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푸슉- 푸슈슉-
잘린 기아스의 목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치이이익-!
바닥에 쏟아진 핏물이 주변 일대를 오염시켰다.
강력한 독성을 지닌 군단장의 피는 그 자체만으로 살과 뼈가 녹아내리는 끔찍한 독극물이었다.
그러나 드웨노는 그런 군단장의 피를 뒤집어썼음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언제 맡아도 지독한 냄새로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는 드웨노를 멀리서 바라보며 레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제봐도 징그러운 맷집이군.’
카일과 아르온도 군단장의 피를 정면에서 뒤집어쓰는 것은 되도록 피할 정도였다.
스윽-!
그때 기아스가 발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기아스의 발이 그대로 드웨노를 깔아뭉갰다.
그 여파로 피 웅덩이 속 피가 높게 치솟더니 파도가 되어 레오를 덮쳐왔다.
철퍽-!
급하게 검은 파도를 피한 레오가 고개를 들어 기아스의 목을 바라보았다.
‘타격은 입혔지만…… 역시 큰 타격은 아닌가.’
애초에 레오의 공격 자체가 먹히지 않았다.
기아스 입장에서는 작은 생채기에 불과했다.
그저 빈틈을 만드는 역할만 했을 뿐이고 그 틈을 드웨노가 정확하게 파고든 것이다.
목이 잘리긴 했으나 기아스에겐 큰 피해가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기아스는 루나가 가진 최강의 마법.
종언에 직격당했음에도 살아남은 엄청난 방어력을 지닌 존재였다.
쿠구구구구구-!
지축이 흔들렸다.
“흐읍!”
기아스의 발바닥에 깔린 드웨노가 양손을 치켜들고 발을 밀어내고 있었다.
“흐랴아아압!”
화악-!
이마에 힘줄이 솟은 드웨노가 온 힘을 다해 기아스의 발을 밀어냈다.
쿠쿵-!
기아스가 두세 걸음 뒷걸음질 쳤다.
드웨노는 배틀 엑스를 어깨에 걸치며 투덜거렸다.
“사람을 밟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군.”
“댁이니까 그 정도로 끝났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지금쯤 흔적도 안 남았을걸?”
“튼튼함이야말로 드워프의 장점이 아닌가?”
“당신은 지나치게 튼튼하지만.”
껄껄! 호탕하게 웃는 드웨노를 보며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짐짓 여유로워 보이는 대화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감각은 모두 기아스에게 쏠려 있었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곧바로 전투에 돌입할 기세였다.
-재미있군.
기아스가 자기 머리를 들어 목에 가져다 댔다.
잘렸던 목이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레오 플로브. 네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다.
기아스의 서늘한 시선이 레오에게 향했다.
-네놈은 여기서 확실히 죽이는 게 좋겠군.
기아스의 살기 어린 시선에 레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날 신경 쓰다가는 네가 먼저 죽을 텐데?”
-크흐흐흐. 네놈은 너 자신을 너무 과신하고 있군.
기아스가 비웃음을 날렸다.
-내가 경계를 하는 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너다. 햇병아리인 네놈은 지금 이 싸움에 설 자격조차 없지. 나와 드웨노의 싸움의 한복판에 발을 디딘 순간…….
기아스의 눈이 번뜩였다.
-네놈의 죽음은 결정된 거다! 이 아둔한 놈!
콰가가가가가강-!
기아스가 요르문간드의 사체검을 휘둘렀다.
단 한 번의 검격에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듯 주변 일대가 초토화 되었다.
가공할 만한 덩치에서 나오는 가공할 만한 공격.
그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레오가 기아스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지금의 내 힘으로 이 싸움에 끼어드는 건 일러.’
레오의 공격은 기아스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
온 힘을 쏟아부어서 상처를 입힌다고 해도 작은 틈을 만드는 게 고작.
하지만 이제는 그 틈조차 만드는 것도 힘들 것이다.
기아스에게 같은 방식이 두 번은 통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레오의 힘으로는 이 전투의 판도에 영향을 끼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반대로 기아스는 레오를 죽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드웨노와 기아스의 싸움에 휘말리는 것만으로도 레오는 죽을 수도 있다.
그만큼 차원이 다른 싸움터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레오가 드웨노를 따라온 이유는 있었다.
화악-!
“드웨노!”
허공에 몸을 띄운 레오가 소리쳤다.
그와 함께 드웨노가 레오를 향해 도약했다.
레오는 온몸의 오러를 쥐어짜 검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자신에게 도약한 드웨노에게 검면을 보여주었다.
탁-!
드웨노가 검에 착지했다.
“확실히 전투가 편하군.”
히죽- 웃는 드웨노를 향해 같은 웃음을 지어준 레오가 있는 힘껏 기아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레오를 발판 삼아 드웨노가 엄청난 속도로 기아스를 향해 돌진했다.
-아니?!
기아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레오가 억지로 이 전투에 발을 들인 이유.
그건 철저하게 드웨노의 발판이 되기 위해서였다.
드웨노가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게.
가장 완벽하게 힘을 낼 수 있게.
레오는 철저하게 드웨노의 서포터로서 이 자리에 섰다.
‘아이러니하군.’
과거에 드웨노가 해주었던 역할을 자신이 하다니.
하지만 그런 만큼 더더욱 완벽하게 이 역할을 소화할 수 있었다.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기아스의 분노 어린 시선이 레오에게 향했다.
그런 기아스를 바라보며 레오가 싸늘하게 웃었다.
“네놈이 세운 계획의 가장 큰 변수.”
***
가드스론의 성벽 위.
아르온은 드웨노와 기아스의 전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드웨노와 기아스의 대결은 말 그대로 방패와 방패의 대결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단번에 큰 데미지를 입힐 공격 수단이 없다.
그렇기에 길고 지루한 소모전을 펼쳐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성이 가장 나쁜 상대끼리의 싸움.
하지만 그 처절한 전투에서 우위는 드웨노가 확실하게 가져가고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레오의 존재였다.
‘벌써 몇 시간 째지?’
아르온의 눈이 레오의 움직임을 좇았다.
아르온의 눈에 비친 레오는 단순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끊어질 듯한 줄 위에서 미친 듯이 전력 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멈추고 사소한 실수라도 저지르는 순간 죽음으로 직결된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수십 번도 더 죽었을지 모를 일.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아 드웨노를 서포터 하고 있다.
단순히 압도적인 기술과 수읽기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초인적인 정신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
‘늘 죽음을 곁에 두었던 자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능력.’
그 처절한 사투를 보며 아르온은 레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사지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자신들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아르온은 손을 쥐락펴락했다.
‘곧 새벽이야.’
음울하기 짝이 없는 새벽 동이 틀 시간.
레오는 새벽까지 아르온에게 힘을 비축해 두라고 일러뒀다.
가드스론을 공격하는 기아스의 군단은 가드스론의 성벽에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거인왕이 직접 공격을 했는데…… 고작 이게 전부라고?’
아르온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리시나스와 카일…… 루나가 없는데 이렇게 쉽게 거인왕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다고?’
언제부터 군단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였단 말인가?
이번 침공은 너무도 허술한 점이 많았다.
아르온이 직감이 소리쳤다.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라고.
“데페세르.”
“예, 아르온님!”
“리시나스와 아직 연락이 닿지 않나요?”
“예. 다른 군단장의 결계로 리시나스님과 카일, 루나님은 레이사르 내부에 갇혀 있는 것으로 예상됩니다. 언제 세 분에게 통신이 닿을지는…….”
데페세르의 말에 아르온이 이를 악물 때였다.
“아르온 스승님! 이대로라면 큰 피해 없이 놈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참 적들의 공세를 막아내던 베르키아가 전황을 전하기 위해 달려왔다.
미래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시대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영웅들이 최선을 다해 군단의 침공을 저지하고 있다.
드웨노는 확실하게 기아스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아르온이 나서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전투의 승기는 서서히 가드스론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럴수록 아르온의 불길한 예감은 극에 달했다.
안타깝게도 이 불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화륵-
순간 베르키아의 등 뒤로 작은 불씨가 치솟았다.
아르온이 몸을 일으켰다.
베르키아에 더더욱 가까이 있던 데페세르는 본능적으로 베르키아를 잡아끌었다.
“아?”
베르키아가 당혹스러운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
화악-!
허공에 갑자기 눌어붙은 쇳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온의 예민한 후각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드웨노의 냄새…… 카일의 냄새…….’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지만 드웨노가 만들고 카일이 사용한 무구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에레보스의…… 냄새!’
화르르르륵-! 콰가가가강!
검은 불꽃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불꽃은 순식간에 베르키아와 데페세르를 휩쓸었다.
화악-!
아르온이 오러를 일으켜 검을 불꽃을 날려 보냈다.
“베르키아! 데페세르!”
아르온이 다급히 소리쳤다.
불꽃이 걷히고 데페세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품에 안긴 베르키아의 턱이 덜덜 떨렸다.
“데, 데페세르님…… 괜…… 괜찮…….”
“괜찮으십니까? 베르키아 양?”
온몸이 타들어 가고 있음에도 데페세르가 미소를 지었다.
“전…… 전 괜찮은데…… 데페세르님이……!”
“큰 상처가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시길.”
베르키아를 안심시키려는 듯 데페세르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베르키아를 뒤에 두고 일렁이고 있는 검은 불꽃을 노려보며 뒷걸음질 쳤다.
데페세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앙의 불꽃!’
데페세르는 세계를 불태우는 에레보스의 불꽃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검은 불꽃은 그 재앙의 불꽃 그 자체였다.
‘어떻게 가드스론에……!’
신들조차 절망하게 만든 태초의 악.
절대적인 절망, 에레보스.
세계를 불태우는 파멸적인 괴물에게도 약점은 존재했다.
바로 자신의 영역 이외의 곳은 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타르타로스의 군단장을 거느린 이유 역시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가드스론은 아직 재앙의 불꽃의 영향이 닿지 않는 땅.
그런 이 땅에 검은 불꽃이 나타났다.
스릉-!
아르온이 브레이브를 뽑았다.
그리고 일렁이는 검은 불꽃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악-!
아르온의 검이 검은 불꽃을 베어냈다.
화르륵-! 콰아아악!
검은 불꽃이 아르온을 덮쳤다.
“아르온 스승님!”
베르키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오러 아머로 공격을 방어해낸 아르온은 불꽃을 뚫고 나와 본체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파앙-!
검은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에레보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약해.’
아르온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챙그랑!
쇳조각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화르륵-!
하지만 이내 쇳조각은 불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더욱 강하게 타올라?’
아르온이 놀랄 때였다.
“저게 뭐야?”
“검은 불꽃?”
이상 사태가 감지한 영웅 후보생들이 달려왔다.
아르와 칼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요, 검은 불꽃이라면…….”
“아니.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에이란과 드리아나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루니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레보스……!”
화르르르륵-
검은 불꽃은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화르륵-!
사람의 형태로 변한 불꽃의 덩어리.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이었지만 그 모습은 확실하게 사람의 형태였다.
아르온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얼굴에 살기가 깃든 아르온이 검은 불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화르륵-!
그 순간, 검은 불꽃의 손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더니 검의 형태를 취했다.
채앵-!
검과 검이 교차했다.
콰악! 쾅-!
검은 불꽃은 아르온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 성벽에 처박혔다.
“역시 아르온님이야!”
아르가 환성을 내질렀다.
후두둑-!
검은 불꽃이 몸을 일으켰다.
아르온은 추가타를 위해 보이지 않는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채앵-! 콱-!
그 순간 검은 아르온의 검을 흘려내고 반격했다.
아르온이 목을 꺾고 최소한의 동작으로 검을 피했다.
그 순간 베르키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도 안 돼…….”
“왜, 왜 그러시나요? 베르키아님?”
에이란이 당황하며 물었다.
타닥-!
검은 불꽃과 거리를 벌린 아르온의 눈이 흔들렸다.
방금 전 공방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떠올랐다.
“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