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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웬일이다냐…… 대영웅의 집에 가볼 수 있다니!”
칼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 선물 같은 걸 사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겠지? 뭐 살만한 게 있나?”
“우리 근데 무일푼이잖아.”
에이란과 아르, 루니아도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들뜬 일행을 보며 드리아나가 말했다.
“어차피 카일님은 안 계시지 않나.”
그러면서 드리아나는 품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뭐에 쓰게?”
“카일님의 집에 초상화 같은 게 있다면 그려보려고 하네.”
“네 절망적인 솜씨로 그림 같은 걸 그리면 카일이 싫어하지 않을까?”
“레오, 그대같이 감성이 메마른 자와 달리 카일님께서는 내 예술적인 감성을 이해해줄 걸세.”
“그럴 일은 없어.”
레오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런 일행을 보며 데페세르는 빙긋 웃었다.
“카일님을 무척이나 존경하시나 보군요.”
“전 루나님을 가장 존경하지만요.”
“훗. 역시 아르온님이 최고죠.”
“누가 뭐라 해도 드웨노님이 최고의 영웅이시죠.”
루니아, 아르, 드리아나가 차례차례 말했다.
그리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들의 말에 데페세르가 쿡쿡- 웃었다.
“많은 아이가 여러분처럼 그분들을 존경하죠. 그럴 수밖에 없죠. 그분들은 이 절망의 시대에서 세계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신 분들이니까요.”
데페세르의 말을 듣고 에이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일님의 영웅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조금 전 데페세르의 흉흉했던 모습이 떠올랐지만 에이란은 용기를 냈다.
영웅담을 좋아하는 에이란의 눈은 어느새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에이란의 시대에서는 미지의 대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카일님의 영웅담이라…….”
데페세르가 빙긋 웃었다.
“전 사령왕 헬 카이저가 이끄는 죽음의 군단과 홀로 맞서 싸운 이야기를 가장 좋아합니다만.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서요.”
“사령왕의 군단과 홀로 맞서 싸운 이야기……? 설마 데리올라나 전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에이란이 눈을 크게 뜨며 묻자 데페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네? 데리올라나 전투는 루나님이…… 히익?!”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에이란이 깜짝 놀라 옆을 보았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레오가 에이란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레오와 눈이 마주친 에이란이 아차했다.
지금 시대에서 데리올라나 전투는 루나가 활약한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카일이 단독으로 싸웠던 전투였다.
재앙의 시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카일의 위업 중 하나다.
그런 상황에서 루나의 이야기를 꺼내면 괜한 의심을 살게 뻔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도 그 영웅담 좋아해서 또 듣고 싶어요.”
“훗. 그럼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이 시대의 드래곤들은 직접 본 영웅들의 위업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데페세르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레오를 제외한 파티원들은 그 이야기에 집중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데리올라나 전투와의 차이점을 비교하며 이야기를 듣던 루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직접 보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데페세르님도 이 전투를 직접 보셨나요?”
“예.”
데페세르의 말에 루니아가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이야기책에 나온 것 보다 더 엄청난 전투였잖아.’
“스켈레톤 킹 군단을 일격에 전멸시킨 카일님께서는 이렇게 소리치셨죠.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다, 사령왕.’라고 말이죠.”
데페세르의 말에 레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난 저렇게 말 안 했는데.’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영웅담을 전할 때 선의의 거짓말로 자신과 친구들을 잘 포장해준 모양이다.
새삼 데페세르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레오가 피식 웃을 때였다.
“아닌데요. ‘오늘이야말로 완전히 죽여주마, 이 개뼈다귀 새끼야.’라고 하셨는데요.”
어딘지 모르게 살짝 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페세르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일행은 통나무로 만든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삭막하기 그지없어 정원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공터 앞에 의자에는 한 엘프 소녀가 서 있었다.
“이런, 이야기에 집중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군요.”
데페세르의 말에 칼이 볼을 긁적였다.
“여기가 카일님의 집? 상상했던 거랑 조금 다르네.”
너무도 평범한 가정집을 바라보던 칼이 엘프 소녀를 보며 물었다.
“근데 쟤는 누구예요?”
“카일님의 제자인 베르키아입니다.”
“크흡!”
“헉!”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엘프 소녀를 바라보았다.
재앙의 시대 종결 이후.
엘프를 이끌었던 위대한 종족 지도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물의 등장에 모두가 놀랄 때였다.
“데페세르님. 걔들은 뭐예요? 이번에 정령의 영역을 침범했다던 애들인가요?”
“그래요, 베르키아양. 그리고 당분간 카일님의 댁에서 머무르실 예정입니다.”
그 말에 베르키아의 눈이 꿈틀거렸다.
“왜 카일 스승님의 집에 머무르는 건가요? 머무를 만한 곳은 많을 텐데요?”
“저도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드웨노님의 명령인지라.”
“드웨노님의?”
드웨노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에 베르키아는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반발하지 않았다.
“그럼 시간도 늦었고 하니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내일 데리러 오겠습니다.”
데페세르는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레오 일행과 베르키아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때였다.
“넌 네 집이 따로 있을 거 아니야? 이만 가.”
레오의 말에 베르키아가 말했다.
“난 스승님의 집을 정리해야 해.”
“정리?”
‘집에 정리할 게 뭐가 있다고?’
뜬금없는 베르키아의 말에 레오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현관으로 향했다.
‘집이라…….’
머나먼 과거에 사라진 자신의 집에 들어서게 된 레오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벌컥-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간 레오는 돼지우리처럼 어질러져 있는 집안 내부를 잠시 바라보더니 베르키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와…… 이건 조금 심한데.”
“카일님은 정리를 하시는 분은 아니셨나 봐요.”
“그래도 뭐랄까. 인간적인 면이 있어서 신기하네.”
칼이 혀를 내둘렀고 에이란은 어색하게 웃었다.
루니아는 빙긋 미소 지었다.
“아이 참. 카일 스승님도 문제라니까. 집을 이렇게 엉망으로 쓰시다니.”
팔짱을 낀 베르키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왔으니 어쩔 수 없지.”
허리에 손을 떡 하니 올린 베르키아가 말했다.
“너희도 이 집에 신세를 질 거잖아? 너희가 같이 치우지 않을래?”
“네, 알았어요. 베르키아님.”
에이란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에이란은 베르키아의 얼굴을 힐끗힐끗 보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존경하는 위대한 선조님이 눈앞에 있다.
어릴 때부터 베르키아의 영웅담을 듣고 존경해온 에이란으로서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됐다.
에이란이 집을 막 치우려 할 때였다.
레오가 손을 들어 그런 에이란을 제지했다.
그리고 베르키아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야.”
레오의 말에 파티 일행 전체가 기겁했다.
“야! 레오!”
“무슨 무례야!”
“상대는 베르키아님이야! 검은 토끼!”
“막말은 삼가게.”
칼이 다급히 레오를 말렸고 루니아는 눈을 치켜떴다.
아르와 드리아나 역시 당황하는 와중에 레오가 말했다.
“네가 어지른 건 네가 치워.”
“이, 이건 카일 스승님이 다 어지른 거야!”
“카일이?”
레오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옷가지 사이에 있는 걸 들어 올렸다.
“카일이 입기에는 성별에 맞지 않는 옷이 있는데?”
“이, 이리 내놔!”
베르키아가 레오에게 달려들었다.
손을 뻗어 레오의 손에 들려진 물건이 민망한 듯 베르키아의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레오가 획- 하고 던지자 베르키아가 다급히 달려가 등 뒤에 숨겼다.
“그리고 저건 누가 봐도 카일이 읽을만한 책이 아닌데? 숲속에서의 은밀한 밀…….”
“악! 악! 악!”
베르키아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드웨노랑 아르온을 불러올까? 이 집안 꼴 보고 뭐라고 반응할지?”
레오의 말에 베르키아가 귀를 축 늘어트렸다.
“내가 치울게.”
손님을 이용해 자신이 잔뜩 어지른 방을 청소시키겠다는 베르키아의 원대한 계획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귀까지 축 늘어트리며 청소를 시작하는 베르키아를 바라보며 카일을 제외한 일행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엘프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3대 영웅.
성운의 시조 루나, 혜성의 마법사 세이룬.
그리고 페어리 나이트 베르키아.
그중 한 사람의 추태를 본 루니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내 상상 속의 베르키아님이 더럽혀 졌어.”
“닦아.”
레오는 가차 없이 말했다.
그리고 힐끗 에이란을 바라보았다.
에이란은 조금 놀란 듯.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눈빛으로 베르키아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충격을 안 받은 것 같네.”
아르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묻자 에이란이 어색하게 웃었다.
“네. 제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분명 다르지만…… 그래도 뭐랄까? 더 좋아질 것 같아요. 어딘지 모르게 친숙해서요.”
“친숙?”
“네.”
“많이 닮긴 했어.”
레오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정말요? 어떤 점이요?”
에이란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레오가 말했다.
“방안을 돼지우리 수준으로 어지른다거나 이상한 망상을 한다거나.”
에이란은 울상을 지으며 레오에게 달려들어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런 에이란을 저지하며 레오가 베르키아를 바라보았다.
‘그래. 집에 와서 잔뜩 어지르고 가곤 했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레오가 헛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그나저나…… 지나칠 정도로 삭막하군.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야.”
드리아나가 방을 둘러보며 말하자 칼이 말했다.
“이 어질러진 걸 보면 그렇지 않은데?”
“그건 베르키아님의 소행이지 않은가?”
드리아나가 힐끗- 방의 가구들을 보았다.
“최소한의 필요한 가구만 있네. 그 외에는 공허할 정도로 모든 게 무미건조하게 정리되어 있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깔끔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아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드리아나가 턱을 쓰다듬었다.
“어쩌면 이 공간에 마음을 붙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군.”
“왜? 자기 집이잖아?”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모든 걸 깔끔하게 정리하신 게 아닐까 싶군.”
드리아나의 중얼거림에 레오가 쓴 표정을 지었다.
‘애들이 봐도 그런 게 느껴지나.’
가드스론을 떠날 때면 레오는 언제나 모든 걸 깨끗이 치웠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누군가에게 남길 만한 게 없었으니까.’
레오는 삭막한 방 풍경을 바라보았다.
남길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잔뜩 있는 이들은 자신에게 모든 걸 억지로 떠넘기고 먼저 갔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나 혼자만 남아 있군.’
레오가 씁쓸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저…… 베르키아님. 조금 도와 드릴까요?”
“진짜?”
루니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이룬에서 불량학생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루니아는 어쨌든 최고의 우등생이다.
아무리 그래도 위대한 종족의 영웅이 혼자서 처량하게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저, 저도 도와 드릴게요!”
“진짜 도와줄 거야?”
베르키아가 귀를 쫑긋거리며 묻자 에이란이 환하게 웃었다.
“네!”
순진하게 미소 짓는 에이란을 보며 베르키아가 음흉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도와주지 마, 버릇 나빠져.”
레오가 가차 없이 말하자 베르키아가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뭔데! 네가 카일 스승님이라도 돼?”
레오는 대답 대신 꿀밤으로 베르키아에게 화답해주었다.
“내일 아르온 스승님께 다 이를 거야!”
“일러라.”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레오는 베르키아의 머리를 한 대 더 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칼이 혀를 내둘렀다.
“쟨 진짜 가끔 보면 대단하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역사적인 인물을 저렇게 막 대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