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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아카데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앙성 최상층부.
데미안의 전경뿐만 아닌 드라킨 산맥의 광활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풍경은 언제 봐도 압도되는 느낌이란 말이지.”
속이 뻥 뚫릴 것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아조니아의 교장. 제피아는 팔짱을 끼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런 제피아를 보며 데미안의 교장, 게르윈이 빙긋 웃었다.
“우리 드워프들에게 있어 드라킨 산맥은 자랑이지. 누가 뭐라 해도 드웨노님이 태어나고 자란 땅이니까.”
드라킨 산맥.
고대로부터 수많은 광석이 매장되어 있는 이곳은 드워프들의 성역이었다.
그리고 드웨노 역시 이곳 드라킨 산맥 출신이었다.
게르윈의 말에 제피아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쉽네요. 아르온님은 정확하게 어디 출신인지 기록이 없는데 말이죠.”
“고향이 정확하게 기록된 대영웅은 지혜의 왕과 신의 대장장이 뿐이니까요.”
루메른의 교장, 리이나가 덤덤히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리시나스는 드래고니아 출신이다.
재앙의 시대 이전. 신의 시대 당시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만 드래고니아는 오래전부터 드래곤의 성역으로 불렸던 곳.
모든 드래곤은 드래고니아에서 태어났고 리시나스라고 다를 건 없었다.
성운의 시조 루나의 경우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후보로 예상되는 곳은 여러 곳이 있었지만 명확하게 이곳이라고 알려진 곳은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우릴 부른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때 한 곳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룬의 교장 대리, 르하겐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게르윈님. 교장 회의를 소집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시길 바랍니다.”
“거참, 성격급한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게르윈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종족주의자에 오만불손한 르하겐이었지만 그도 게르윈 앞에서는 한수 접어 줄 수밖에 없었다.
루메른의 리니아, 아조니아의 제피아. 그리고 세이룬의 르하겐.
각 교장과 교장 대리는 현 세대에서 활약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게르윈은 다르다.
그는 전세대 영웅.
검성과 같은 세대에 활약했던 드워프 영웅이다.
거기에 더해 영웅으로서의 업적은 물론이고 그가 만든 무구는 영웅들의 손에서 수많은 전설을 써 내려갔다.
지금 시대 최고의 블랙 스미스.
그것이 바로 게르윈이었다.
르하겐이 사용하는 무구 중에도 게르윈의 무구가 있는 만큼 그라도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의 인물이었다.
르하겐 뿐만 아니다.
제피아는 물론이고 그림자인 리이나 조차도 게르윈의 손에서 탄생한 무구를 쓰고 있다.
‘뭐, 단순히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지만.’
리이나는 자신에게 자리를 권하는 게르윈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의자에 앉았다.
‘지금이야 인자하시지만, 학생 시절 때는 자신이 만든 무구를 시험한다고 다른 영웅 사관 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도장 깨기를 하러 다니셨다지?’
그로 인해 수많은 일화를 만들었다.
지금 학생들에게야 그저 인자하기만 한 전설이지만 리이나 세대에서는 괴팍하고 꼬장꼬장한 드워프로 명성이 자자했다.
실제로 그에게 무구를 부탁하러 갔다가 주먹에 맞고 나가 떨어진 영웅들도 있을 정도다.
‘저 엘프 성격상 게르윈님에게 두들겨 맞은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리이나가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자네들을 부른 건 다름 아닌 드래고니아에서 서신을 보내왔기 때문일세.”
게르윈의 말에 교장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드래고니아의 서신.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설마…… 침묵의 용이 움직였다는 겁니까?”
침묵의 용, 드래곤 로드 멜리나.
오래전.
세계의 숙원인 개벽의 세계 공략을 시도 했던 드래곤.
타르타로스의 삼대 군단장이라 불리던 사령왕, 거인왕, 마물 여왕과 비견될 정도라는 평가받는 강대한 드래곤.
하지만 개벽의 세계 공략 실패 이후 단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과거, 검성이 군단장인 저주의 왕을 토벌할 당시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상은 멜리나를 가리켜 침묵의 용이라 불렀다.
르하겐의 말에 게르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 대답에 영웅 사관 학교의 교장들은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영웅 사관 학교의 교장들은 각 종족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자들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이 긴장할 정도로 드래곤 로드 멜리나가 움직였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다.
‘역시 마물 여왕이 토벌되었으니 드래곤 로드라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지.’
‘비록 이때까지 침묵해왔지만 드래곤 로드로서 그녀의 영향력은 절대적.’
‘교감들을 통해서가 아닌 교장들을 소집하다니. 무얼 하려는 생각이지?’
멜리나가 침묵을 해온 건 사실이지만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위대한 현자로서 칭송받고 있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영웅 사관 학교의 움직임이 달라질 수 있다.
“샨 제국에서 새로운 히어로 레코드가 발견되었다고 하네. 그와 관련되어 샨 제국은 드래고니아를 통해 은밀하게 각 영웅 사관 학교에 협조를 부탁해 왔네.”
게르윈의 말에 르하겐이 김이 샌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것입니까?”
“고작 그거라니? 드래곤 로드가 직접 언급을 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리이나가 싸늘한 목소리로 르하겐을 보았다.
그런 리이나를 보며 르하겐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히어로 레코드 발굴이야 늘 일어나던 일이니만큼 특별할 것도 없지. 게다가 샨 제국에서 공식적인 루트가 아닌 드래고니아를 통해 은밀하게 협조를 요청했다면 뻔한 것 아닌가? 영웅 던전이 발생했는데 공략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지.”
르하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영웅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그림자들이 영웅의 세계를 제대로 공략할 수 있을리 만무하지.”
“그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그림자들이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목숨을 잃었을 엘프가 말을 잘하는군.”
“그림자가 영웅을 호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대놓고 그림자를 무시하는 그를 보며 리이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엘프 그림자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겠네! 구한 게 가장 후회되는 영웅!’
마음 같아서는 들이박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식적인 자리.
애초에 그림자 출신 교장인 자신을 대놓고 무시할 거라는 것 정도는 리이나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를 저런식으로 무시하는 게 딱히 엘프만의 특징도 아니다.
어느 종족이든 그림자를 이렇게 취급하는 자들은 있다.
‘아오, 진짜 성격 같았으면 반죽음을 만들어 놓는 건데!’
리이나의 입에서 뿌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릴 때였다.
“그림자를 무시하는 언행은 삼가게, 르하겐. 그들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자들. 그림자는 영웅과 동등한 이들이야.”
“하지만 신의 인정을 받지는 못하죠. 그런 그림자와 영웅이 동등하다니. 납득하기 어렵군요.”
르하겐이 대놓고 비웃음을 날릴 때였다.
“예전에는 그랬겠지.”
게르윈이 빙긋 웃었다.
“샨 제국에서 발견된 히어로 레코드는 기존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히어로 레코드일세.”
“예?”
“그림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완전한 형태인 그림자의 서라고 하더군.”
“말도 안 됩니다! 히어로 레코드가 존재한지 5000년! 그 세월 동안 그림자가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린 적은 없습니다!”
르하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런 르하겐을 보며 게르윈이 빙긋 웃었다.
“자네가 부정한다고 해도 사실이네. 그림자들만이 기록된 히어로 레코드가 존재하며 영웅의 세계 역시 열리는 것이 확인되었네. 경사스러운 일이지.”
게르윈의 말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 교장은 아직까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림자인 리이나 조차도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만큼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샨 제국에서는 무슨 요청을 한 거죠?”
“역사의 뒤편에 기록된 그림자의 기록들을 요청했네. 그들의 기록을 새로운 히어로 레코드에 기록하고 싶다고 하더군.”
“신의 인정이 없다면 히어로 레코드에 기록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요?”
“나 역시 그 점이 의문이긴 하네.”
게르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신에게 인정받는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르지.”
“신은 재앙의 시대 이후 지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제피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하지만 샨에서는 설명 없이 요청만 해온 이상 알 방법은 없네. 그들만의 방법이 있겠지. 그리고 또 한 가지.”
게르윈이 턱을 괴었다.
“영웅 사관 학교에 영웅 후보생과 그림자 후보생들도 함께 공부시켜줄 것을 요청해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웅 후보생과 그림자 후보생이 같은 공간에서 공부한다니요!”
르하겐이 발작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림자에 대한 차별.
그건 어느 종족에나 있지만, 그 성향이 가장 심한 건 엘프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세이룬의 입학 조건.
그건 별의 마법을 익히는 것.
하지만 아무리 마법의 종족이라고 칭송받는다고 해도 선천적으로 마법사의 재능이 없는 자들도 있다.
그런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들이 그림자 역할을 맡아 왔다.
엘프 사회는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자들을 차별해 왔다.
순수 검사와 소환사가 그림자가 되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엘프의 히어로 레코드에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영웅만이 기록되어왔다.
그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그림자들을 위한 히어로 레코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샨 제국에서 그림자들이 영웅 후보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종족 권위주의자인 르하겐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런 르하겐을 보며 제피아가 말했다.
“세이룬의 교장 대리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당장에 그 요청을 받아들이는 건 아조니아로서도 힘들어요. 영웅과 그림자는 활동 영역이 너무 달랐으니까요. 당장에 시도했다가는 큰 혼란을 초래할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한 제피아가 힐끗 리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루메른도 이번에 그림자 후보생을 영웅 후보생으로 공부시키려고 했던 거 아닌가?”
올해 루메른에는 그림자 후보생 몇몇이 입학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림자 후보생으로서가 아닌 영웅 후보생으로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렇지. 난 그림자 후보생들에게 선택권을 준 것뿐이지 함께 공부시킨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
리이나가 그림자 후보생들을 입학시킨 건 그들이 빛에서 살지, 어둠에서 살지에 대한 선택권을 주기 위해서였다.
“나도 너무 급작스러운 변화가 아닌 시간을 들여 인식을 바꿔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그림자 후보생들의 입학에 관한 건 샨의 요청이지 드래고니아의 입장은 아니네.”
그 말에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던 르하겐이 자리에 앉았다.
드래고니아의 말이라면 세이룬이라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샨 제국의 요청이라면.
‘그런 건 무시하면 그만이지.’
르하겐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교장을 소집한 이유는 새로 나온 히어로 레코드에 관한 정보 공유와 향후 방향성에 대한 회의를 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더.”
게르윈이 품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오늘 아침, 드래고니아에서 서신 한 장이 더 왔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제피아가 눈을 크게 떳다.
“그렇네. 게다가…… 이번에는 드래곤 로드의 친필 서신인 모양이더군.”
게르윈은 오늘 아침, 교감이 전해준 편지를 떠올리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 로드이 친필 서신이라는 말에 교장들은 또다시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친필 서신까지 보내다니? 대체 무슨 중요한 이야기가 쓰여 있단 말인가?
“열어 보겠네.”
딸깍-
나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편지 봉투 하나가 고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편지 봉투에는 정갈한 글씨체가 쓰여 있었다.
[드래곤 로드, 멜리나가 게르윈님께.]
지상 최강의 용의 친필을 본 산전수전을 다 겪은 교장들은 긴장된 눈으로 편지 봉투를 주목했다.
게르윈 역시 심호흡하고 편지 봉투를 개봉하고 안의 내용물을 꺼내 일었다.
내용을 확인한 게르윈의 얼굴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런 게르윈을 보며 다른 이들은 심상치 않은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게르윈은 눈을 몇 번 비벼보며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품에서 돋보기 안경을 꺼내 낀 후 다시 읽어보았다.
잠시 후 게르윈이 편지를 다른 교장들에게 건넸다.
긴장된 얼굴로 가장 먼저 편지를 건네받은 제피아의 얼굴은 게르윈가 비슷해졌다.
제피아 다음으로 편지를 읽은 르하겐은 헝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건네받은 리이나는 내용을 읽고 할 말을 잃었다.
[친애하는 게르윈님께. 데미안에서 보관하고 있는 드웨노님의 유산을 앞으로 드래고니아에서 관리하겠습니다. 드래곤 로드, 멜리나가.]
‘아니, 내용을 떠나서 이 곰탱이는 대체 뭐야?’
편지 봉투 끝자락에 그려진 귀여운 곰을 보며 리이나의 얼굴은 기묘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