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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집에 돌아온 레오는 집안에서 하나같이 엉망이 되어 있는 파티원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은 가지만…… 그래도 물을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레오는 비교적 멀쩡한 칼에게 물었다.
물론 칼도 평소와 달랐다.
마치 우등생처럼 책을 붙잡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르는 오늘 하루 종일 아르온 님께 이론 수업만 들었대.”
칼은 자신의 옆에서 머리에 쥐가 나는지 엎드린 채 머리를 붙잡고 중얼중얼거리고 있는 아르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호흡은 이 타이밍이에 해야 하고…… 소리는…… 끄아아아아!”
벅벅-! 머리를 긁으며 눈이 핑글핑글 도는 아르에게서 시선을 뗀 칼이 이번에는 에이란과 베르키아를 가리켰다.
“저쪽은…….”
“야, 붙어.”
“또, 또요? 저 이제 힘들어서 못 움직이겠는데요? 그리고 베르키아님이 절 이기시잖아요.”
“시끄러워. 나와. 그리고 나랑 붙어.”
베르키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에이란에게 대련을 요구하고 있었다.
에이란을 끌고 강제로 집밖으로 나가려는 베르키아.
레오는 그런 베르키아를 붙잡고 에이란에게서 떨어트렸다.
에이란은 다급히 레오 뒤에 숨었다.
“싫다는 애랑 왜 싸우려고 하는 건데?”
“내가 훨씬 강하다는 걸 증명할 거야.”
“베, 베르키아 님이 훨씬 강하시잖아요! 오늘도 몇 번이고 절 쓰러트리셨으면서!”
“납득이 안 가!”
베르키아가 소리쳤다.
그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마검사로서의 역량은 에이란에 비하면 형편없어서 그런 거군.”
베르키아가 움찔하며 레오를 바라보았다.
기사로서.
마법사로서.
각각의 역량을 놓고 본다면 에이란보다 베르키아가 위였다.
루나와 아르온이 자신의 모든 것들을 쏟아부어 키운 것이 베르키아였다.
비록 별의 마법을 익히지 못했으며 종족이 달라 아르온의 오러 스킬을 온전하게 배우지 못했지만 역량은 에이란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마법과 무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루나와 아르온의 직계 제자니까.’
결정적으로 베르키아는 요정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
에이란은 요정의 힘의 편린만 가지고 있을 뿐.
베르키아는 요정의 마법 그 자체를 사용할 수 있으니 역량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클래스의 능력을 융합시킨 마검사로서의 역량은 에이란이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에이란의 기술은 지금의 베르키아가 먼 훗날에 완성시킨 것들.
어떤 의미에서 에이란은 미래의 베르키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검사 수련을 게을리한 모양이네.”
“아, 아니야! 열심히 했거든!”
‘이게 툭하면 거짓말이네.’
발끈하는 베르키아를 보며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나저나! 너! 열여섯이라며! 다 들었어!”
베르키아가 레오 앞으로 다가와 양 허리에 손을 올렸다.
“연상 누나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앞으로 다른 애들처럼 나한테 꼬박꼬박 존댓말하고 정중하게 대…… 아아아아아아악?!”
레오는 양 주먹으로 베르키아의 관자놀이에 주먹 돌리기를 먹여주었다.
울상이 된 베르키아가 에이란에게 매달려서 위로받았다.
“넌 진짜 역사 속 위인에게도 가차 없구나?”
칼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레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쪽에 무릎을 모아 앉아 넋이 나간 드리아나를 가리켰다.
“쟨 왜 저러고 있어?”
“드웨노 님이 예술 따위는 집어치우고 무기나 만들래.”
“…….”
“엄청 무섭더라.”
드리아나에게 다가가니 ‘나는 쓰레기입니다. 예술 님께 사과드립니다’ 등등.
이상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예술 작품이라고 이상한 거 보여준 모양이군.’
안 봐도 알겠다는 듯 레오가 한숨을 쉬었다.
“루니아는?”
“방에서 쉬고 있어. 사실 걔가 제일 고생했어.”
“왜?”
“드웨노 님의 불꽃의 정수를 삼켰거든.”
레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불꽃의 정수를 삼켰다고?”
“응.”
불꽃의 정수.
레오 역시 드웨노의 불꽃의 정수를 가지고 있다.
물론 루니아와는 다르다.
레오가 가진 건 드웨노의 불꽃, 그 자체.
루니아가 가진 것은 그 불꽃의 일부분이다.
‘불꽃을 나누어준다는 건 자신의 불꽃이 약화되는 걸 의미하기도 해.’
확실한 후계자가 정해졌다면 모를까.
지금 시대상을 고려한다면 불꽃의 정수를 나누어주는 건 드웨노에게 있어서도 굉장한 타격이다.
“넌 뭘 보고 있는 거야?”
“나? 드웨노 님께서 주신 연금비술서.”
‘루나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자네는 내 연금비술서를 보고 이상한 약을 만들고도 남을 인성 말아먹은 엘프 아닌가?’
‘쩨쩨해!’
‘사랑의 묘약 같은 건 내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 자네 힘으로 사랑을 쟁취하게.’
‘그런 거 보려는 거 아니거든!’
잔뜩 붉어진 얼굴로 루나가 소리쳤다.
‘사랑의 묘약이 어쨌다고?’
‘아무것도 아니야.’
카일이 등장하자마자 루나는 냉큼 자리를 떠났다.
‘쟨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저래?’
‘난들 알겠는가? 루나는 내가 본 엘프 중 가장 바보 같은 엘프일세.’
‘그렇지.’
‘그리고 자네는 내가 본 인간 중 최고의 등신일세.’
드웨노의 가차 없던 말을 떠올리며 레오가 물었다.
“거기 사랑의 묘약 같은 것도 있냐?”
“있던데?”
헛웃음을 터트리던 레오가 생각에 잠겼다.
‘드웨노, 대체 무슨 생각이지?’
처음 보는 이에게 불꽃의 정수를 서슴없이 나누어주고 동료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연금비술서를 건네주었다.
‘대체 왜?’
당혹감을 느꼈다.
까앙-! 까앙-!
늦은 밤.
드웨노의 용광로가 불타고 있었다.
그런 드웨노를 보며 아르온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네.”
“뭐가 말인가.”
“넌 밤이면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잖아.”
까앙-! 까앙-!
“그런데 무기를 치고 있으니 놀라울 수밖에.”
“이 몸은 예술가이지만 부업으로 대장장이 일도 겸하고 있네.”
“아니…… 대장장이가 주업 아니야?”
“아르온. 내가 왜 카일 그 바보와 루나, 그 멍청이를 바보와 멍청이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왜?”
“감히 날 대장장이로 취급하기 때문일세.”
드웨노가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가?”
“아니.”
드웨노가 다시 망치질을 시작했다.
까앙-! 까앙-!
망치질을 멈춘 드웨노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칼날을 물에 집어넣었다.
치이이이이익-!
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맹렬한 수중기가 울려 퍼졌다.
“음, 새것 같군.”
에르퀸트의 칼날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드웨노가 말했다.
“아르온.”
“응.”
“아직도 미래가 두렵나?”
“두려워.”
아르온의 눈이 가라앉았다.
“너도 두렵잖아.”
“두렵지.”
드웨노가 빙긋 웃었다.
“그래도 용기를 잃지 말게.”
드웨노가 용광로에 금속 광석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자네의 용기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니 말일세.”
* * *
쿵-! 쿵-!
지축이 흔들렸다.
지상의 이들이 공포에 질려 산보다도 거대하고 전율스러운 거인에게 절을 올렸다.
“위, 위대한 거인왕이시여. 어찌하여 이런 누추한 곳에 직접 행차하셨습니까?”
기아스는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고개를 조아린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세계를 배신하고 타르타로스에 붙은 배신자였다.
기아스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령왕은 이들을 쓰기 좋은 장기 말로 취급하지. 하지만 한 번 배신한 자들은 또다시 배신을 하는 법.’
물론 이들이 또다시 배신한다고 해도 타르타로스에 위해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아스는 이런 부류의 자를 혐오했다.
“내가 곧 가드스론을 공격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예!”
“병력이 필요하다. 네놈들을 조금 써야겠군.”
“저, 저희를요? 거인왕께서는 강대한 군단을 가지고 계신데 어찌 저희 따위가 거인왕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거인왕의 군단이 있다면 가드스론을 치는 데 이들 따위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죽기 싫다는 건가. 얄팍하기는.’
이들 입장에서 가드스론을 공격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세계 최후의 요새 가드스론.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철혈의 요새를 치는 건 죽음과도 같았다.
목숨을 위해 세계를 배신한 자들이다.
가드스론 주변에는 얼씬도 하고 싶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물론 너희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지.”
쿠구구구-
거인왕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공간이 열리며 거기서 무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나 거인왕이 직접 빚어 만든 무구가 있다면! 네놈들도 조금의 도움은 되겠지.”
후두두두둑-!
배신자들의 앞으로 마신기들이 쏟아졌다.
“쥐어라.”
거인왕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가드스론을 공격해라.”
거인왕의 말과 동시에 배신자들이 허겁지겁 무구를 쥐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 희열이 떠올랐다.
이 당시만 해도 기아스의 무구는 지상 최강의 무구로 불리었다.
거인왕은 환성을 내지르는 배신자들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 무구들은 거인왕의 창작물이 아니었다.
신의 대장장이, 드웨노의 무구를 따라 만든 것에 불과했다.
‘기다려라, 드웨노. 네놈이 만든 무구와 똑같은 무구들로…… 네놈을 무너트려 주마!’
기아스의 얼굴에 살기가 번뜩였다.
* * *
“오늘 하루 정도는 푹 쉬는 게 어때?”
영웅의 세계에 온 지 9일째 되는 날.
레오가 드웨노를 찾아가 덤덤히 말했다.
그 말에 곰방대를 뻐끔거리던 드웨노가 말했다.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더니 뜬금없이 찾아와서 푹 쉬자는 건가? 음, 확실히 친구들이 걱정되긴 하겠군.”
“내 친구들만 말하는 게 아니야.”
“……?”
“도시 전체를 푹 쉬게 하자는 거야.”
그 말에 빤히 레오를 바라보던 드웨노가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자네들. 대체 뭔가?”
“대답할 수 없어.”
“놀라지도 않는군.”
드웨노가 곰방대를 뻐끔거렸다.
“마치 내가 뭘 알아차렸는지 알고 있는 듯해.”
드웨노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담배 연기를 내뱉은 후 말했다.
“뭐가 오는 거지?”
“거인왕, 기아스.”
“과연.”
드웨노의 눈이 가라앉았다.
끙차- 드웨노가 몸을 일으켰다.
“데페세르에게 말해두겠나. 도시를 지키는 이들에게 오늘 하루만큼은 푹 쉬라고 일러두겠네.”
“……고마워.”
“한 가지만 더 묻지.”
드웨노가 빙긋 웃었다.
“미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한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아름다워.”
“그것 참 보람찬 대답이군.”
환하게 웃는 드웨노에게 등을 돌린 레오가 이를 악물었다.
‘처음부터 미래에서 왔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겠지.’
드웨노는 지혜롭고 눈치가 빠르다.
조금씩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일행을 보고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미래에서 온 걸 밝혔다.
하지만 차마 자신이 카일이라는 사실은 드웨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해.’
미래를 꿈꾸며 나아가는 동료에게.
너는 에레보스에게 패배해 죽는다고.
세상의 구원을 끝내 보지 못한다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저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을 전한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레오는 생각했다.
* * *
그날 저녁.
카일의 집에서 파티원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은 드웨노와 아르온이 찾아왔다는 점이었다.
칼과 드리아나는 드웨노에게 연금술과 대장장이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베르키아는 에이란을 붙잡고 요정의 힘을 다루는 법에 대해 듣고 있었다.
“그, 그렇군요.”
메모까지 하며 감탄하는 에이란을 보며 베르키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다 좋은데, 에이란.”
“네.”
“왜 자꾸 날 할머니 취급하는 거야?”
“그, 그런 적 없는데요?”
“눈빛이 날 할머니 취급이거든?”
베르키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르는 아르온에게 활약상을 듣고 싶었다.
“아르온 님이 전부 쓸어버린 거군요!”
“아니, 카일이 했는데…….”
“아르온 님이 카일 님에게 용기를 준 거군요!”
“아니…… 카일이 나한테 용기를 준 건데.”
물론 아르온 만능주의적 사상으로 아르온을 지나치게 띄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레오가 중얼거렸다.
‘신기한 풍경이네.’
절대 만날 수 없는 현재와 과거가 이야기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물론 현재의 이들에게 과거의 이들은 찰나의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레오에게 있어서는 양쪽 모두 현실이었다.
‘이 경험을 발판 삼아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오가 옆을 보았다.
“넌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루니아는 그녀답지 않게 귀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레오의 물음에 루니아가 말했다.
“칼도 드리아나도, 에이란도…… 심지어 아르도. 요 며칠 동안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갔어.”
루니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나만 얻은 게 없어.”
“드웨노의 불꽃의 정수.”
“……카타리우 님이 포기하래. 나에게는 재능이 없대.”
“그 싸가지 없는 조류의 말은 깊게 안 듣는 게 좋아. 듣고 있으면 한없이 위축될걸?”
레오의 말에도 불구하고 루니아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나…… 기고만장한 것 같아. 세이룬 대표로서 조금 잘나간다고…… 너에게 루나 님의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해져서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루니아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 정말 루나 님의 마법을 계승해도 되는 걸까?”
“그러니까 그 조류 녀석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 게 좋…….”
한숨을 쉬며 루니아를 위로하던 레오가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돌변하는 드웨노와 아르온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설마?’
[공략 목표: 거인왕의 침공을 저지하십시오.
[신의 대장장이]와 [용자]를 생존시키십시오.]
갑작스럽게 갱신된 공략 목표를 보며 파티원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왜 그래?”
베르키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왔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소름 돋는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