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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요정왕님을 소환해보라고요?”
“그래.”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정왕의 소환.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엘프들의 숙원이었다.
역사상 최후의 요정왕의 맹약자는 단 한 사람.
바로 루나다.
본디 요정왕은 대대로 엘프왕과 맹약을 맺어온 환상의 환수였다.
하지만 재앙의 시대가 시작되고 엘프왕이 사라졌다.
선대 요정왕 그라윈이 타르타로스와의 전투에서 힘을 잃고 실질적인 요정왕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 바로 지금의 요정왕 실로드다.
그리고 그 실로드의 첫 맹약자이자 마지막 맹약자가 바로 루나였다.
리시나스에게 파트너였던 피닉스의 왕, 염제 카타리우가 있었던 것처럼 루나에게도 요정왕의 후계자, 실로드가 있었다.
그중 카타리우는 목숨을 잃었다.
반대로 실로드는 최후의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루나의 죽음에 진한 절망과 죄책감을 느끼던 것이 바로 레오가 기억하는 실로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과거를 떠올린 레오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입학시험 당시.
공략 보상으로 얻은 [요정왕의 맹약]
이 맹약을 통해 실로드에 의해 봉인된 채 페어리 랜드에서 추방된 키르안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키르안과 계약하긴 했지만, 맹약의 주체가 실로드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작년까지 레오는 영력의 부족으로 실로드를 소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그릇이 커지고 요정왕을 불러낼 만한 영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는 실로드를 소환하지 못했다.
‘아마 히어로 레코드를 통해 얻은 맹약이기 때문이겠지.’
요정왕의 맹약을 공략 보상으로 얻긴 했지만, 레오는 소환술사로서 요정이라는 환수와 영력의 성향이 맞지 않는다.
‘지금 이 몸에는 제르딩거의 피가 흐르고 있어 피닉스와 영력 궁합이 어울렸던 거고…… 페가수스에 내 원래 마나 특성인 순수랑 궁합이 맞지만…… 요정은 아니지. 전생이나 지금이나.’
레오가 키르안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건 순수하게 알비의 세계 공략 보상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요정왕의 맹약을 얻었어도 레오는 실로드를 부를 수 없었다.
맹약이라고는 해도 실로드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맹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통로를 만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실로드 본인이 맹약의 존재를 인지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얼마든지 소환이 가능하다.
레오의 말에 레아가 쭈뼛쭈뼛 말했다.
“플로브 선배님. 제가 실로드님의 목소리를 들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코메테스의 힘을 빌린 것에 불과한데요? 지금 제 실력으로는 도저히 요정왕님을 다시 부를 수 없어요. 요정왕님의 목소리를 들은 건 단순히 우연이었는 걸요?”
“우연?”
“네.”
레아는 조심스럽게 당시의 일을 설명했다.
“1학년 상급반들이 혜성의 전당에서 수업을 진행할 때 제게 코메테스를 쥘 자격이 주어졌어요.”
레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원래는 요정왕님을 소환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요. 당시 수업을 인솔하셨던 선생님께서 한번 요정을 소환해보라고 권유하셨어요. 소환진도 그때 선생님께서 그려주셨고요. 그러다가 덜컥 실로드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 거예요.”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레아를 보며 레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급반 애들 사이에서는 마치 네가 소환진까지 그렸던 것처럼 소문이 돌던데?”
“그럴리가요.”
손사래를 치는 레아를 보며 레오가 물었다.
“인솔 선생이 누구였는데?”
“교장 대행이신 르하겐님이요.”
레오가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이 꼬마는 소환술사의 재능이 확실히 있어.’
아직 미숙한 1학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도유망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실력과 재능을 겸비하고 있었다.
살짝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훌륭한 영웅 후보생이다.
그렇다고 해도 소환술사로서 요정왕을 소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릇도 지식도 말이다.
“코메테스는 팅겔 가문의 사람들이 쥐었을 때만 능력을 발휘하는 거지?”
“네, 맞아요.”
영웅의 세계 공략 보상으로 세이룬이 가져온 코메테스.
루나와 세이룬의 마력을 동시에 품은 강대한 마도 지팡이의 힘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건 팅겔가문의 사람들뿐이었다.
‘마치 연출한 것처럼 요정왕을 소환했군.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의문을 느끼며 레오가 말했다.
“뭐가 됐든 요정왕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 자체가 너한테는 재능이 있다는 소리야.”
레오가 영력을 일으켰다.
“코메테스의 역할은 내가 대신해 줄게.”
“그럼.”
레오의 말에 레아가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 심호흡하며 레오가 그린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오래전부터 엘프들은 호수에서 요정과 소환 의식을 해왔다.
지금은 그 전통이 사라져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소환 의식을 치르지만.
호수에 들어가기 전 맨다리를 드러내는 행위만큼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한 번 해볼게요.”
떨리는 목소리로 어색하게 미소 짓는 레아가 조심스럽게 레오에게 손을 뻗었다.
레오는 그런 레아의 손을 잡고 영력을 일으켰다.
우웅.
소환진이 빛났다.
레오의 기숙사 방 전체에 환한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레아의 몸이 일순간 휘청였다.
코메테스의 힘없이 요정왕을 소환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마나가 필요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공식적으로 요정왕은 지금 시대에 존재하는 최강의 환수다.
피닉스의 왕, 염제와 페가수스의 우두머리, 뇌왕의 명맥이 끊긴 지금.
가장 강력한 환수는 요정왕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레오가 보조해준다고 해도 1학년에 불과한 레아의 그릇으로는 요정왕을 감당할 순 없다.
애초에 소환진을 발동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
하지만…….
‘편법은 얼마든지 있지.’
레오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요정왕의 맹약이 있는 레오에게 필요한 건 실로드에게 닿기 위한 통로.
그리고 레아는 그 통로 역할만 해주면 된다.
화악-!
소환진의 문이 열렸다.
그걸 본 순간 마나 탈진 현상을 일으킨 레아가 혼절하듯 쓰러졌다.
풀썩-
레오는 그런 레아를 안아 받은 후 문을 바라보았다.
-또 너인가. 세이룬의 후손이여.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목소리에 레오는 마음이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세이룬의 후손이여. 그대는 아직 자격이 부족하다.
실로드는 자신을 부른 게 레아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타이르듯 말했다.
-좀 더 그릇을 키운 후에…….
“실로드.”
-……누구냐. 어떻게 이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거지?
목소리가 들린다는 건 일종의 가계약 상태.
즉, 실로드의 목소리를 듣고 또 말을 전할 수 있는 건 계약의 주체뿐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제 3 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실로드도 놀랐다.
“나야, 카일.”
-뭐라고?
잠시 후, 닫혀 있던 계약의 문이 열리고 한 요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의 마력으로 몸을 휘감은 요정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레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레오와 눈이 마주친 실로드의 눈이 떨렸다.
완전히 다른 모습.
하지만 레오의 붉은 눈동자에 깃든 눈빛은 실로드가 알고 있는 카일과 똑같은 것이었다.
-네가 카일이라고?
실로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 실로드를 보며 레오가 손을 뻗었다.
순백의 하얀 빛이 레오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그걸 본 실로드의 손이 떨렸다.
이 순백의 빛.
알고 있다.
5000년 전.
자신의 첫 맹약자이자 마지막 맹약자가 남겼던 빛.
재앙을 물리쳤던 단 하나의 기적.
-이노센트…….
눈앞의 소년이 카일이라는 걸 증명하는 그 순백의 빛을 본 실로드가 레오에게 날아들었다.
레오의 하얀 머리에 매달린 실로드가 오열하며 내뱉었다.
-약속했었잖아요! 에레보스를 쓰러트리고! 리시나스와 카일만은 돌아온다고 약속했었잖아요! 그런데 왜 이제야…… 이제야! 왜…… 5000년이나 지나서……!
목 놓아 우는 실로드를 보며 레오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5000살이나 넘게 먹은 요정왕이란 녀석이 그렇게 체통 없이 울어도 되냐?”
레오의 말에도 실로드는 오열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5000년이 지난 후에야 한없는 기다림의 끝을 맞이한 요정은 그 시절의 어린 요정처럼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
-크흥! 그렇군.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소문 무성한 레오 플로브가 바로 카일, 당신이었군요.
레오 앞에 앉은 실로드가 티슈로 코를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훌쩍이면서도 냉정을 되찾았다.
그런 실로드의 모습에 레오가 턱을 괴었다.
-왜 그렇게 봐요?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은 있어도 5000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나와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시대에 네가 유일하니까. 그게 신기해서.”
-나보다 신기하겠어요? 이미 5000년 전에 죽었던 당신이 살아 돌아왔는데.
실로드가 실소를 터트렸다.
5000년 전, 그때의 말투와 똑같았다.
그런 실로드를 보며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 이야기는 모두 들었어?”
-네, 페어리 랜드에까지도 레오 플로브의 이야기가 들려와요. 처음에는 당연히 과장된 부분이 많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라면 납득이 가네요.
실로드가 빙긋 미소 지었다.
-루나가 히어로 레코드에서 나온 것도 당신 때문인 거죠?
“맞아.”
-……루나를 늘 그리워하고 있지만…… 당신을 보니까 더욱 그립네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맹약자를 떠올리며 실로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너, 지난 5000년 동안 한 명의 맹약자도 갖지 않았지?”
-공식적으로는요.
“비공식적으로는 한 명 있었다는 소리군.”
레오의 말에 실로드가 레아를 바라보았다.
-네. 카일이 예상한 대로 혜성의 마법사, 세이룬이 내 두 번째 맹약자였습니다.
그 말에 레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숨긴 거야?”
-세이룬과 이야기한 끝에 결정했어요. 소환 의식에 사용된 매개체 역시 모두 없앴습니다. 코메테스만 빼고요.
“왜지?”
-공식적으로 제게 맹약자가 있다는 게 밝혀지면 수많은 소환사가가 저와 계약을 맺으려 할 테니까요.
지금 시대에 이르러서 요정왕은 거의 계약이 불가능한 환상 중의 환상으로 칭송받고 있다.
요정왕을 소환할 매개체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
실로드의 말에 의하면 일부러 맹약자를 만들지 않았다.
“계약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심지어 3000년전 개벽의 영웅들에게는 네 힘이 꼭 필요 했을 텐데? 왜 힘을 보태지 않은 거야?”
재앙의 시대를 경험한 자로서.
실로드는 그 누구보다 에레보스를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그렇기에 세이룬과 계약을 맺었다면 자신의 힘을 개벽의 영웅에게 보탰을 것이다.
하지만 실로드는 3000년 전, 재앙의 재림 당시에도 페어리 랜드를 떠나지 않았다.
레오의 물음에 실로드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태지 않은 게 아니라 보탤 수 없었어요.
그 대답에 레오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페어리 랜드를 옮긴 이유가?”
재앙의 시대가 끝이 나고.
원래 페어리 랜드가 자리 잡고 있던 북부의 땅은 혹한의 땅으로 변했다.
요정은 추위를 싫어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추위는 억겁의 세월 동안 살아왔던 고향 땅을 떠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심지어 요정은 강력한 마법을 부리는 환수.
페어리 랜드 만큼은 얼마든지 따사롭고 녹음이 우거진 숲으로 유지할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실로드는 미련 없이 페어리 랜드를 버렸다.
레오의 말에 실로드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카일의 예상대로예요. 제가 맹약자를 만들지 않는 이유는 오랫동안 페어리 랜드를 비울 수 없기 때문이에요.
“설마…….”
-네. 예상한 대로.
레오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5000년 전.
카일은 최후의 전투에서 태초의 악을 여섯 등분시켜 봉인했다.
그 중 첫 번째 조각은 3000년 전, 재앙의 재림 당시 부활했고 개벽의 영웅들이 막아냈다.
그리고 그중 두 번째가 바로…….
“페어리 랜드에 있는 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