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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르륵-!
순백의 화염이 휘몰아쳤다.
루니아의 불꽃이 에레보스의 불꽃을 몰아냈다.
그 모습에 모든 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저것이 소문의 피닉스 킹의 불꽃인가.”
“5000년 전 사라졌다는 불꽃이라니.”
협회 참석을 위해 온 마법사들의 눈에 경이로움이 깃들었다.
5000년 전.
에레보스에 의해 단절된 피닉스의 왕들이 계승해온 불꽃.
말 그대로 머나먼 과거의 전설 속으로만 전해지던 그 불꽃이 루니아의 손에서 구현되었다.
하물며 이 마법을 만든이는 다름 아닌 루나.
50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른 뒤에 펼쳐진 기적적인 마법에 마법사들이 경외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부족해.’
그러나 루니아는 불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화르르륵-!
온몸을 휘감은 하얀 불꽃이 화력을 더해간다.
‘아직…… 부족해.’
루나가 이 마법을 만든 이유.
카타리우가 드웨노의 세계에서 정화의 불꽃을 계승해준 이유.
루나조차 완성 시키지 못했던 이 불꽃이 자신의 손에서 타오른 건 단순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연과 인연이 더해져 일어난 기적.
루니아는 플레임 엠페러라고 이름 붙인 드웨노의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우리 세대에서 완전히 끝내라는 의미겠지.’
끝없는 어둠에서도 찬란하게 빛났던 루나.
앞이 보이지 않는 재앙 앞에서도 굳건했던 드웨노.
깊은 절망 앞에서 누구보다 용기 있었던 아르온.
루니아는 직접 만나고 겪어 왔던 대영웅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르르륵-!
정화의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스스로조차 불사를 수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위험한 불꽃.
아직 미숙한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힘이었다.
그러나 루니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에레보스의 불꽃 한가운데로 망설임 없이 달려들던 레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혼자서만 멋있는 척 다하려고?’
1년 전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소년을 떠올리며 루니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레오 플로브.
시작의 영웅 카일과 같은 올 클래스.
루니아는 레오가 왜인지 모르게 카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카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가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알려진 건 극히 최근.
히어로 레코드와 관련된 자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그에 대한 일화 역시 동화 속 이야기로만 남아 있었다.
그가 왜 시작의 영웅으로 불리는지.
그가 어떤 행적을 남겨 왔는지.
후대의 사람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런데도 루니아는 레오와 카일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일님이 시작의 영웅이라 불리는 건…… 아마 무언가의 시작이기 때문이겠지. 그것처럼 레오 역시 이 거대한 흐름의 시작이야.’
화르르르륵-!
루니아의 불꽃이 더욱더 거세게 타올랐다.
모든 이들이 루니아를 바라보았다.
루니아가 플레임 엠페러를 양손에 쥐었다.
마법 술식이 조합되었다.
“염제.”
마법이 완성되자 에레보스의 검은 불꽃 위로 거대한 순백의 불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거대한 태양과도 같은 찬란함.
모두가 입을 떡 벌리는 와중에 순백의 태양은 검은 불꽃을 집어삼켜 버렸다.
화악-!
일순간에 검은 불꽃이 정화되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순백의 불꽃은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순백의 불꽃의 파편이 날뛰고 있는 언데드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재앙적인 검은 불꽃도.
죽음의 기운을 내뿜는 언데드도 자취를 감추었다.
봄날이라도 찾아온 듯 부드러운 공기가 주변 일대를 감쌌다.
그 압도적인 위력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루니아를 바라보았다.
“루니아 양!”
에이란이 다급히 온몸에 화상을 입은 루니아에게 다가갔다.
“난 괜찮아.”
루니아가 미소 지었다.
“부정한 것을 모두 태운 다더니…….”
“말 그대로 정화로군.”
모두가 감탄하며 루니아를 바라보는 사이.
세이룬의 히어로 레코드가 하늘에서 팔랑이며 내려왔다.
루니아는 손을 뻗어 그 히어로 레코드를 잡았다.
이 사태의 원흉.
하지만 어째서인지 세이룬의 기록이 담긴 히어로 레코드는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새로 쓰인 것처럼.
‘이상하다, 아까 분명 불타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는데?’
루니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타고 망가진 히어로 레코드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일이 있었던가?
루니아가 아는 한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니아가 놀란 표정을 지을 때였다.
화악-!
히어로 레코드가 환한 빛을 내뿜더니 이내 레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루니아가 깜짝 놀랐다.
모습을 드러낸 레오의 얼굴은 루니아의 코앞에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조금 전 자신을 턱을 잡았던 레오가 떠올라 루니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방금 뭔가…… 분위기가 엄청 야했어요.’
괜스레 에이란의 말이 떠올라 더욱 얼굴이 화끈거렸다.
레오는 루니아를 향해 어른스럽게 웃더니 손을 뻗어 루니아의 손을 잡더니 잡아당겼다.
‘얘, 얘 갑자기 왜 이래?!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손은 왜 잡아당겨?’
루니아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질 때였다.
“좀 놔 줄래?”
“어…… 응…… 에엑?”
루니아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제야 레오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세이룬의 히어로 레코드를 잡아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하며 손을 놓자 레오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괜히 이상한 상상을 한 루니아가 귀까지 빨개질 때였다.
“루니아 양, 괜찮아요?”
“괜찮은데…… 방금 분위기 이상하거나 하지 않았어?”
“분위기요? 무슨 분위기요?”
에이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루니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루니아 양, 무슨 이상한 상상을 한 거예요?”
에이란이 눈을 게슴츠레 뜨자 루니아가 울컥했다.
“너 때문이잖아! 너 때문!”
“네? 억울해요!”
에이란이 울상을 지으며 항의했다.
“레오 학생.”
그때 레오와 친분이 있는 세이룬 선생, 헤르디움이 레오에게 다가갔다.
“그건…… 세이룬님의 히어로 레코드가 확실한가요?”
“예.”
“그럼 도대체 왜 재앙의 불꽃이 세이룬님의 히어로 레코드에서…….”
“본인에게 직접 들으면 알겠죠.”
“무슨……?”
레오의 말에 헤르디움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번쩍-!
마치 허공에 문이 열리듯.
타원형의 순백의 입구가 열렸다.
세이룬의 선생인 헤르디움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영웅의 세계로 통하는 문.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눈을 휘둥그레 뜰 때였다.
레오가 입구로 손을 넣었다.
잠시 후, 아름다운 손이 레오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엘프를 본 헤르디움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자신도 모르게 떨어트렸다.
“아…… 아아…….”
헤르디움의 목소리가 떨렸다.
헤르디움 뿐만 아니다.
눈앞에 나타난 엘프를 보며 모든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이룬…… 님?”
쉽게 믿을 수 없는 일.
그러나 이미 세이룬은 지난 겨울.
성운의 시조의 재림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눈앞에 나타난 세이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히어로 레코드가 일으킨 기적에 엘프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엘프뿐만 아니다.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세이룬을 방문했던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상 루나 다음으로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혜성의 마법사.
일찍이 위기에 빠졌던 세계를 다시 한번 구해냈던 개벽의 영웅의 등장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서로 티격태격하던 루니아와 에이란까지 놀라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세이룬의 눈이 떨렸다.
그녀의 눈에 세이룬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들어왔다.
루니아와 에이란을 시작으로 여러 학생의 모습이 세이룬의 눈에 들어왔다.
“이게 너희가 뿌린 씨앗에서 자란 새싹들이야.”
레오는 세이룬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많은 영웅 후보생들이 너희가 개척해준 길을 따라, 너희의 뒤를 쫓아. 우리에게 닿기 위해 손을 뻗었지. 그 결과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어.”
영웅의 시대.
대영웅들이 에레보스를 토벌하고 신들이 히어로 레코드를 하계에 선물한.
5000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시대.
하지만 본격적으로 수많은 영웅이 폭발하듯 모습을 드러낸 건 개벽의 영웅들 이후였다.
“너희가 잘했냐고?”
모두가 고개를 조아린 사이.
레오는 손을 뻗어 세이룬의 머리를 흩트려주었다.
“너무도 감사할 정도야. 너희가 이룩한 건 리시나스가 그토록 염원했던 것이니까. 그러니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은 그만둬. 다른 녀석들에게도 꼭 전하고.”
“……네.”
세이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힘을 주어 말했다.
“모두 고개를 드세요.”
그 말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세이룬이 고개를 돌렸다.
무너져 내려 잿더미가 된 혜성의 전당이 보였다.
그걸 본 세이룬이 손을 뻗었다.
우웅-!
잿더미 속에서 밝은 빛이 혜성처럼 날아와 세이룬의 손에 붙잡혔다.
세이룬을 상징하는 지팡이, 코메테스.
지잉-!
코메테스의 지팡이 끝에서 마력이 출렁였다.
그와 동시에 무너져 내렸던 혜성의 전당이 순식간에 본 모습을 되찾았다.
그걸 본 모든 이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했다.
‘아니, 실제로 시간을 되돌렸어!’
영웅의 반열에 든 마법사들조차 엄두도 낼 수 없는 대마법.
그러한 마법을 간단하게 해냈다.
“여러분.”
세이룬이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있어 한낱 과거일 뿐이지만…… 이 학교의 설립자로서 여러분의 모습을 보니 너무도 기쁩니다.”
세이룬의 말에 세이룬의 학생들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세이룬의 눈이 가라앉았다.
“오래전 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나 저질렀어요. 이 학교에는 ‘별의 마법’을 익힌 자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교칙이었죠.”
세이룬 아카데미의 3000년 전통이 치명적인 실수라는 사실에 모든 이들이 놀랐다.
세이룬이 힐끗- 레오를 보았다.
이미 세이룬 아카데미의 문제에 대해서는 바깥세상으로 나오기 전, 레오에게 들었다.
“학교의 설립자로서, 오늘부로 그 교칙을 폐지하겠습니다.”
모든 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특히 몇몇 이들은 경기를 일으키듯 숨을 삼켰다.
다름 아닌 순혈회였다.
“그리고…… 레오 플로브.”
세이룬이 레오를 보며 빙긋 웃었다.
“오랫동안 제가 풀지 못한 ‘꽃을 피우는 마법’. 루나님의 유산을 되찾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야말로 나보다도 더 이 지팡이에 어울리는 마법사라고 생각해요.”
느닷없는 말에 레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모든 엘프들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세이룬에 레오에게 코메테스를 건네고 있었다.
마법사가 마법사에게 지팡이를 주는 행위.
그건 그 마법사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행위였다.
모든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레오와 세이룬을 번갈아 보았다.
레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코메테스를 받았다.
그러자 코메테스가 환하게 빛났다.
그걸 끝으로 시간이 끝난 듯, 세이룬의 몸 역시 밝게 빛났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오직 레오만이 세이룬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해요, 카일님.”
혓바닥을 살짝 빼물며 장난스럽게 웃는 세이룬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너, 이거 루나도 나한테 못한 일이야. 진짜 대단한 거라고.”
머나먼 과거.
자신이 마법을 가르쳐 줬으니 자신을 스승님이라 부르라며 주장한 적이 있었다.
강제로 지팡이를 떠넘기려는 루나를 무시했던 기억이 있다.
레오의 말에 세이룬이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무한한 영광이네요.”
예를 담아 인사를 한 세이룬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이제 어리석은 아이들이 다시는 카일님께 무례를 저지르지 못하겠죠.”
“그거 때문에 봐주는 거야.”
“후훗.”
세이룬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런 세이룬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조금만 더 힘내. 곧 갈 테니까.”
“네. 힘낼게요!”
세이룬이 밝게 인사하며 자취를 감추었다.
밝은 빛과 함께 레오는 어느새 세이룬은 사라지고 레오만이 남게 되었다.
모든 이들이 멍한 얼굴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오를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 인간이 세이룬님께 인정받다니! 용납할 수 없어!”
반쯤 경기를 일으키며 발작하듯 소리치는 오를렌을 보며 레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린 코메테스를 흔들어 보였다.
“그치만 전 세이룬님께 이걸 받았는걸요?”
눈앞에서 세이룬이 직접 코메테스를 레오에게 건넸다.
부정할 수도 없다.
세이룬은 학교의 설립자.
아무리 과거의 존재라도 그녀의 뜻을 결코 거스를 순 없었다.
순혈회의 어깨가 떨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세이룬의 선생과 학생, 학회 참석 마법사들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였다.
“자, 그럼…….”
레오가 코메테스를 고쳐 쥐며 말했다.
“왜 히어로 레코드에서 에레보스의 불꽃이 흘러나왔는지…… 왜 세이룬 한복판에서 언데드가 출몰했는지.”
레오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원인을 따져볼까요?”
순혈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용납할 수 없다! 이건 명백한 배신이야! 사령왕놈!’
르하겐이 속으로 악을 썼다.
히어로 레코드에 검은 불꽃이 일어나고 혜성의 전당 꼭대기에서 언데드가 출몰할 때부터 르하겐은 자신이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역시 더러운 마족과 거래 따위를 하는 게 아니었어! 책임을 물게 할 것이다! 세이룬님의 유골을 받아 내 강령술로…….’
저벅-
“어딜 가는 거지? 세이룬 교장 대행.”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르하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저벅- 저벅-
어느새 뒤에는 르하겐을 쫓아온 레오가 싸늘한 눈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