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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학년은 모두 중간고사 준비가 한참입니다. 입학 이후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의 보살핌 속에서 학교생활에 적응해 왔으니 그 기대에 부응하는 성적을 거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학년 대표로서 연설이 끝이 나고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상에서 물러난 어린 소녀는 우아하게 인사를 한 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내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니아가 중얼거렸다.
“쟤는 진짜네.”
루니아의 중얼거림에 함께 있던 에이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의미인가요?”
“말 그대로야.”
루니아가 턱을 괴었다.
“진짜 세이룬에서 바라는 우등생이라는 소리지.”
현재 루니아와 에이란이 있는 곳은 혜성의 전당.
세이룬의 중심에 있는 곳으로 세이룬이 보유한 히어로 레코드가 보관된 곳이었다.
히어로 레코드 외에도 혜성의 마법사가 남긴 수많은 것들이 잠들어있는 곳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세이룬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학생 대표 회의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학생회장을 중심으로 각 학년의 대표들이 소집되는 자리.
말 그대로 세이룬의 최우수생들이 모여 학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번 회의는 1학년 수석 레아의 연설을 끝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루니아 양도 우등생이잖아요?”
“아니지, 난 불량 학생이잖아?”
루니아가 키득- 키득- 웃었다.
“루니아, 에이란. 회의에 집중해.”
그때 2학년 3등 남학생이 지적했다.
“충분히 집중하고 있어.”
“가볍게 말하지 마. 우리는 2학년 대표로 이 자리에 와 있는 거라고.”
남학생, 테베슨이 강하게 말하자 에이란이 어색하게 웃었다.
“테베슨. 학년 대표 회의는 그렇게 딱딱한 자리가 아니에요. 선후배 간에 친분을 다지는 자리니까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에이란의 말대로였다.
학업에 대한 논의라는 거창한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상은 친목회였다.
지나치게 격을 차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이란의 말에도 불구하고 테베슨은 경직된 모습을 풀지 않았다.
‘아주 학년 대표를 하고 싶어서 발악이군. 하긴 실력으로 된 게 아니니까.’
2학년 상급 1반 중에는 성적으로 놓고 봤을 때 테베슨만큼 우수한 실력자는 많다.
실제로 2학년이 된 이후로 루니아의 기수의 학년 대표는 수없이 교체되었다.
루니아와 에이란의 순위는 변동이 없었다.
오직 3등.
루카의 자리가 계속 바뀌었다.
실력은 대부분 대등하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생들의 입맛에 맞는 학생들이 학년 대표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레아의 발표가 끝난 후 친목회.
테베슨은 3, 4, 5학년들의 학년 대표들에게 다가가 자신이 학년 대표임을 적극적으로 인사했다.
3, 4, 5학년들은 그런 테베슨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든 친분을 쌓으려는 테베슨과 다르게 고학년 학년 대표들은 그와 깊게 이야기는 나누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단순했다.
‘자격이 없다는 거지. 저런 거 보면 우리 선배님들도 참 엘프치고는 괴짜라니까.’
1학년 때는 몰랐지만 2학년이 돼서 알게 된 것이 있다.
학년 대표를 할 정도의 사람들이면 어디 하나씩 이상한 구석이 있다는 점이었다.
당장에 작년 졸업생이자 전임 학생회장인 리에니아 조차도 살짝 사디스트적 성향을 가졌던 변태였다.
‘우리 1학년들은 볼 때마다 괴롭히고 싶다니까? 어서 이 언니 품에 안기렴!’
냉큼 달려와 껴안던 리에니아를 떠올리며 루니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하딘 선배.’
루니아는 4학년 학년 수석이자 현재 학생회장인 하딘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루니아는 하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세이룬의 우등생으로서 사사건건 루니아에게 지적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1학년 2학기.
루나의 세계를 함께 공략하면서 속마음을 알게 되고는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는 루니아야 말로 차기 학생회장에 어울리는 엘프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내년 5학년이 되면 루니아에게 학생회장 자리를 물려 줄 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
‘마르벤 선배님은 이번에도 불참하셨고.’
5학년 수석인 마르벤의 부재에 루니아가 혀를 찼다.
마르벤은 현 세이룬의 체재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하는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5학년 수석이라는 말은 학생 최강이라는 걸 의미했다.
리에니아도 학생회장의 자리를 그에게 넘기려 했었다.
하지만 마르벤이 거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르벤은 별의 마법을 중시하는 현 체재에 맞지 않는 학생.
그러니까 별의 마법에 대한 성취가 떨어지는 학생이었다.
그가 학교 최강일지는 몰라도 별의 마법사로서의 역량은 그보다 뛰어난 학생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대외적인 그의 명성은 학생회장이 되지 않는 게 이상한 수준이었다.
특히 마르벤은 이번 영웅 던전 공략 도중 세이룬의 히어로 레코드를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세이룬의 히어로 레코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
말 그대로 엄청난 위업을 이룬 셈이었다.
지금 세이룬을 장악한 극단주의자인 순혈회조차 학생회장을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르벤 스스로가 거부한 것이다.
‘순혈회놈들은 후대를 위한 마르벤의 배려라고 떠들고 있지만.’
외부에서 의문에 찬 시선을 보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학년 대표들이 현 체재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학년들이 중요해. 순혈회 입장에서 우리야 이미 때가 묻은 학생들이겠지만 쟤들은 백지 그 자체니까.’
처음 참여한 학년 대표 회의가 어색한지 쭈뼛거리고 있는 1학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학기 초인 만큼 물들기도 쉽다.
‘특히나 레아 팅겔이라고 했나? 쟨 순혈회 녀석들이 전담 마크하고 있을 테니…….’
레아의 상징성은 크다.
무려 세이룬의 후손인 데다가 얼마 전 요정왕과의 교신까지 성공했다.
‘아마 내가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면 노골적으로 쟤를 세이룬의 상징으로 만들려고 할 테지? 어쩌면 레오를 의식해서 1학년 학생회장이다 뭐다 떠들지도 모르지.’
루니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는 사이 학년 대표 회의는 끝이 났다.
루니아와 에이란이 2학년 교실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복도에서 레아가 루니아와 에이란 앞을 가로막았다.
한치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아를 보며 루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에게 할 말 있어?”
“네.”
“뭔가요, 레아 양.”
에이란이 살갑게 웃으며 묻자 레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세이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느닷없는 질문에 루니아가 눈을 가늘게 떴고 에이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세이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당연히 엉망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순혈회에게 주목받는 레아가 이런 질문을 하니 루니아로서는 다른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수밖에 없었다.
‘얘가 날 떠보나?’
에이란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루니아와 레아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봤다.
“딱히 내 의견이 중요하진 않잖아? 가자, 에이란.”
루니아가 머리를 쓸어 넘긴 후 휙- 하고 뒤돌아섰다.
덥석-!
하지만 레아는 그런 루니아의 교복 치맛자락을 잡았다.
“이야기해주세요! 숙제란 말이에요!”
“야, 이거 안 놔?!”
루니아가 붉어진 얼굴로 칭얼거리듯 마구 교복 치마를 잡아당기는 레아에게 언성을 높였다.
“플로브 선배님이 내주신 숙제란 말이에요!”
“뭐?”
루니아와 에이란이 멈칫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오가 내준 숙제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플로브 선배님은 지금 세이룬에 계세요.”
레아가 에헴! 하며 가슴을 활짝 폈다.
“그리고 전 플로브 선배님의 수제자가 될 예정이죠.”
마법에 관해 가르쳐준다고 했을 뿐이지만 어느새 레아는 레오의 수제자라고 언급했다.
“……레오가 왜 세이룬에 있는데? 지금 어디에 있어?”
“앗! 그건 플로브 선배님과 저만의 비밀! 알려 드릴 수 없어요!”
루니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저…… 혹시 레오님이 교환 학생으로 온 건가요?”
그 말에 레아가 어깨를 흠칫 떨었고 루니아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항, 그런 거였구만.”
눈을 가늘게 뜬 루니아가 빙긋 웃었다.
“그럼 레오는 지금 1학년 기숙사에 있겠네.”
“왜 레오님이 교환 학생으로 1학년으로 간 걸까요?”
“지금 우리 학교 꼴을 보면 뻔하지, 뭐.”
루니아의 싸늘한 말에 레아가 말했다.
“어, 어쨌든! 어서 지금 세이룬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세요.”
레아의 말에 루니아가 대답했다.
“멀쩡하지는 않다고 생각해.”
“네? 왜요?”
레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레아를 보며 에이란 역시 씁쓸하게 웃었다.
“요즘 이상해지긴 했어요. 학생들 사이에도 차별이 너무 심해졌죠.”
“맞아, 작년에 비하면 지금 세이룬은 완전 똥통 학교지.”
“또, 똥통?!”
“루니아 양.”
에이란이 나무랐지만 루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을 이야기해줬을 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단어는 조금.”
“그럼 뭐라고 해?”
“음… 음…….”
에이란이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망한 학교?”
“어떤 의미에서는 네가 더 너무한 것 같은데.”
충격적인 두 선배의 말에 레아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루메른에 입학할 걸 그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루니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팅겔 가문 직계의 입에서 저런 발언이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선 레오를 만나 봐야겠네.”
“네? 하지만 만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몰래 만나야지.”
루니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몰래 어떻게요?”
“밤에 레오 방을 찾아가는 거야.”
“바, 밤에…….”
에이란의 얼굴이 이내 새빨개졌다.
“……너 또 이상한 생각 했지?”
“아, 아니거든요?”
에이란이 발끈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아가 말했다.
“선배님들, 저도 갈래요.”
“……넌 또 왜?”
“플로브 선배님의 잠옷 차림이 궁금해서요.”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레아를 보며 루니아가 한숨을 쉬었다.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기세네.’
레아의 눈에서 집요함을 엿본 루니아가 새벽에 만날 시간을 이야기해준 다음 레아를 돌려보냈다.
“활기찬 후배네요.”
에이란이 해맑게 웃었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루니아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세이룬 학년 대표들은 다 이상한 사람이야?”
“네? 전 이상한 사람이 아닌데요?”
“너 낯 뜨거운 소설 읽는 게 취미란 거 다 알고 있거든? 이번에 읽는 책 제목이 뭐였지? 내 목줄을 쥔 연하남…… 읍?”
에이란이 울상을 지으며 루니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교실로 돌아가며 에이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교칙을 어겨야겠네요.”
“우리가 교칙 어기는 게 하루 이틀이야?”
어깨를 으쓱거리는 루니아의 말에 에이란이 잠시 생각하더니 해맑게 웃었다.
“그렇긴 하네요.”
알게 모르게 착실하게 불량학생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에이란이었다.
***
혜성의 전당 최상층 부.
그곳은 세이룬에서 가장 높은 곳.
그곳에는 세이룬의 중요한 회의나 회담이 열릴 때만 사용되는 별의 광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세이룬의 교장 대행.
르하겐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사입니다. 성운의 시조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세이룬님의 히어로 레코드가 돌아왔으니 말입니다.”
르하겐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르하겐을 말에 방금 전 세이룬에 도착 한 티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르하겐님. 그 히어로 레코드……. 세이룬님의 것이 확실합니까?”
“그렇습니다, 티온님.”
“……. 나를 부른 건 히어로 레코드의 ‘열쇠’ 가 될만한 물건이 필요해서 입니까?”
팅겔 가문은 혜성의 마법사 세이룬의 가문.
그런 만큼 가보 중에 분명 세이룬의 히어로 레코드를 열수 있을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예. 세이룬님의 히어로 레코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히어로 레코드 역시 드래고니아에 보관되어 있죠. 그런데 드디어 우리 세이룬에 공식적으로 세이룬님의 히어로 레코드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세이룬님의 힘을 우리 학생들이 이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르하겐이 빙긋 웃었다.
“이건 기회입니다. 엘프 영웅이야 말로 가장 우월한 영웅이라 불릴 수…….”
“르하겐님. 영웅은 결코 우월한 존재가 아닙니다.”
티온이 딱 잘라 말했다.
“영웅은 주변 사람들과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그저 조금 특별할 뿐이지요.”
“……. 이전부터 티온님의 영웅관은 저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이야기 해봤자 서로 감정만 상하겠지요.”
르하겐이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로 딱 잘라 대답했다.
“지금 중요한 건 우리 세이룬에 혜성의 마법사의 히어로 레코드가 되돌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티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세이룬님의 영웅의 세계를 열 수 있는 열쇠를…….”
“그 전에, 르하겐님. 왜 세이룬님의 히어로 레코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지 알고 계십니까?”
“……. 3000년 전 히어로 레코드를 나누는 과정에서 소실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이후 수많은 세이룬님의 히어로 레코드를 회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세이룬님의 히어로 레코드 뿐만 아닙니다. 다른 개벽의 영웅님들의 히어로 레코드 역시 마찬가지지요.”
르하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건 그조차도 몰랐던 사실이다.
“허면 어째서 남아 있지 않은 겁니까? 저 탐욕스러운 드래곤들이 회수를 해간 겁니까?”
분노를 드러내는 르하겐을 보며 티온이 말했다.
“이건 세이룬님께서 학교에 남긴 마지막 편지 입니다.”
티온이 품에서 낡은 편지 봉투를 꺼냈다.
“오오……. 세이룬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라니……!”
르하겐의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이후 정중한 태도로 편지 봉투를 건네 받은 르하겐은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적힌 내용에 눈을 부릅떴다.
[후대의 엘프들에게 전합니다. 나의 히어로 레코드를 발견하는 즉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파괴해주세요. 세이룬.]
“이게……. 대체…….”
“이 유언에 따라 세이룬님을 포함한 다른 개벽의 영웅님들의 히어로 레코드는 모두 발견하는 즉시 파괴되었습니다. 그것이 개벽의 영웅들의 히어로 레코드가 남지 않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