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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왕 기아스는 가드스론 내부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전율했다.
‘어찌하여 위대한 분의 의지가 저 가증스러운 성벽 너머에서 느껴진단 말인가!’
거인왕 기아스는 그 누구보다도 에레보스를 신봉하는 군단장이었다.
타르타로스의 총사령관.
사령왕 헬 카이저보다도 충직한 에레보스의 심복.
평소에는 그 누구보다도 신중했지만, 에레보스의 명령이라면 그 누구보다 저돌적인 성격으로 변모하는 자이기도 했다.
이번 원정 역시 가드스론을 멸망시키라는 에레보스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군단을 이끌고 가드스론을 침공하러 온 기아스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스드론의 주변으로 워프한 순간 자신과 똑같은 힘을 가진 군단장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자신이 있다는 사실에 기아스는 강한 의문을 느꼈다.
‘과연 가드스론을 공격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절대적인 신의 명령.
그러나 또 한 명의 자신이 있다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상황은 기아스로 하여금 큰 의심을 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런 가운데 가드스론에서 에레보스가 느꼈다.
그것은 기아스에게 있어 신탁이나 마찬가지였다.
-군단이여! 신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
희열에 찬 기아스의 외침과 동시에 군단이 맹렬하게 가드스론에 돌격하기 시작했다.
기아스 역시 가드스론의 성벽을 무너트리기 위해 돌격하려 할 때였다.
번쩍-!
황금색 섬광이 비추었다.
그와 함께 기아스의 시선에 한 명의 수인이 보였다.
-가증스러운 아르온이군! 나의 앞길을 막지 마라!
기아스의 눈에 증오심이 떠올랐다.
리시나스를 필두로 카일, 루나, 아르온, 드웨노.
이 다섯 영웅은 여러 군단장을 쓰러트리고 신의 뜻을 거스르는 증오스러운 자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거슬리는 방해물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투를 거치면 거칠수록 힘을 키웠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멸망해가는 세계의 판도를 뒤집을지도 모를 강대한 존재로 성장했다.
희망.
타르타로스의 군단장인 기아스 입장에서는 참으로 가장 없애 버리고 싶은 자들 중 하나였다.
그워어어어어!
기아스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와 함께 기아스의 몸체만 한 거대한 대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져라!
기아스가 포효하며 검을 내질렀다.
스악-!
공간을 가르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신기.
타르타로스 제일의 대장장이기도 한 기아스가 만들어낸 역작.
수많은 생명의 피를 빨아먹은 증오와 절망으로 가득 찬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참격.
기아스는 자신의 혼신의 힘을 다한 이 일격이 눈앞의 보잘것없는 수인을 이 세상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 버릴 것이란 걸 확신했다.
“겁에 질렸군!”
찰나의 순간 아르온의 눈에서 본 것은 끝없는 공포였다.
기아스는 아르온을 비웃었다.
질끈-!
아르온은 이를 악물고 검을 들었다.
브레이브.
드웨노가 만들고 아르온에게 쥐여준 용기라는 이름을 가진 검.
번쩍-!
아르온이 검을 휘두르자 황금색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쿠가가가가가가강-!
아르온의 오러가 거인왕의 흑마력을 상쇄시켰다.
쩌엉-!
아르온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물러선 건 아르온 뿐만이 아니었다.
거인왕이 뒷걸음질 쳤다.
-놈!
거인왕의 눈이 번뜩이며 몸을 일으키는 아르온을 바라보았다.
기아스의 포효와 함께 강력한 피어가 아르온을 옭아맸다.
피어뿐만 아니다.
온갖 저주가 순식간에 아르온에게 쏟아졌다.
강대한 영웅조차 일순간에 죽여 버릴 수 있는 강력한 저주.
하지만…….
“크허어어어어어어어엉!”
아르온이 포효를 내질렀다.
늑대의 하울링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전직 한복판에 난입한 어리석은 수인을 습격하려던 군단이 흠칫- 하며 물러섰다.
-나 거인왕의 군단이 무슨 추태를 부리는 것이냐! 이 비루한 겁쟁이를 처단해라!
기아스가 분노에 찬 일갈을 내질렀다.
그에 군단이 아르온을 공격하려 할 때였다.
“가드스론은 지켜 낼 거야.”
아르온의 눈에 의지가 깃들었다.
“저곳은 많은 사람의 희망이니까.”
-크하하하하하하하!
아르온의 말에 기아스가 광소를 터트렸다.
-네놈 혼자서 무얼 할 수 있다는 거냐? 리시나스, 카일, 루나, 드웨노. 지금 널 도울 수 있는 게 누가 있지? 겁쟁이인 네놈 혼자서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그래, 네 말대로야.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르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검에 쥔 손에 힘을 주자 떨림이 멈추었다.
“하지만 이 검을 받을 때 맹세했어. 무서워도 용기를 내자고.”
고오오오오오-!
아르온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오러가 일렁였다.
“모두를 위해 싸우자고.”
아르온의 몸에서 진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에 군단이 겁에 질렸다.
지금의 아르온은 포식자이자 눈앞의 모든 것을 도륙하는 학살자였다.
-그 비루한 검…… 드웨노가 만든 검이로군.
기아스의 눈이 번뜩였다.
-그 무뎌빠진 검을 쥐고 네놈이 용기를 얻는다면…… 그 무뎌빠진 검을 부러트려 주마.
쿠구구구궁-!
기아스의 몸에서 흑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눈에서는 안광이 번뜩였다.
-네놈은 오늘 떠오를 태양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 빌어먹을 태양, 될 수 있으면 영원히 안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누구냐?
기아스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깃들었다.
탁-!
아르온의 곁에 레오가 섰다.
-드웨노는 어딜 가고 너 같은 놈이 온 거지?
“드웨노는 지금 바빠. 그러니 내가 아르온과 널 상대해 줄게.”
-이런 겁쟁이를 데리고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기아스가 비웃었다.
그런 기아스를 레오가 비웃었다.
“그 겁쟁이를 무서워하는 건 정작 네놈 아닌가?”
-뭐라?
“그러니까 떨거지 같은 네 부하를 떼거리로 끌고 이 녀석 한 명을 공격하려는 거 아니야?”
-싸구려 도발이로군.
기아스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도발에 응해주지. 그 대신, 그 싸구려 도발 덕에 저 도시에 있는 하찮은 것들은 보다 일찍 목숨이 끊어질 것이다.
기아스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군단이여! 가드스론을 무너트려라!
거인왕의 명령과 동시에 군단이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레오의 모습이 사라졌다.
휘오오오-!
바람처럼 빠르게 이동한 레오는 순식간에 군단의 최선봉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레오는 손에 쥐어진 창을 꾹 쥐었다.
“이프타.”
화르르륵-!
레오의 부름과 동시에 진홍색 불꽃이 일렁였다.
콰가가가각!
불꽃은 군단의 선봉에 있던 기간테스 한 마리를 집어삼켜 잿더미로 만들었다.
군단의 진격이 멈춘다.
-……!
거인왕이 눈을 부릅뜨고 허공에 선 이를 보았다.
-네놈은 무어냐!
군단의 진격을 막아내는 이가 있다면 그건 드웨노일것이라 생각했다.
전혀 예상 밖의 상황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나?”
레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저기 가드스론에 있는 쓰레기랑 같이 너희를 청소하러 온 사람.”
-어디서 그딴 망발을 지껄이느냐!
에레보스를 모욕한 레오를 보며 분노한 기아스가 손을 치켜들었다.
아공간이 열리며 엄청난 크기의 창이 소환되었다.
투콱-!
기아스가 창을 레오에게 던졌다.
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레오를 향해 날아왔다.
레오가 물의 방패를 들어 올렸다.
촤아아악-!
허공에 물의 장막이 생성되었다.
아름다웠지만 연약해 보이는 물의 방패.
투쾅-!
하지만 그 방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기아스가 투척한 창은 거대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타격은 입지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물리력이 레오를 덮쳤다.
레오는 엄청난 속도로 땅에 추락했다.
투웅-!
하지만 땅이 마치 스펀지처럼 충격을 흡수했다.
대지의 대정령으로 만들어낸 스피릿 아머드를 조작해 땅을 푹신하게 만든 것이었다.
“진짜 괴물이네.”
압도적인 물리력에 레오가 혀를 내둘렀다.
-네가 더 괴물 같거든?!
-어떻게 대정령인 우리를 이렇게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건데!
불의 대정령 이프타와 물의 대정령 에르함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칭 리시나스의 파트너인 레오가 자신들을 소환해 스피릿 아머드로 무장한 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레오는 거대한 대정령의 힘에 조금도 휘둘리지 않고 완벽하게 힘을 다루고 있었다.
대정령들의 외침에 레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리시나스 만큼은 아니잖아.”
-리시나스는 우리와 함께 온갖 고난을 헤쳐나간 계약자다. 그런데 넌 오늘 처음 본 우리를 이렇게 완벽하게 다루고 있다. 그건 리시나스도 불가능해.
실레스타의 말에 레오가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난 오늘 너희를 처음 보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뭐라고?
“지금 전투도 리시나스를 흉내 내고 있는 것뿐이야.”
레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몰려오는 군단을 보며 손을 뻗었다.
휘오오오오오-!
레오의 손에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생성되었다.
화르르륵-!
거기에 거대한 불꽃이 일어났다.
실레스타와 이프타의 힘을 융합한 것이었다.
지이이이잉-!
그때 불의 회오리를 뚫고 거인왕의 군단측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거대한 흑마력의 반응에 레오가 주먹을 쥐고 바닥을 향해 내질렀다.
콰앙-!
콰가가가가가가가각-!
대지가 치솟으며 거대한 방벽이 생성되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촤아악-! 쩌저저저저저적-!
땅의 방벽에 물이 스며들며 얼어붙었다.
완벽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정령의 사용법.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에르함이 신음성을 내뱉었다.
-이러면 정말…… 리시나스 그 자체잖아.
갑자기 나타나서 리시나스의 계약과 영력을 통제하는 인간 소년.
그것도 모자라 리시나스를 연상시키는 정령술 실력까지.
-너, 정말 정체가 뭐야?
콰아앙-!
레오가 세운 방벽이 파괴되었다.
“내 정체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
끝이 보이지 않는 군단의 진격 앞에 선 레오가 대정령들에게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저놈들을 쓰러트리는 거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지축이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장벽처럼 선두에선 기간테스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기간테스의 숫자만 어림잡아도 수천 마리는 넘어 보였다.
‘기아스는 아르온에게 완전히 맡겼어.’
이제는 자신이 군단을 막을 차례였다.
“데페세르!”
레오가 다급히 소리쳤다.
“마법 포격을 준비시켜!”
“마법사들, 포격 준비!”
지이잉-!
가드스론의 성벽 위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레오는 성벽에 다가오는 군단을 바라보았다.
“쏠까요?”
데페세르의 물음에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만 기다려.
레오의 말에 데페세르가 군단을 주시했다.
잠시 후…….
그워어어어어어어!
거인왕의 군단이 이성을 상실하고 미친 듯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군단뿐만 아니다.
기아스 역시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아르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아스의 권능, 버서커의 힘에 군단 역시 강화된 것이다.
그걸 본 레오가 소리쳤다.
“지금이야!”
“쏴라!”
데페세르의 외침과 동시에 가드스론의 성벽에서마법 포격이 시작되었다.
쿵-! 쿠구구궁-!
순식간에 기간테스들이 시체 더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 시체 더미를 밟고 무한할 것만 같은 진격이 시작되었다.
쿵! 쿵! 콰득! 콱-!
“끄아아악!”
“성벽 위로 날아오는 것들부터 공격해!”
투석기를 이용해 높은 성벽에 마족들이 올라왔다.
“성벽을 사수해라!”
데페세르가 소리쳤다.
“아르온님과 드웨노님이 거인왕을 붙잡아 두고 계시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서 싸워라!”
여기저기서 영웅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화르르륵-!
멀리 아르온과 싸우던 기아스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였다.
레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레오가 다급히 가드스론 내부를 바라보았다.
화르륵-!
검은 불꽃이 높이 치솟았다.
‘에레보스의 사념이…… 기아스를 강화시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