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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름이네.”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연병장을 올려다보며 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2학년 1학기도 반 정도가 지나갔다.
어느새 루메른에도 여름이 찾아왔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칼이 후훗- 하고 웃었다.
“이 무더운 여름 날…….”
화르르르륵-!
“왜 저 거대한 불덩어리와 맞서 싸워야 하는 거지?”
“각오해라! 마법학과!”
온몸에 불꽃의 오러를 휘감은 셀리아가 소리쳤다.
불끈-!
여리여리한 소녀와 어울리지 않는 힘줄과 핏줄이 셀리아의 손에 솟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칼이 기겁하며 한쪽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에 바깥에서 응원하던 첼시가 소리쳤다.
“도망치지 마!”
“뭐?”
“도망치지 마! 맞서 싸워!”
“야! 난 저 무식한 공격에 맞으면 한방에 바로 아웃이거든!”
칼의 외침과 함께 셀리아가 힘껏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오러의 불꽃을 머금은 공은 마치 태양이라도 된 듯 마법 학과 학생들을 덮쳤다.
“으아아아악!”
“피할 곳이 없어!”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구궁! 화르르륵-!
화염의 구체가 내리꽂히자 불바다가 되었다.
그걸 본 첼시가 팔짱을 끼고 작게 중얼거렸다.
“한심해.”
순식간에 전멸해 버린 마법학과 학생들을 보며 셀리아가 훗- 하고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지금은 전 학년이 참가한 전투학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오늘 전투학 수업은 학과대항전 바스테라였다.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 이후 수업의 대부분은 기숙사 대항전으로 치러졌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펼쳐진 학과대항전에 다들 의욕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팀과 순번은 랜덤으로 정했다.
그리고 칼의 팀은 과의 선봉이라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상대팀에는 기사학과의 최종보스 격인 셀리아가 있었던 반면 칼의 팀에는 셀리아에게 대항할 만한 멤버가 없었다.
결과는 당연했다.
처참한 유린이었다.
“훌륭하다, 셀리아.”
“감사합니다. 아인 교수님.”
아인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칭찬하자 셀리아가 빙긋 웃었다.
기사학과 학생들이 달콤한 승자의 여유를 맛보는 사이.
“크흑! 너희의 희생은 헛되이 하지 않을게.”
“꼭 복수해주마…… 그곳에서 편히 쉬어라!”
마법학과 학생들은 패배의 쓴맛을 맛보고 있었다.
다른 마법학과 학생들이 칼을 포함해 미동도 하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동기들을 보며 분한 듯 중얼거렸다.
“야이 자식들아.”
“우리 안 죽었거든…….”
고통에 찬 목소리로 끙끙거리며 칼의 팀원들이 중얼거렸다.
부유 마법으로 칼의 팀을 수습한 첼시가 한숨을 쉬며 렌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첼시 학생, 우리 마법 학과에는 필요 없는 게 한 가지 있다, 뭔지 아나?”
“패배자요?”
“아니.”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꼬고 턱을 괸 렌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기사학과에 패배한 자들이다, 의무실에 갖다 버리도록.”
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첼시가 연병장에 붙어 있는 의무실로 학생들을 보냈다.
“넬라 언니! 애들 데리고 왔어.”
“응, 여기에 눕혀.”
의무실에는 넬라가 대기하고 있었다.
기사학과의 우등생 중 한 명인 넬라는 힐러에 특화된 오러 특성 때문에 전투학 수업 중 대항전이 있을 때면 이렇게 힐러로서 활약하곤 했다.
“넬라 누님.”
“치료해주세요.”
마법학과 남학생들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너흰 졌는데 좋냐?”
첼시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하자 남학생 한 명이 훗- 하고 웃었다.
“학년 최고의 미소녀 중 한 사람인 넬라에게 치료받으면 마음까지 치유되는 기분이라고!”
“그래서 셀리아 제르딩거에게 아무것도 못 해보고 진 게 자랑이니? 응?”
“악! 아파! 아파!”
첼시가 마법 지팡이로 화상 입은 곳을 콕콕 찌르자 남학생이 비명을 내질렀다.
“첼시, 환자를 괴롭히면 못 써.”
“응.”
1학년 5반 당시 첼시가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둘이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레오고 다른 한 사람이 넬라였다.
부상자들을 의무실에 데려다 준 첼시는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학생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레오에게 다가갔다.
“다음은 누구야?”
레오 옆에 앉은 첼시가 물었다.
“클로에 팀이랑 엘리자 팀.”
“클로에 파이팅! 엘리자 헤르긴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려!”
첼시가 큰 소리로 클로에를 응원했다.
그런 첼시를 보며 빙긋 웃은 클로에가 지팡이를 쥐고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레오 오빠는 어느 학과로 출전해?”
“이번에는 소환학과로 출전해.”
소환학과는 상대적으로 인원수가 적다.
그렇다 보니 인원수를 맞추기 위해 이런 학과 일정에서 레오는 소환학과로 출전하곤 했다.
물론 레오가 작정하고 전력을 드러내면 밸런스가 맞지 않기에 3대 환수의 소환은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적이야? 오랜만에 같은 편을 하고 싶었는데.”
첼시가 입술을 살짝 내밀며 뚱한 표정을 짓자 레오가 빙긋 웃었다.
“다음에 같이 팀을 짜면 되지.”
“그래도 한 달 동안 늘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레오가 손을 뻗어 첼시의 머리를 흩트려 주었다.
“알고 있어.”
첼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오를 바라보았다.
“네가 한 달 동안 얼마나 실력을 키웠는지.”
레오가 세이룬에 가 있는 동안.
2학년들은 모두 영웅의 세계를 공략했다.
그를 통해 모든 학생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중에는 몇 발자국이나 나아간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첼시는 그런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첼시가 방긋 웃더니 레오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첼시뿐만이 아니야.’
지난 중간고사 당시.
레오는 미래를 나아갈 영웅 후보생을 선택했다.
절망에 가까운 차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레오가 선택한 이들 중 포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흥, 여유만만이시군.”
뒤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앞서 있는 학생회장님께서는 여유를 부려도 된다는 건가?”
레오가 뒤를 돌아보아 보니 듀란이 앉아 있었다.
레오는 그런 듀란과 눈을 마주친 다음 다시 경기장 쪽을 보았다.
“딱히 여유 부리는 건 아니야.”
레오가 말했다.
“첼시가 됐든, 네가 됐든. 나와 언젠가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뿐이야. 그래서 난 너희가 더 강해졌으면 좋겠어.”
듀란의 눈이 꿈틀거렸다.
같은 길.
듀란은 1학년 당시의 레오의 목표를 떠올렸다.
‘에레보스의 토벌.’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걸 목표로 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한 번쯤.
그런 꿈을 꿔보고는 한다.
‘이 자식, 지난 중간고사 때 자격 운운을 한 건 설마…… 그런 의미였나?’
“그 길의 끝에 서서 기다리겠다는 건가?”
“그래. 그러니 나와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면 언제든지 쫓아와.”
듀란에게 등을 돌린 채 앉은 레오가 입을 열었다.
“정점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건방진.”
듀란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 눈에 투쟁심은 더욱 불이 붙었다.
‘레오 플로브.’
듀란이 손에 힘을 주어 쥐락펴락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쫓아가 주마.’
***
전투학 수업이 끝난 다음 수업은 멜의 영웅학 특별 수업.
멜의 영웅학은 2학년 전체가 손꼽아 기다리는 수업이기도 했다.
올해 신입 교수였지만, 멜은 이미 루메른 최고 인기 교수로 자리 잡았다.
특별 영웅학 수업의 내용은 황혼의 기사, 루메른과 관련된 수업.
학년에 관계없이 인기가 좋은 수업 내용이었다.
수업이 재미있는 건 물론이고 학생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었다.
거기에 더해 수업 내용이 가혹한 루메른에서 마음 편히 들을 수 있는 수업.
남녀노소 구분 없이 인기가 없으려야 인기가 없을 수 없었다.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팬클럽까지 생겼을 정도라니까.”
수업을 들어가는 길에 레오와 만난 칼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미녀 누님 교수, 로망이지.”
칼과 함께 점심을 먹은 테이드도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겠지.”
“레오 너 이 자식!”
“지금 멜 교수님에게 할머니라고 한 거냐!”
“멜 교수님의 수업은 우리에게 있어 마음의 오아시스라고! 오아시스!”
칼과 테이드가 발끈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그런데 지각하냐?”
“어허! 멜 교수님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신다고!”
“맞아!”
“멜 교수님 수업이야말로 힐링이지!”
“그럼! 그럼!”
칼이 강의실 문을 열며 외치자 테이드가 동의했다.
“배짱 한 번 좋군. 지각을 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칼이 연 건 다름 아닌 지옥문이었다.
안에서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에 칼과 테이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할린드는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10분 지각이라. 신성한 수업 시간에 늦은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게 좋을 거야. 다른 2학년들을 위해서라도.”
다른 2학년들의 살벌한 시선이 세 사람에게 꽂히고 있었다.
할린드.
루메른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남자.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지각이었다.
그리고 할린드의 가장 무서운 점은 연좌제라는 점이었다.
연좌제에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지각생들을 효율적으로 처벌하기 위한 할린드 특유의 방식이었다.
당연히 지각한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갈굼 당한다.
세 사람 외에도 지각생이 있었는지 강의실 입구 옆에서 머리를 박고 있었다.
칼과 테이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였다.
“점심에 학생회 회의가 있었는데요.”
손을 든 레오가 덤덤히 말했다.
“통과.”
할린드의 시선이 칼과 테이드에게 향했다.
칼과 테이드는 말없이 지각생들 옆에 머리를 박았다.
“마음 같아서는 전원에게 교육을 시켜주고 싶지만 내 수업이 아닌 관계로 이번만큼은 넘어가도록 하지.”
할린드의 말에 2학년 전체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각한 녀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그 말에 지각생들이 벌떡 일어났다.
살았다! 는 표정을 짓는 지각생들을 보며 할린드가 말했다.
“너희는 단상 위로 올라와서 머리를 박아라.”
그 말에 지각생들이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할린드 옆으로 이동해 머리를 박았다.
“내가 2학년 수업에 온 게 의아할 녀석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온 이유는 오늘 수업이 1, 2학년 합동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 말에 2학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강의실에 웅성거림이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1학년들을 인솔한 멜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여러분. 각자 멘토에게 가세요.”
멜이 방긋 웃으며 묻자 1학년들이 멘토를 찾아갔다.
“하, 할린드 교수님. 저희도 자리로 갈까요?”
“그럴 필요가 있나?”
칼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할린드가 싸늘하게 웃더니 지각생들의 멘티를 불렀다.
그리고 멘토들 옆에 서게 만들었다.
“훌륭한 멘토지 않나? 지각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몸소 보여주니 말이다.”
할린드의 말에 2학년들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칼 선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칭찬할 것까지는 없는 데.”
“칭찬 아니거든요!”
쥬엔의 말에 칼이 능글맞게 대답했다.
그렇게 멘토와 멘티가 한자리에 앉았다.
클로에가 손을 들었다.
“할린드 교수님, 멜 교수님. 오늘 수업은 어떤 수업인가요?”
클로에의 물음에 멜이 빙긋 웃었다.
“수업 전에 공지 사항이 있습니다.”
멜이 할린드를 바라보자 할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헛기침을 한 멜이 말했다.
“1, 2학년 임무 실습에 관한 공지를 하겠습니다.”
“임무 실습?”
“저희도 임무 실습을 가나요?”
1학년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임무 실습은 최소한 1학년 2학기가 되어야 진행된다.
“네. 정확하게는 2학년들과 합동으로 진행되는 임무 실습이지만요.”
멜이 빙긋 웃었다.
그런 멜의 말을 받아 할린드가 말했다.
“이번 임무 실습은 멘토와 멘티가 한 팀이 되어 진행된다.”
할린드의 말에 1학년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임무 실습 내용은 영웅 던전 탐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