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
“칼 선배!”
“안녕하세요.”
개인 공방에서 나온 칼은 자신을 찾아온 쥬엔과 루크를 보며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 쥬엔, 루크. 여기까지 웬일이냐?”
“오랜만에 칼 선배와 저녁을 먹고 싶어서 왔죠. 밥 사주세요!”
쥬엔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쥬엔을 보며 칼이 환하게 웃었다.
“그럴까?”
하하하- 웃는 칼을 보며 기숙사 정원에 앉아 손톱을 가다듬던 엘리자가 픽- 웃었다.
“호구 잡힌 것도 모르고 좋아하는군요.”
엘리자는 특유의 깔보는 시선으로 칼을 보았다.
“자신에게 과분한 멘티를 챙기느라 참 힘들겠어요, 칼 토마스.”
“뭐라고요?”
엘리자는 자신의 비웃음에 도리어 발끈하는 쥬엔을 힐끗 보며 말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쥬엔 토르비나.”
엘리자의 싸늘한 목소리에 쥬엔과 루크가 움찔 몸을 떨었다.
레오에 묻힌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엘리자 역시 원래라면 강력한 학년 대표 후보였다.
루메른 역사상 최고의 황금 세대.
아마 다른 세대였다면 부동의 학년 대표는 물론이고 학생회장까지 확정 지을 만한 강함을 지닌 학생이었다.
아직 풋내가 나는 1학년들은 엘리자의 서늘한 시선과 눈만 마주쳐도 겁에 질리곤 했다.
“우리 기숙사장님께서는 왜 또 심기가 불편해서 후배 위협해서 삥뜯는 나쁜 선배처럼 구는 걸까.”
칼이 능글맞게 끼어들었다.
“지금 헤르긴 가문의 후계를 불량학생 취급하는 건가요?”
“너 불량학생 맞잖아. 동급생들 막 부려먹고. 수업도 제대로 안 듣는 게 불량학생이지.”
엘리자가 쌍심지를 켰다.
“그렇게 불리기 싫으면 내 멘티를 위협하는 행동은 그만두는 게 어때?”
칼이 쥬엔과 루크 앞에 서며 말했다.
“카, 칼 선배.”
쥬엔이 살짝 감동한 얼굴로 칼의 등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쥬엔은 나한테 과분한 멘티야.”
“아니에요! 칼 선배는 훌륭한 멘토세요!”
“고마워. 그리고 호구 잡혔다는 생각도 한 적 없어.”
엘리자는 그런 칼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후배 앞이라고 그럴듯하게 선배 행세를 하네요.’
“왜냐면 비싼 건 쥬엔이 다 사거든!”
“…….”
“쥬엔은 남부 마탑주의 딸! 엄청난 부잣집 딸내미라고! 가난한 선배에게 밥을 사줄 줄 아는 멋진 후배야!”
쥬엔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고 엘리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선배의 위엄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가 되는 기분이군요.”
“거기다가 마음도 넓어서 학식을 사주면 만족하는 후배기도 하지! 그치? 쥬…… 커헉!”
쥬엔은 망설이지 않고 칼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 넣었다.
“가자! 루크!”
잔뜩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가버리는 쥬엔을 보며 루크가 당황하며 칼을 부축했다.
“서, 선배님 괜찮으세요?”
“괘, 괜찮은데. 나 좀 부축해줄래?”
“네.”
루크는 칼을 번쩍 들어 쥬엔의 뒤를 쫓았다.
“너 힘 좋구나.”
칼의 칭찬에 루크가 어색하게 웃었다.
“삐졌냐? 삐졌어?”
“몰라요!”
“에이. 기분 풀어.”
칼이 킬킬거렸다.
“엘리자의 심기를 거스르면 괜히 네가 학교생활이 힘들어질 것 같아 그랬어. 원래라면 멘토로서 널 보호해주는 게 최고지만…… 난 엘리자를 막을 수 없거든. 방금 전 그게 내 최선이야.”
칼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세요. 난 칼 선배를 멘토 중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에요.”
쥬엔이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선택한 멘토가 스스로를 폄하하는 건 용납 못 해요.”
“고맙다. 너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맛있는 걸 사주지!”
멀리서 그 대화를 듣던 엘리자가 손톱을 후- 하고 불며 중얼거렸다.
“저런 걸 보면…… 멘티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네.”
멘티가 없는 것에 아쉽다거나 후회된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엘리자가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그리고 엘리자를 너무 싫어하지는 마. 선배 대우를 확실하게 해주면 잘해줄 거야. 이런 일을 마음에 담아 두는 타입도 아니고.”
“흥, 건방진 소리를 하기는.”
코웃음을 친 엘리자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쟤도 좀 안 됐단 말이지. 너도 알겠지만, 엘리자를 멘토로 삼고 싶어 하는 1학년은 한 명도 없었거든. 뭐 나 같아도 엘리자를 멘토로 삼고 싶진 않았겠지만. 우하하하”
팍-!
엘리자가 품에서 채찍을 꺼내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눈에는 살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죽었어.”
잠시 후 칼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
“사랑의 묘약이요?!”
식사 후 기숙사로 돌아가는 와중에 칼이 한 말에 쥬엔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약이 존재할 리 만무하잖아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쥬엔을 보며 칼이 씩- 웃었다.
“무려 드웨노님의 연금서에 수록된 약이야. 거짓말일 리 없잖아?”
“드, 드웨노님의 연금서?”
칼의 말에 쥬엔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러고보니 칼 선배는 전에 드웨노님의 연금서를 얻으셨지.’
“진짜 대박이네요.”
“그러게, 진짜 대박이다.”
“헉?”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쥬엔과 루크가 깜짝 놀랐다.
“안녕, 첼시.”
칼이 인사하자 쥬엔과 루크도 허둥지둥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첼시 선배.”
“응. 안녕.”
첼시는 쥬엔과 루크에게 손을 흔들어 준 후 팔짱을 끼고 칼에게 말했다.
“너 전에 이상한 약 만들었다가 학생회에 끌려갔잖아. 그런데 또 이상한 걸 만들어?”
“야, 드웨노님이 만든 묘약인데 이상한 건 너무했다.”
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효과는 기껏 해봐야 하루 정도 가는 게 전부거든?”
“하루?”
첼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리고 네 말대로 전에 학생회 끌려가서 험한 꼴 당했는데 내가 그걸 팔거나 하는 허튼수작을 하겠어?”
“그럼?”
“홍보 효과지.”
칼이 씩- 웃었다.
“생각해봐. 사랑의 묘약이라는 전설 속에나 나올법한 약을 만든 연금술사! 캬! 졸업 후에 내 장래가 탄탄해진다는 소리지!”
“졸업은 할 수 있고?”
“넌 갑자기 아픈 곳을 후벼 파는 버릇 좀 고쳐주면 안 되냐? 어쨌든!”
칼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의 묘약은 내일 학생회에 제출할 거야. 학생회에서 그런 약을 파는 걸 허락해 줄 리 없고! 난 그저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다는 타이틀만 있으면 된다는 소리지! 그러니까 너희! 내가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다는 소문을 내줘!”
웃음을 터트리는 칼을 보며 첼시가 팔짱을 끼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한심해.”
‘사랑의 묘약이라.’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첼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춘기 소녀에게는 확실하게 자극적인 말이었다.
다음날은 주말이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방문을 연 칼은 일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칼의 방문 앞에는 노블의 여학생들이 서 있었다.
“뭐, 뭐야? 아침부터.”
“칼.”
노블의 마법학과 여학생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랑의 묘약, 나한테 팔아.”
“뭐?”
느닷없는 여학생의 말에 칼이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사랑의 묘약에 관한 이야기는 2학년 전체에 퍼져 있었다.
“아니! 나한테 팔아!”
“생각보다 효과 없어도 뭐라 안 할게!”
“얼마면 되는데!”
“얘한테 팔지 말고!”
마법학과 여학생의 말을 시작으로 여학생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칼에게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걸 본 칼은 기겁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을 때도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여학생들을 밀어내느라 힘겹게 닫아야 했다.
철컥-! 철컥!
“칼! 문 열어!”
“팔라니까!”
쾅쾅쾅-!
문을 잠그자 노블 여학생들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에 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야! 너희 이거 함부로 사서 남한테 먹이면 학생회에 잡혀가!”
칼이 다급히 소리쳤다.
“어차피 효과는 하루뿐이라며!”
“조금 혼나고 말면 돼!”
“야! 나까지 혼나잖아!”
칼이 소리쳤지만 여학생들은 듣지 않았다.
그걸 본 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칼은 사춘기 소년, 소녀들에게 ‘사랑의 묘약’이라는 단어가 전해주는 마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특히나 루메른은 또래의 남학생, 여학생이 한곳에 모여 공부하는 곳.
당연히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틀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물론 또래 남녀가 모이는 곳이 그렇듯 루메른에서 역시 커플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루메른에도 절대 닿을 수 없는!
오르지 못할 나무가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 기숙사에도 두명이나 있잖아! 아바드와 듀란!’
가문이면 가문.
실력이면 실력.
심지어 외모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여학생들에게 편지와 선물을 받는 2학년 최고의 인기인들!
하지만 그런 인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바드나 듀란이 고백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결과가 뻔한 싸움을 하는 것도 이상했으니까.
연애는 거의 포기한 상태로 마음만 키워왔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묘약이란 게 있다면?
단 하루뿐이라도 달콤한 꿈을 꾸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평소 같았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루메른 학생들은 바보가 아니니까.
‘그런데 그게 대영웅, 드웨노님의 연금서에 수록된 사랑의 묘약이라면?’
징계를 각오하고서라도 원하는 학생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나……. 사고 친 것 같은데?’
만약 이게 효과가 있다면 이걸 쓴 사람은 물론이고 제조한 사람까지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칼은 일전에 학생회에 끌려갔을 때를 떠올렸다.
‘한 번 더 이상한 약을 제조해서 팔다가 적발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선배들의 싸늘한 시선을 떠올리며 칼이 몸서리쳤다.
“강제로 열자.”
“응, 먼저 손에 넣는 사람 거야.”
문 저편에서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책상 위의 황금색 액체가 담긴 병을 품에 넣었다.
‘튀자.’
그리고 창문을 열고 탈출을 감행했다.
문이 아닌 창문으로 출입하면 벌점이지만 알게 뭐란 말인가?
‘학생회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아마 소동을 듣는다면 당직을 서는 교수가 소란을 인지하고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잡히지 않고 버티면 된다.
‘오늘 당직 교수님이 누구였더라?’
***
“사랑의 묘약?”
2학년들 사이에 퍼진 소문은 곧장 당직 교수에까지 들어왔다.
주말은 교수들도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에 루메른을 비우곤 했다.
그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당직 교수가 남아 학생들을 관리했다.
유사시에는 다른 교수들을 학교로 소환하는 권한까지 있었다.
원래라면 소동이 일어난다고 해도 빠르게 일단락되는 게 정상이었다.
“사랑의 묘약이라.”
보고 받은 당직 교수, 렌이 턱을 쓰다듬었다.
“칼 학생이 실로 대단한 걸 만들었군!”
눈을 빛내는 렌을 보며 안나가 한숨을 쉬었다.
“학생들이 허튼짓을 할지도 모르니 빠르게 칼 학생에게서 약을 압수해오겠습니다.”
안나가 교수실을 나가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안나 부교수님.”
“네?”
회색 머리카락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 앉은 엘프. 티나 교수가 안나 부교수를 말렸다.
“이건 제법 흥미로운 실험이라고 생각 되는데요.”
티나의 말에 안나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루메른의 초빙 교수 티나 팅겔.
안나는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매드사이언티스트.
궁금한 건 해부해보고 실험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엘프였다.
그런 티나에게 있어 사랑의 묘약과 그 약을 먹은 자는 매우 흥미로운 연구 대상일 게 분명했다.
‘아니, 이 인간도 마찬가지야!’
안나가 티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렌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마법에 미친 두 교수를 보며 안나가 말했다.
“압수한다면 효과에 대한 실험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 실험을 하게 되겠지!”
렌이 소리쳤다.
“사랑의 묘약! 이야기 속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허무맹랑한 물건을 내 제자가 만들었네! 마법의 기적이지!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시험해봐야 하지 않겠나!”
“야이 미친 인간아! 학생들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교수가 어디 있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끼며 안나 부교수가 소리쳤다.
하지만 이곳에 안나 부교수의 편은 없었다.
“저도 렌 교수님 말에 동감입니다.”
“역시 티나 교수님과는 마음이 통하는군요.”
‘레오 학생을 세이룬에 교환학생으로 보낼 때만 해도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간악한 귀쟁이라고 욕하던 인간은 대체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마법 실험에 눈이 먼 두 교수를 보며 안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개탄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말리러 간다고 해도 렌이 붙잡을 게 분명했다.
‘또 시말서 쓰겠네.’
오늘도 고통받는 건 그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