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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급 영웅은 아카데미 우등생-344화 (344/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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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 톡- 톡-

레오가 손가락 끝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과연. 실로드가 지금까지 페어리 랜드에서 움직이지 못한 이유가 있었군.’

시작의 영웅, 카일이 봉인한 에레보스의 조각.

끝없이 불타오르는 재앙의 불꽃.

-카일, 당신이 재앙의 시대를 종결시키고 얼마 뒤. 나는 에레보스의 조각 중 하나를 발견했어요.

실로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에레보스 조각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었죠.

실로드로서는 에레보스의 조각을 방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타르타로스에서 그 조각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이 세상은 다시 한번 재앙의 불꽃에 휩쓸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페어리 랜드를 옮겨 새로운 터전을 잡았어요. 페어리 랜드의 지하 깊숙한 곳에 에레보스의 조각을 봉인하고 깨어나지 않도록 억누르고 있어요.

그렇게 5000년의 세월을 버텨온 것이다.

“그 조각이 깨어날 조짐은 있어?”

-지금은 없어요.

실로드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5000년 전, 최후의 결전 당시 카일에게 에레보스를 봉인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금은 그 나뉜 조각을 하나하나 찾아 소멸시키는 것이 가능해.’

첫 번째는 개벽의 영웅들이 막아내고 있는 에레보스였다.

“언젠가 에레보스를 완전히 멸하고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녀석들이 원했던 세상이 오겠지.”

레오는 실로드를 바라보았다.

“5000년 동안 너 혼자 떠안기 힘들었을 텐데…… 고맙다.”

성운의 시조, 루나의 맹약자.

하지만 당시에는 어리기만 했던 요정.

레오는 마음 착한 이 작은 요정이 5000년 동안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이 갔다.

에레보스와 직접 맞선 적 있는 만큼.

그 공포는 더더욱 컸을 것이다.

레오의 말에 실로드가 대답했다.

-카일, 나는…… 5000년 전 루나를 혼자 떠나보낸 것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어요.

“네 잘못이 아니야.”

-네. 하지만 제가 좀 더 용감했더라면. 루나 대신 미숙한 내가 앞으로 나섰다면…… 루나가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살았어요.

“…….”

-결국 전 에레보스 토벌을 나선 이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어요. 그렇기에 그건 내 의무였고 당연히 제가 했어야 하는 일에요.

실로드는 진지하게 말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해요. 당신은 감사받아야 하는 사람이지 전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실로드가 환하게 웃었다.

“세상을 구한 대영웅이니까요.”

“……5000년의 세월이 길긴 긴 모양이네.”

레오가 턱을 괴었다.

“그 꼬마 요정이 이렇게까지 의젓해지다니 말이야.”

“왕 노릇을 5000년 정도 하면 관록이 생기죠.”

실로드의 말에 레오가 말했다.

“그래, 문제아 아들도 과감하게 쫓아낼 정도로 엄해졌으니까.”

“문제아 아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실로드를 보며 레오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소환진이 열렸다.

평소라면 소환진이 열리자마자 냉큼 넘어왔을 키르안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레오는 소환진에 강제로 손을 집어넣어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붙잡았다.

콱-!

‘솜뭉치?’

레오가 꺼내자 빨간 병아리가 튀어나왔다.

-삐약.

레오는 책상 위에 피오라를 내려놓은 후 다시 소환진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콱-!

“앗, 주인님의 거친 손길~”

어딘지 모르게 기뻐하는 목소리.

레오는 대충 아티를 소환진에서 끄집어낸 다음 바닥에 내팽개쳤다.

레오의 얼굴에 짜증이 일 때였다.

-놔! 이거 놔!

-맹약자의 소환을 거부하는 환수가 세상에 어디 있나요?

혀를 차는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로 키르안을 꽁꽁 묶은 엘시가 소환진을 통해 넘어왔다.

-엘시 양?

실로드가 놀란 눈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는 그런 실로드를 보며 자신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요정왕 폐하. 그림자 정령. 엘시라고 합니다.

-세상에, 어떻게 엘시 양이 현세에?

놀란 얼굴로 자신 앞으로 날아온 실로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시가 방긋 웃었다.

-아, 또 다른 나를 알고 계시는군요?

-또 다른 나?

당황하던 실로드는 다시 한번 엘시를 자세히 살폈다.

분명 5000년 전, 카일과 계약을 맺었던 그림자 정령, 엘시가 분명했다.

사령왕과의 전투에서 소멸했던 정령.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실로드가 기억하고 있는 엘시는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어두웠다.

세계를 구하기 위한 여정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까이 가기 힘든 음울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엘시는 달랐다.

-전 히어로 레코드를 통해 현세에 오게 되었답니다.

-히어로 레코드?

-네, 전 레오의 공략 보상이었죠.

실로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히어로 레코드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인물을 현세로 불러올 수 있다니.

-과연, 신들이 남긴 마지막 유산답구나.

신들이 살았던 시대를 기억하는 실로드는 감탄사를 터트리며 납득했다.

그리고 힐끗- 엘시에게 제압당한 키르안을 보았다.

키르안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네가 카일의 계약자가 되었을 줄은 몰랐구나, 키르안.

요정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실로드를 보며 엘시가 키르안을 풀어주었다.

척-!

키르안이 다급히 실로드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버지,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이 키르안. 오랜만에 아버지의 존안을 뵙게 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큰절까지 올리며 납작 엎드리는 키르안을 보며 레오가 턱을 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저 정말로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키르안이 주먹을 꾹 쥐고 소리쳤다.

-장난도 안 치고요! 매일매일 레오를 도우며 세계의 앞날을 위해 이 한 몸 헌신하고 있습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네요.

엘시가 레오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레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냐?

-네! 마물 여왕을 물리치는 데도 힘을 보탰습니다!

당당하게 소리치는 키르안을 보며 실로드가 레오를 바라보았다.

“뭐, 나랑 같이 있으니 큰 위업을 이룬 건 사실이지.”

레오의 말에 키르안이 선한 웃음을 지었다.

-쀅!

그런 키르안을 보며 피오라가 병아리의 모습으로 토하는 시늉을 했다.

-의외로 순순히 키르안을 도와주네요.

엘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레오가 덤덤히 말했다.

“나 아니더라도 고자질할 녀석은 많으니까.”

-삐약. 삐약.

아장아장 레오 앞으로 걸어온 피오라가 엘시를 향해 삐약거렸다.

저 말썽쟁이 요정이 실로드 앞에서 착한 척을 하는 이 상황이 궁금한 피오라였다.

그런 피오라의 반응에 엘시가 대답했다.

-지금 키르안은 요정왕님께 자신이 개과천선하고 착하게 살았다면서 용서를 구하고 있어요.

피오라가 눈을 번쩍 뜨더니 마치 굴러가듯 실로드 앞으로 달려갔다.

-뺙! 뺙! 뺙! 뺙! 뺙!

그리고 작은 날개를 미친 듯이 퍼덕거리며 실로드에게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마구 울어댔다.

키르안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실로드는 마법을 이용해 피오라를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주었다.

피오라는 실로드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피닉스, 피오라라고 합니다. 어르신. 이 요정의 악행에 대해 고발하려고 합니다.”

-말해 보아라, 어린 피닉스야.

“이 악독한 요정의 하루는 제 간식을 훔쳐 먹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루메른의 성실한 영웅 사관 학교 학생들을 골려줄 고민을 합니다!”

실로드의 얼굴은 더더욱 싸늘해져 갔고 키르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마지막으로 저녁 늦게 루메른 학생들의 간식을 훔쳐 먹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하는 악질적인 요정입니다!”

키르안의 하루를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친 피오라가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또……!”

“네, 네. 거기까지예요. 피오라.”

아티는 그런 피오라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린 후 방 한쪽으로 데려갔다.

더 말하겠다고 버둥거리는 피오라였지만, 아티가 막대 사탕을 물려주자 조용히 했다.

-철이 들려면 아직 먼 것 같군.

-아, 아버지……!

-페어리 랜드의 추방령을 유지하도록 하지.

키르안이 좌절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엘시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행실이 고와야죠.

따끔한 말을 남긴 엘시가 사탕을 먹고 있는 피오라 앞으로 날아가 말했다.

-피오라도 나빴어요.

엘시가 환수들을 타이르는 사이.

실로드가 레오 앞으로 날아왔다.

-심심하지는 않겠네요.

“심심하지는 않지.”

낮게 큭큭- 웃은 레오가 말했다.

“페어리 랜드를 오래 비울 수는 없지?”

-예.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건 훗날로 미뤄야겠죠.

실로드의 말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뻐요.

“나도 그래.”

-이번 생에는 목표가 있나요?

실로드는 안다.

카일이던 시절 레오에게는 딱히 뚜렷한 목적이 없었다는걸.

실로드의 물음에 레오가 피식 웃었다.

“내가 어떻게 환생하여 다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분명 이유가 있겠지.”

레오가 실로드를 바라보았다.

“너나 나나 5000년 재앙의 시대를 겪었어. 다시 태어나고 평화를 되찾은 시대를 보니 새삼 그런 생각이 들더라. 목적 없이 그저 리시나스를 따라…… 친구들과 함께했던 여정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구나……라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위업이었죠.

“그래서 이번 생에는 확실하게 목표를 정했어.”

레오가 피오라와 키르안, 아티, 침대에 누워 있는 레아를 본 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악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생에 청산하기로.”

레오가 빙긋 웃었다.

“태초의 악의 공포는……. 이번 시대를 끝으로 더 이상 남기지 않기로 다짐했어. 그게 내 목표야.”

***

다음 날 아침.

레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여긴……. 헉?!’

레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볼을 감싸 쥐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요정왕님을 소환하다가 마나 고갈로 그대로 기절하고……. 플로브 선배님 방에서 잔 거야?!’

침대에서 내려온 레아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창가 의자에서 잠든 레오를 보고는 멈칫했다.

“프, 플로브 선배님……. 그러니까.”

“깼냐?”

한쪽 눈을 뜬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무리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네.”

“아, 아뇨. 저야말로 볼썽사납게 기절해버려서…….”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레아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깨웠는데 못 일어나길래 여기서 재웠어. 네 방이 어딘지 몰랐거든. 별다른 일은 없었으니까 걱정마.”

“넵!”

레아가 절도 있게 대답했다.

그래도 남자의 방에서 잤다고 하니 묘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후아! 이거 엄청난 학칙 위반이잖아!’

풍경을 보며 얼추 시간을 가늠해 보니 아직 기상 시간이 남은 새벽 시간이다.

“전 빨리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지금 안 가는 게 좋을 텐…….”

레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말도 신지 않은 레아는 다급히 레오의 방을 나갔다.

딸칵- 끼익-

조심스럽게 방을 나선 레아가 기숙사로 돌아가려 할 때.

“레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소녀를 보며 레아가 당황했다.

“저……. 그……. 이건…….”

그곳에는 1학년 3등. 학년 대표이자 절친한 에클레르가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레아……. 너……. 외박한 거야? 그것도 남학생 방에서?”

“그러니까……. 일단 와 봐! 설명해줄게!”

레아가 에클레르의 손목을 낚아채고 다급히 방으로 돌아갔다.

끼익-

문을 연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나가지 말라니까.”

혀를 찬 레오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거기 계속 숨어 있을 거야?”

그 말에 당황하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복도 끝에서 앙르가 얼굴을 내밀었다.

“너……. 너……. 레아 팅겔이랑 무슨 사이야?”

붉어진 얼굴로 묻는 앙르를 보며 레오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소환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뿐인데?”

지극히 덤덤하게 말하는 레오를 보며 앙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렇지?”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요즘 엘프들은 왜 이렇게 발랑 까졌어?”

“바, 발랑 안 까졌거든!”

앙르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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