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설급 영웅은 아카데미 우등생-291화 (291/483)

291

늦은 밤.

일행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영웅의 세계에 들어온 이후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으니 기절하듯 잠에 빠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베르키아 역시 수련에서 막 돌아와 피곤한 상태기에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을 자고 있었다.

탁-!

칼과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레오가 문을 열고 나왔다.

거실에 있는 식탁에 앉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 침묵도 반갑네. 옛날에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싫었는데.’

과거를 떠올리며 레오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우리가 들어온 히어로 레코드는 가드스론 공방전이야.’

[공략 목표: 거인왕을 저지하십시오.]

눈앞에 떠오른 공략 목표를 바라보던 레오의 눈이 가라앉았다.

가드스론 공방전.

타르타로스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두고 여러 군단장을 토벌하며 세계는 희망의 불씨를 피워올렸다.

하지만 이 가드스론 공방전에서 거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타르타로스가 입은 타격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가까스로 희망을 손에 넣었던 세계는 다시 거대한 절망과 조우하고 말았다.

당시 거인왕의 침공은 그만큼 막강했다.

‘지금의 군단장과 이때의 군단장은 같은 군단장이라고 해도 힘이 다르니까.’

재앙의 시대.

에레보스가 건재하던 시절.

타르타로스의 규모는 지금과 격이 달랐다.

세계가 멸망으로 치닫던 시기는 다른 말로 하면 타르타로스의 최전성기라는 말이기도 했다.

군단장들이 이끄는 군단의 힘은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다.

‘강대한 마족들도 많았지. 결정적으로 규모가 달랐어.’

군단장이 한 명 움직이면 마족의 군단이 끝없이 몰려왔다.

작년에 실라투나가 세이룬을 침공했을 당시.

실라투나가 이끌었던 군단의 규모는 지금과 비교한다면 귀여운 수준일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군단장들에게는 권능이 있었으니까.’

군단장의 권능.

그건 에레보스가 군단장에게 내린 고유의 능력.

권능이 없어도 전율스러운 괴물인 군단장을 더더욱 공포의 재앙으로 만드는 권능.

지금 시대의 군단장들에게는 그 권능이 없었다.

‘에레보스가 사라졌으니까.’

권능은 군단장의 힘이 아닌 에레보스의 힘.

카일에 의해 에레보스가 토벌되어 봉인된 지금.

군단장들 역시 권능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거인왕은 가드스론을 침공하면서 자신의 군단을 모두 잃었지.’

하지만 그 당시 가드스론은 정말로 멸망할 뻔했다.

‘가드스론이 멸망했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군.’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시대는 히어로 레코드라는 기적이 존재한다.

영웅의 힘을 계승시켜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키는 신의 선물.

그로 인해 지금 시대에는 재앙의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많은 영웅이 존재한다.

하지만 재앙의 시대는 달랐다.

대영웅들이 있었지만, 대영웅들을 받쳐줄 영웅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와 군단장들의 신세가 바뀌었군.’

지금 시대에서 군단장들은 여전히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단신으로 군단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영웅은 기껏해야 멜리나 뿐.

하지만 군단장을 따르는 군단은 힘을 잃었다.

‘군단장의 진정한 힘은 군단이니까. 영웅 한 명 한 명은 놈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지만…… 수많은 영웅은 거대한 위협일 수밖에 없지.’

카일과 리시나스, 루나가 자리를 비움으로 인해 일어난 전력의 공백을 노린 거인왕의 침공.

그리고 그 침공이 머지않았다.

‘많은 이가 죽을 거야.’

레오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데페세르 역시 이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베르키아를 구하다가 죽었지.’

지금 시대의 사람에게는 뼈아픈 역사지만.

레오에게는 알고 지내던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상황이 더욱 심각해.’

레오의 얼굴이 굳었다.

앞으로 일어난 가드스론 공방전의 양상은 실제와 다를 것이었다.

‘지금 시대에는 거인왕이 둘이야.’

레오가 주먹을 쥐었다.

드웨노의 히어로 레코드를 망가트리기 위해 거인왕이 영웅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

과거에도 가까스로 막아냈었다.

그런데 거인왕이 둘이라면?

‘가드스론은…… 무너진다.’

레오가 주먹을 쥐었다.

패배 이후는 명확했다.

드웨노의 히어로 레코드는 불타 사라질 게 분명했다.

레오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깃들었다.

‘그렇게는 둘 수 없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레오는 다짐했다.

‘무조건 막아낸다.’

타르타로스 측에 거인왕이 있다면.

가드스론에는 레오가 있었다.

‘과거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뻐끔- 뻐끔-

곰방대를 문 드웨노를 보며 아르온이 물었다.

“오늘 가드스론에 온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네.”

“아, 걔들?”

아르온이 빙긋 웃었다.

“잘 된 거 아니야? 그런 아이들이 있다면 분명 앞으로 에레보스와 맞서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렇겠지.”

탁-!

담뱃재를 털어내며 드웨노가 말했다.

“그런데 그 레오라는 애는 대단하던데. 카일 같더라니까?”

“올 클래스라서 그런 거 아닌가?”

“그런 것도 있지만…… 뭔가 분위기랄까? 그런 게 카일이랑 닮았었어.”

“…….”

드웨노가 멈칫했다.

그리고 레오에 대해서 떠올렸다.

‘불꽃의 본질이 파괴는 아니잖아?’

레오의 말을 떠올리며 드웨노가 입을 말아 올렸다.

“흥미롭군.”

수염을 쓰다듬은 드웨노가 말했다.

“아르온.”

“응?”

“그 아이들, 가르쳐 볼 생각이 없나?”

그 말에 아르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가르쳐 보고 싶은 아이들이 몇 명 있거든.”

의미심장하게 웃는 드웨노를 보며 아르온이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그래. 그렇다면 나도 한동안 바빠지겠군.”

“왜?”

“무구를 만들어야 할 것 같거든.”

드웨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희망이라는 아이들에게 선물할 무구를 말이야.”

***

다음 날 아침.

“레오 넌 분명 좋은 남편이 될 거야.”

칼의 말에 베르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리를 잘하네.”

“베르키아님도 도왔잖아요.”

“그렇긴 하지!”

베르키아가 가슴을 활짝 폈다.

“하지만 에이란도 도왔어. 착해.착해.”

베르키아가 에이란의 머리를 토닥이더니 드리아나 쪽을 바라보았다.

“드리아나가 만든 스튜도 맛있고. 야채를 괴상하게 깎긴 했지만.”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건 예술입니다.”

“예술? 다진 마물 형상인 거야?”

칼이 스푼으로 스튜에 있는 감자를 건지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드리아나는 앙증맞은 손으로 칼의 등을 쳤다.

“농담도 잘하는군.”

“컥?!”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에 칼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가까스로 아픔에서 벗어난 칼이 몸을 일으키더니 루니아와 아르를 바라보았다.

“너희도 수고했어.”

칼이 끅끅- 웃음을 참았다.

“물론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수준이었겠지만.”

“칼. 이것 하나만 알려 줄까?”

루니아가 빙긋 웃으며 우아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칼의 멱살을 잡고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제 우등생 연기 같은 건 때려치웠거든? 더 이상 내 성질 건드렸다간 알지?”

“우등생 때려친다고 깡패가 되는 건 이상하잖아!”

“앙? 내 본 모습에 불만 있냐?”

“히익?”

살벌한 기세를 내뿜는 루니아를 보며 칼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칼을 보며 아르가 손톱을 세웠다.

“손톱이 근질근질한 게 나무 대신으로 널 긁어도 될까?”

“난 물렁물렁해서 긁는 맛 없어!”

칼이 비명을 내지를 때였다.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요리를 끝낸 레오가 식탁 위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가장 먼저 베르키아가 냉큼 음식 접시를 집더니 먹으며 말했다.

“뭐랄까, 익숙한 맛이야.”

신기하다는 얼굴로 냠냠- 레오가 만든 음식을 먹는 베르키아를 보며 다른 이들도 허기를 채웠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나가요.”

칼이 현관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야.”

문을 열고 들어온 아르온을 본 아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 일이 떠오른 에이란과 칼은 그런 아르의 어깨를 눌러 강제로 앉혔다.

아르온은 그런 아르를 보며 살짝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르온을 보며 아르가 사냥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몸을 움찔거릴 때였다.

콱-!

“으냐아악?”

엉덩이 쪽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아르가 펄떡 뛰었다.

“무례하게 숙녀의 꼬리를 잡는 거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럼 흥분해서 달려들려고 움찔거리지 마.”

레오는 시큰둥하게 말하며 아르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아르를 진정시킨 레오는 아르온에게 음식을 내어주었다.

“아, 고마워.”

아르온은 그걸 먹더니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뭔가 엄청 익숙한 맛이다.”

맛있게 음식을 먹는 아르온과 베르키아를 보며 레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침부터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응. 너희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서.”

“제안?”

레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레오를 보며 아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희에게 무술을 가르쳐주고 싶어.”

아르온의 말에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희 두 사람. 잘 가르쳐준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 번 나에게 배워 볼래?”

아르온은 아르와 에이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배울래요! 배우게 해주세요!”

아르는 흥분해서 소리쳤고 에이란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런 둘을 보며 칼이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겠다.”

그런 칼을 보며 아르온이 빙긋 웃었다.

“칼이라고 했지? 루니아, 드리아나. 너네 셋은 드웨노가 직접 가르쳐준다고 했어.”

“예?”

“드, 드웨노님께요?”

칼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고 드리아나는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루니아 역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가 말한 시험은 이런 것이었나?’

대영웅에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니.

영웅 후보생 입장에서는 이보다 큰 영광은 없었다.

“그럼 레오는요?”

루니아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레오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레오가 피식 웃었다.

“난 따로 할 게 있어. 그러니 신경 쓰지 마.”

“따로 할 거?”

아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준비는 내가 하고 있을게.”

레오의 말을 듣고 모두의 안색이 돌변했다.

레오가 말하는 준비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공략 준비를 혼자서 한다고?’

“그러니 너희는 최대한 많은 걸 배워.”

***

아침이 끝나고 레오를 제외한 모든 이가 집을 떠났다.

파티원들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이번 영웅의 세계에서 군단장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특히나 군단장의 공포를 실제로 경험한 루니아, 에이란, 칼의 얼굴은 무거웠다.

‘녀석들에게는 기회야. 아르온과 드웨노에게는 배울 점이 많을 테니까.’

그들의 가르침은 영웅으로서 거대한 도약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었다.

레오는 집을 나섰다.

‘일단 영웅의 세계에 들어온 기아스 놈에게 대응할 만한 힘이 우선이야.’

군단장이 두 명이라면 지금의 가드스론 전력으로는 침공을 막아내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영웅의 세계를 불태우러 온 기아스에게도 불안점은 있어.’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놈은 과거의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

군단장의 진정한 공포는 군단장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군단이 함께할 때다.

군단과 함께 움직일 때야말로 군단장의 진정한 힘이 발휘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시대에서 거인왕이 두 명.

하지만 거인왕의 군단은 결국 이전과 변함이 없다.

‘과거의 자신과 힘을 합할 수도 없어. 놈은 혼자서 움직인다.’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인왕 기아스는 그 전율스러운 덩치에 비해 굉장히 신중하며 의심이 많은 성격이다.

만약 과거의 기아스가 또 다른 기아스를 만난다면?

‘죽이려고 할 게 분명해.’

미래에서 과거로 오는 건 불가능하다.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그 비상식을 배제하는 것이 거인왕의 방식이다.

과거의 기아스는 미래의 자신을 절대 믿지 않으려 할 게 분명했다.

‘각개 격파가 가능하다는 소리지. 그렇다면 공략이 불가능하지는 않아.’

터벅- 터벅-

가드스론의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어둡지만, 그 눈빛에는 희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레오는 인적이 드문 길로 빠졌다.

가드스론의 길이야 눈에 훤했다.

잠시 후.

인적이 완전히 사라진 레오는 허름한 저택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리시나스의 저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