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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어제에 이어 오늘도 대부분의 영웅사관 학교 학생들은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이것들은 지치지도 않나?”
아르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체력이 막강한 아조니아의 학생들조차 저돌적인 드워프들에 의해 진이 빠진 상태였다.
특히나 아르는 아조니아의 학년 대표였기에 여기저기서 아르를 노리는 드워프들이 많았다.
“넌 좋겠다, 근육 바보. 벌써 전속 계약할 스미스를 정해서.”
아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르의 소꿉친구이자 아조니아 2학년 서열 2위, 디온이 서 있었다.
디온은 일찌감치 스미스를 정한 상태였다.
디온의 전속 스미스는 다름 아닌 데미안의 2학년 대표 디그네스였다.
“디그네스는 너에게도 무구를 만들어주겠다고 제의했잖아?”
“하긴 했지.”
아르가 팔짱을 꼈다.
하얀 꼬리가 살랑였다.
“하지만 그 녀석이 만든 무구들은 내 취향은 아니었어.”
디그네스가 만든 무구들은 전체적으로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무구의 종류와 클래스를 가리지 않는 것도 장점이었다.
아르의 장기는 체술.
하지만 그렇다고 무기를 못 쓰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온갖 무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훈련한 상태였다.
‘아르온님을 존경했으니까!’
용자 아르온.
문헌에 의하면 다루지 못하는 무기가 없었다는 무신에 가까운 사람.
아르는 그런 아르온처럼 되고자 어릴 때부터 노력했다.
디그네스가 만든 무구들은 확실히 우수한것들이었지만 아르가 보기에는 유연성이 부족했다.
“뭐랄까? 어떨 때는 검이 되었다가! 어떨 때는 창이 되고! 또 어떨 때는 도끼도 될 수 있으면서도 휴대하기 편한 그런 무구가 있으면 좋을 텐데!”
“욕심도 많군.”
혀를 차던 디온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쪽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레오를 발견했다.
“저기 레오 플로브가 있군.”
“검은 토끼?!”
아르의 하얀 꼬리가 ! 자로 빳빳하게 섰다.
‘검은 토끼가 어떻게 하울링을 썼는지 물어봐야겠어!’
며칠 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볼 기회라 생각하며 아르는 레오에게 다가갔다.
디온도 그런 아르의 뒤를 따라갔다.
“검은 토끼, 너에게 물어볼 게 있…….”
“너와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레오 플로브.”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아르의 머리를 잡고 옆으로 치운 디온이 한 발자국 나섰다.
아르는 눈을 치켜뜨고 그런 디온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디온은 익숙한 듯 그런 아르를 무시했다.
“오랜만이야.”
“그래.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아즈렉에서의 입학 시험 전야제 이후 처음인가?”
작년 여름 방학.
아조니아의 입학 시험을 위해 아즈렉에 갔던 일을 떠올리며 레오가 피식 웃었다.
“너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늘 듣고 있었다. 아쉽군, 네가 아조니아에 왔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디온이 씩-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레오 플로브, 너에게 대련을 신청…….”
빠악-!
아르가 디온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에 디온이 아르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어.”
아르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데미안 내에 있는 동안 싸우지 말라고 아빠가 경고했잖아.”
“확실히 베르가 아저씨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
‘그 호전적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레오는 아르의 아버지이자 어머니 레이나의 친우이자 동료였던 아조니아의 교관, 수인 영웅 베르가를 떠올렸다.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원래 싸움은 몰래 하는 거다.”
“얼씨구, 네가 대련을 하면 잘도 몰래 싸울 수 있겠다.”
아무래도 디온의 전투 스타일은 꽤 화려한 모양이었다.
코웃음 치는 아르를 보며 디온이 말했다.
“아르, 너도 알 텐데. 강자에 도전할 때의 흥분감을 말이야.”
디온은 투기를 드러내며 레오를 바라보았다.
“내 힘이 우리 세대 중 최강이라고 평가받는 레오 플로브에게 얼마나 통할지 시험해보고 싶다.”
‘꽤 차분한 줄 알았는데 터프한 성격이군.’
레오는 피식 웃으며 디온을 바라볼 때였다.
“모두 집합! 각 영웅 사관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집합해라!”
아조니아의 교관, 베르가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말은 이곳에 있는 모든 2학년들에게 들릴 정도로 컸다.
모두가 놀라며 다급히 집합했다.
루메른의 아인을 필두로 세이룬의 헤르디움, 아조니아의 베르가. 그리고 데미안의 2학년 담당 스미스, 레타나까지.
각 영웅 사관 학교의 학생들끼리 모였다.
“아인 교수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스미스 전속 계약 기간 동안 루메른에서는 학생들에게 데미안에서의 자율행동을 보장했었다.
루메른 뿐만이 아닌 다른 영웅 사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듀란의 물음에 아인이 말했다.
“지금 교장님은 물론이고 2학년 세드젠 교수님께서 회의에 들어가셔서 너희에게 상황을 전하기 위해 왔다.”
루메른 학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가운데 아인이 말했다.
“대륙 동부에는 타르캄이라는 도시에 대해 알 것이다.”
드워프 영역의 끝자락.
규모가 큰 드워프의 대도시이자 수많은 마석과 희귀 광석의 생산지였기에 대부분 타르캄에 대해 알고 있었다.
“현재 타르캄에 이상 사태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에르디엔 산의 절반 만한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지. 그로 인해 타르캄의 경비병들이 패닉에 빠졌다고 하더군.”
그 말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르디엔 산이라면…… 1학년들 입학 시험 때 우리가 갔던 곳이잖아.”
“그 산을 덮을만한 괴물?”
“그런 괴물이 있어?”
2학년 대부분은 작년.
에르디엔 산의 모습을 직접 봤다.
높디높은 그 거대한 산을 직접 본 2학년들로서는 그 산의 절반만 한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로에가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레오?”
레오는 얼굴을 굳히고 서 있었다.
“레오, 무슨 일 있어?”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묻자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빙긋 웃으며 대답한 레오는 얼굴을 풀었다.
‘에르디엔 산의 절반만한 괴물이라고?’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렇게 거대한 생명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레오는 알고 있다.
그런 거대한 괴물을.
‘거인왕, 기아스.’
재앙의 시대 이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군단장.
그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있어 이제는 문헌에서 조차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잊힌 괴물.
‘놈은 신중한 성격이야. 아무리 마물 여왕이 토벌되었다고 해도 섣부르게 움직일 녀석이 아니야.’
그 거대한 몸집에 걸맞지 않게 거인왕은 매우 은밀한 군단장이었다.
‘놈이 움직였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레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타르캄에서는 이번 일과 관련되어서 데미안에게 조사를 요청했다. 그리고 교장 회의에서 이번 임무를 너희에게 맡겨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저희에게요?”
“그래. 정확하게는 조사를 위해 학교별로 혼합 파티를 짜는 것을 제안하셨지.”
그 말을 듣고 루메른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희도 알겠지만 다른 영웅 사관 학교의 학생들과 파티를 짜는 건 3학년 학과 일정에 포함되어 있다. 너희는 그걸 1년 일찍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셈이지. 교장님도 그걸 원하셨을 거다.”
“다른 영웅 사관 학교에서도 수락했나요?”
“그래.”
아인의 대답에 루메른 학생들이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겠는데?”
“세이룬 애들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에이. 그래도 전부 막돼먹은 애들만 있는 건 아닐 거야.”
“교수님! 파티 규모는 어떻게 되나요?”
“그건 학생들의 재량에 맡기기로 했다.”
아인이 팔짱을 꼈다.
“갑작스러운 임무 실습이지만 이번 건은 수행평가에 반영하기로 교수들끼리도 의견을 모았다.”
아인의 말에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반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데 이골이 난 루메른의 학생들이었다.
“스미스 전속 계약은 어떻게 되나요?”
“이번 임무 실습은 다음 주 까지다. 이후 남은 일주일 동안 스미스 전속 계약이 계속될 거다. 데미안 학생들로서도 우리를 더욱 잘 알 수 있는 기회이니 나쁠 건 없지.”
아인이 2학년들을 훑어보았다.
“우선 파티를 구성해라. 에르디엔 산으로 가는 것이니 만큼 신중하게 파티를 구성하는 게 좋을 거다. 다른 파티와 협력해도 좋다. 이번 임무 실습은 마물 출몰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전투는 필수일 테니까.”
아인의 말에 루메른 학생들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1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 실전이라는 말은 긴장감을 주기 충분했다.
“이번 임무 실습은 너희들이 이때까지 배운 걸 총동원하는 시간이 될 거다. 그리고 너희와 같은 세대의 영웅 후보생들과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기회지. 좋은 성과를 기대하도록 하겠다.”
“옙!”
***
“레오, 넌 어떻게 할 거야?”
칼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파티 구성.
칼에게 있어서 가장 큰 난관이었다.
칼은 전문적인 서포터 지망.
하지만 그건 부족한 실력 때문에 어쩔수 없이 선택하게 된 길이다.
루메른에서는 그런 칼의 선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다른 영웅 사관 학생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미지수였다.
칼의 물음에 레오가 말했다.
“칼, 이번엔 나랑 파티를 맺지 않을래?”
“그래 주면 나야 좋지.”
칼이 씩- 웃었다.
“그래서, 파티는 어떻게 구성할 거야? 생각해둔 애들 있어?”
칼의 물음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모아올 테니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을 남기고 레오는 세이룬 쪽으로 향했다.
루메른과 아조니아, 데미안의 학생들은 서로 활발하게 파티를 맺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세이룬 학생들을 향해 섣부르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이번 세이룬 학생들이 보여준 행동들은 다른 영웅 사관 학교 학생들이 섣부르게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다.
이번 임무 실습은 여러 종족의 영웅 후보생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종족, 문화, 가치관.
모든 것이 다른 이들이 힘을 합쳐야 하는 만큼 그 무엇보다 팀워크가 중요했다.
그리고 세이룬의 종족주의적 성향은 그런 팀워크를 무너트릴 확률이 매우 컸다.
그렇기에 일단 루메른, 아조니아, 데미안 학생들끼리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팀을 구성한 다음 신중하게 세이룬 학생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레오만은 가장 먼저 세이룬 학생을 파티에 끌어들이기 위해 세이룬으로 향했다.
물론 레오가 파티에 들일 학생들은 뻔했다.
“루니아, 에이란.”
레오가 세이룬 학생들 선두에 서 있는 두 학생을 보며 빙긋 웃었다.
“나랑 파티를 맺을래?”
레오의 권유에 빤히 레오를 바라보던 루니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이라면 들어줄게.”
“물론이죠! 레오님!”
에이란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레오는 아조니아 쪽으로 가 아르를 영입했다.
“검은 토끼. 너랑 파티를 짜면 재미있을 것 같아!”
아르 역시 흔쾌히 파티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레오가 선택한 데미안 학생은 드리아나였다.
“내 예술작품을 뭉개 버린 자네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
어느새 다시 원래 이상한 말투로 돌아간 드리아나는 레오의 제의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아무래도 아까 드리아나의 조각상을 망가트린 것에 앙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그런 드리아나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모델이 되어줄 만한 애들 모아놨어.”
그 말에 드리아나가 움찔했다.
“모델? 예쁜가?”
“그래. 외모는 내가 보장할게.”
“구미가 당기는군.”
고민하던 드리아나 역시 레오의 제의를 흔쾌히 허락했다.
드리아나를 데리고 파티가 있는 쪽으로 갔다.
한편. 루니아와 에이란, 아르가 자신의 앞에 있는 걸 보고 칼은 하늘을 바라보며 개탄했다.
‘그 녀석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런 초호화 멤버를 모아 둔 거야?’
사실상 낙제생급인 자신을 제외하고는 학년 대표급의 최고 우등생들뿐.
주변의 몇몇 학생들은 칼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칼을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분명 또 날로 먹는다고 뭐라 하고 있겠지.’
하지만 칼은 이번만큼은 정말 억울했다.
“칼 또 날로 먹네?”
주변을 지나가던 일리아나가 놀리듯 말했다.
“아니. 야! 생각 해봐! 내가 정말 날로 먹는다고 생각해?”
“응. 반장에 세이룬 학년 대표에 아조니아 학년 대표랑 같이 파티를 짰잖아. 그게 날로 먹는 게 아니면 뭐니?”
“너 레오 성격을 생각해봐! 걔가 얘들을 왜 모았겠어!”
칼이 울상을 지었다.
“엄청 험한 일 할 게 뻔하잖아!”
칼의 하소연에 일리아나가 멈칫했다.
확실히 칼의 말대로였다.
레오는 단순히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 우수한 인력을 모을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일리아나가 측은한 듯 칼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화이팅.”
“뭐야? 일리아나, 너도 내 파티에 들어 오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일리아나가 흠칫했다.
그리고 겁에 질린 얼굴로 레오의 얼굴을 보더니 그대로 후다닥 도망쳤다.
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 칼을 보며 레오와 함께 온 드리아나가 말했다.
“흠. 모델로서는 살짝 얼굴이 모자란데.”
“뭐야? 넌.”
“그런데 절망하는 얼굴은 걸작이군. 그대. 내 모델이 되어 볼 생각 없나?”
“모델?”
“그래, 누드모델.”
귀엽게 생긴 드워프 소녀가 진중한 말투로 누드모델을 제의하자 칼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얘도 데미안 학년 대표 출신이지?’
칼이 힐끗 고개를 돌려 루니아와 아르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 기분 나쁜 시선은?”
루니아가 살짝 삐딱한 반응을 보이자 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깡패에 바보에 변태에. 다른 영웅 사관 학교 대표들도 정상이 아니네.’
칼이 레오를 바라보았다.
레오는 그런 칼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칼은 잘 알고 있었다.
레오가 저런 미소를 지을 때면 일이 아주 힘들어진다는 걸.
1년 동안 옆자리에 앉은 절친으로서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망했네.’
칼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