이룬 2학년 총괄 선생을 맡고 있어 명목상의 지위는 높지만, 엘프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루니아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학생의 신분을 빼고 보자면 레베르가 절대로 함부로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훗, 나의 뜻은 곧 교장님의 뜻이기도 하지. [혜성의 마도서]를 열람하고 싶다면 내 뜻에 따르는 게 좋을 거다.”
루니아의 붉은 눈이 이글이글 타오를 때였다.
“저기요. 남들에게 민폐니까 좀 가주시면 안 될까요?”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어떤 녀석이……!”
레베르의 눈에 번뜩이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레오가 서 있었다.
“하, 오만불손한 녀석. 감히 학생 신분으로 세이룬 2학년 총괄 선생인 나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냐?”
“루메른 학생회장으로 부탁드리는 건데요.”
레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영웅 사관 학교의 학생회장은 아카데미 교장의 대리인 신분도 있거든요? 설마 모르진 않으시죠?”
“이놈……!”
학생회장 신분을 들먹이며 말하는 레오를 보며 레베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루니아는 [혜성의 마도서]에 수록된 시조의 마법을 배울 필요가 없어요.”
“흥! 네놈은 별의 마법과 시조님의 위대함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혜성의 마도서] 가 얼마나 위대한…….”
“레베르 선생님. 루나님을 만난 적이 있어요?”
“뭐?”
“난 있는데.”
레오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일전에 루나의 세계를 공략해서 얻은 폴리움을 소환해 레베르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빈껍데기에 불과하고 신력도 담기지 않았지만, 그 상징성만큼은 확실했다.
“레베르 선생님은 이런 거 없죠?”
“큭!”
레베르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그런 레베르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그리고 루니아가 [혜성의 마도서]에 수록된 마법을 익힐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이미 시조님의 마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레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레베르는 눈을 부릅뜨고 루니아를 보았다.
세이룬 학생들 역시 깜짝 놀라 루니아를 보았다.
그리고 루니아는 입을 쩍 벌리고 레오를 보았다.
‘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혜성의 마도서에 수록된 마법은 다름 아닌 ‘종언’.
선택받은 엘프들만 익힐 수 있는 궁극의 마법이다.
그리고 루니아는 그 마법을 배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에 루나님의 세계를 공략할 때 공략 보상으로 받았거든요.”
레오의 말에 루니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당시 공략 보상을 받은 건 레오뿐이다.
그리고 레오는 공식적으로 ‘폴리움’ 만을 공략 보상으로 받았다고 했다.
그것 역시 충분히 놀랄 일.
하지만…….
‘설마 공략 보상으로 시조님의 마법을 받은 건가?’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설마 그걸 나한테 가르쳐주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