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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의 물음에 라르엘은 일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네가 살아야 했던 시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앞의 정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라르엘의 얼굴 앞까지 날아간 엘시가 살짝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세계를 포기했다고 말하면서도 후대에 넘기지 않고 소멸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건 뭐가 됐든 아직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 아니에요?
볼멘 목소리로 툴툴거린 엘시가 말했다.
-자기가 무슨 세상의 어둠을 모두 본 것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엘시.
평소의 엘시답지 않았다.
하지만 엘시는 엘시 나름대로 눈앞의 대정령이 답답했다.
그 누구보다 찬란한 빛을 가졌으면서 어둠을 추구한다.
더 밝게 빛날 수 있는데. 스스로의 빛을 죽이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은 떠안는 건 빛의 정령의 몫이 아니다.
희망의 등불을 비추며 사람들을 이끄는 것.
그것이 바로 빛의 정령이었다.
“네가 본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라르엘이 얼굴을 찡그렸다.
“넌 내 어둠을 이해할 수 없어.”
-그럼 먼저 당신이 봤던 어둠을 보여주세요.
“내 어둠을 네가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물론이죠.
엘시가 환하게 웃었다.
‘어둠의 정령 주제에 밝기는……!’
라르엘은 엘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르엘의 손 위에는 작은 빛무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정신이 붕괴해도 난 몰라.”
무려 대정령이 괴로워한 어둠이다.
정신체인 정령은 정신에 균열이 가면 치명상을 입는다.
라르엘의 말에 엘시는 웃으면서 빛무리에 손을 뻗었다.
화악-!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아주 일순간이었다.
하지만 엘시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긴 시간.
엘시가 눈을 떴다.
별빛조차 없는 밤하늘처럼 까만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라르엘의 얼굴을 비췄다.
엘시는 쓰게 웃었다.
그런 엘시를 보며 라르엘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 순간.
-많이 힘들었겠군요.
손을 뻗은 엘시가 작은 손바닥으로 라르엘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마치 다 이해 한다는 듯 자신을 위로해주는 엘시를 보며 라르엘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대체 뭔데.”
자신이 품은 어둠이 이렇게 손쉽게 이해받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나?
“넌 뭔데 날 그렇게 쉽게 이해하는 건데!”
-음.
엘시가 곤란한 듯 볼을 감싸 쥐고 생각에 잠겼다.
-경쟁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보다 더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겠죠.
씁쓸하게 웃은 엘시가 손을 뻗었다.
어둠이 일렁였다.
-한 번 볼래요?
라르엘은 엘시의 어둠을 바라보더니 손을 뻗었다.
어둠이 라르엘의 몸을 휘감았다.
잠시 후 라르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넌…… 넌 대체 뭐야?”
라르엘이 본 엘시의 시대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어떻게 재앙의 시대를 살았던 거야?”
-난 과거의 대정령이에요.
엘시가 자신을 소개했다.
-재앙의 시대 태어나 재앙의 시대에 소멸했던 어둠의 대정령, 그림자 정령 엘시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는 엘시를 보며 라르엘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5000년전에 소멸했던 대정령이 이 시대에 있는 거지?”
-히어로 레코드의 힘을 빌렸죠.
라르엘은 엘시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본 기억 속의 풍경은 분명 재앙의 시대였다.
로디아의 맹약자로서 함께 대영웅들의 히어로 레코드를 공략했기에 그 시대의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히어로 레코드를 통해 일부분을 그 시대를 체험한 것과 직접 살아야 했던 자의 절망은 완전히 달랐다.
라르엘의 손이 떨렸다.
엘시의 기억을 보고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뗀 라르엘이 엘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거야?”
그러한 절망적인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엘시는 희망이 끈을 놓지 않았다.
-글쎄요.
엘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아마…… 그만큼 빛이 아름답기 때문일 거예요.
밝게 웃는 엘시의 모습이 라르엘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레오가 쓰게 웃었다.
레오는 또 다른 엘시를 알고 있다.
지금의 엘시가 삐뚤어지기 전의 엘시라면.
레오가 원래 알고 있던 엘시는 그 누구보다도 세상에 회의감을 가진 정령이었다.
‘그런데도 세계를 위해 희생했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밤하늘의 별빛을 위해 엘시는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가장 어두웠던 시대, 가장 어두운 존재로 태어난 엘시는 그런 정령이었다.
-그러니 이 세계를 포기하지 말아요.
라르엘의 뺨을 어루만져주며 엘시는 밝게 웃었다.
-당신의 맹약자를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분명 모두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빛을 잃었던 이 세계가, 다시 한번 빛을 되찾은 것처럼.
라르엘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라르엘에게 있어 그 한마디는 구원과도 같았다.
***
라르엘은 엘시와 같은 손바닥 크기의 작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라르엘이 레오를 바라보았다.
-레오 플로브, 넌 대체 정체가 뭐야?
재앙의 시대 당시의 정령을 맹약자로 두고 있는 영웅 후보생이라니.
라르엘의 물음에 엘시가 말했다.
-레오 앞에서는 절대로 내가 힘들었네, 뭐네 하면 안 돼요.
-네?
-잘못하다가는 ‘네가 에레보스와 싸워 봤어? 아니면 세상이 멸망하는 걸 봤어?’ 같은 잔소리를 들을 거예요. 아까 들었죠? 요즘 것들이라고 하는 거?
“넌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작게 한숨을 쉰 레오가 힐끗- 라르엘을 보았다.
“난 시작의 영웅의 환생이야.”
-시, 시작의 영웅?
상상도 못 한 레오의 정체에 라르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못 믿겠어?”
-에, 엘시님의 정체를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어느새 엘시를 향한 라르엘의 말투는 존칭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엘시는 재앙의 시대에 대영웅들과 함께했던 대정령.
라르엘에게 있어서는 대선배와도 같은 위치였다.
‘레오 플로브는 올 클래스. 거기에 계속해서 심상치 않은 행보를 보여왔어.’
히어로 레코드가 존재하고 영웅의 시대가 열리고 5000년.
심지어 영웅의 세계의 존재가 밝혀진 이후에도 카일과 같은 능력을 지닌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개벽의 영웅들조차 카일의 힘을 계승한 자가 없었다.
레오를 보며 머뭇거리던 라르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정말 당신이 시작의 영웅이라면.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라르엘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정말 지혜의 왕이 당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나요?
“…….”
레오가 무표정한 얼굴로 라르엘을 바라보았다.
그런 레오의 시선에 라르엘이 자신도 모르게 찔끔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정말로 몰랐겠어? 세계를 구하는 여정을 떠나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외면했을 뿐이야.”
엘시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레오를 바라보았고 라르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렇죠? 로디아가 그랬거든요! 리시나스님이 너무 불쌍하다고, 대놓고 저렇게 배울 필요도 없는 용족의 예법까지 가르치는데 그걸 눈치 못 채면 진짜 병신이라고.
레오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진짜.’
세이룬은 등신이라고 하질 않나, 로디아는 병신이라고 하질 않나.
잔소리 이전에 응징부터 해야겠다고 레오가 생각한 레오가 말했다.
“그럼 묻겠어. 광채의 정령.”
라르엘 앞으로 다가온 레오가 말했다.
“나와 맹약을 맺겠어?”
라르엘은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대대로 빛의 대정령은 세계를 이끌어갈 자를 맹약자로 삼아 왔다.
재앙의 시대 당시.
세계를 구원으로 이끌 자는 지혜의 왕 리시나스였다.
그리고 재앙의 재림 때는 그 역할을 개벽의 용 로디아가 대신했다.
-카일님께서 다시 한번 태초의 악과 맞선다면…… 다시 한번 카일님의 모든 걸 걸어야 할 거예요. 그만한 가치가 이 세계에 있다고 생각되시나요?
“가치라.”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옛날에 엘시도 그런 걸 나에게 물었었지.”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자신이 했던 말에 엘시가 쓰게 웃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고. 우리가 구하려고 했던…… 구했던 세계가 아름답기만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거든.”
‘우리는 세계를 구원할 거야.’
야속하게 먼저 떠나 버린 친구가 전해준 말을 떠올렸다.
‘왜 구원해야 하는 거야? 이 세계에 그만한 가치가 있어?’
거기에 대고 삐딱하게 대답했던 자신의 말도 떠올렸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꽃도 가득 피고 아이들이 밝게 웃기도 하는 아름다운 세상이기도 해.”
레오는 바깥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가치가 있냐, 없냐로 판단할 게 아니지.’
“가치가 있냐, 없냐로 판단할 일이 아니지.”
뒤돌아선 레오의 등 뒤로 붉은 노을이 쏟아졌다.
‘내 소중한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했던 세계, 그리고 살아갈 세계야. 내 모든 걸 걸 이유는 그것 하나면 충분해.’
“내 소중한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했던 세계, 그리고 살아갈 세계야. 모든 걸 걸 이유는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고 어떤 녀석이 가르쳐 줬거든.”
-그 이유 하나면 정말로 충분한가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지혜로웠던 녀석이 가르쳐준 사실이야, 그러니까 확실해.”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레오를 보며 라르엘이 고개를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카일님, 아니. 레오 플로브님. 저는 당신의 맹약자가 되어 당신이 나아갈 길을 열 검과 방패가 되어 힘을 보탤 것을 약속드릴게요.
라르엘이 고개를 들어 손을 뻗었다.
레오의 손등에 계약의 문장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세계를 구해주세요.
“그래. 잘 부탁해, 광채의 정령.”
***
해가 진 야심한 밤.
앞장서서 골목을 걷던 일리아나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반장이 야시꾸리한 거리로 들어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그런 일리아나의 말에 첼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오 오빠가 그런 이상한 골목에 갈 리 없잖아.”
불신 가득한 첼시를 보며 일리아나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평소 반장 이미지라면 그럴 리 없지! 근데 반장도 남자애잖아!”
일리아나의 말에 클로에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칼에게 물었다.
“칼, 넌 어떻게 생각해?”
“글쎄, 레오야 그런 쪽으로 관심을 보인 적이 없긴 하지.”
“맞아, 어른스러운 레오인걸?”
“얘들이 뭘 모르네.”
일리아나가 검지를 치켜들고 까딱거렸다.
“반장은 굉장히 어른스럽다고.”
“그렇지.”
“어른은 굉장한 일들을 한다고.”
“그 굉장한 일이 뭔데?”
첼시가 눈을 게슴츠레 뜨자 옆에 있던 칼이 능글맞게 웃었다.
“다 알면서 뭘 물어? 두 사람이 한 방에 들어가면 세 사람이 되는 굉장한 마법.”
“아니! 네 사람이 될 수도 있는 마법이지!”
콱-!
“컥!”
“켁!”
첼시가 양팔로 칼과 일리아나의 목을 후려쳤다.
“저질스러운 농담은 적당히 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첼시를 보며 클로에가 혀를 찼다.
“조사 차원에서 갔겠지.”
그렇게 네 사람이 환락의 거리 입구에 도착했다.
“할머니!”
“아까 비명 지르면서 도망쳤던 꼬마 아가씨로군.”
야심한 밤.
끌끌- 웃은 노파가 말했다.
“이 거리는 밤에 더욱 굉장한 걸 볼 수 있지. 흥미가 있어서 왔나?”
“그런 거 흥미 없거든요!”
일리아나가 빽 소리치자 옆에서 칼이 음흉하게 웃었다.
“정말?”
퍽-!
“컥?”
명치를 맞은 칼이 무너졌다.
“아까 들어갔다던 남자애. 혹시 어디 간지 알아요?”
“나는 나가는 걸 못 봤으니 아직 환락의 거리에 있겠지.”
그 말에 일리아나가 흠칫하더니 말했다.
“이것 봐! 조사를 이렇게 오랫동안 할 리 없잖아! 반장은 여기서 어른의 세계에 빠진 게 분명해!”
클로에와 첼시도 레오가 오랫동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칼은 입을 떡 벌렸다.
“와, 역시 레오야. 엄청 대범하잖아?”
“레오 오빠가 그럴 리 없잖아!”
첼시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치자 칼이 움찔했다.
“아, 아니! 나한테 소리쳐도.”
“너희들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입구에서 레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리아나는 그런 레오를 위아래로 휙- 휙- 살폈다.
첼시와 클로에가 살짝 머뭇거릴 때였다.
“반장 솔직하게 말해.”
“뭘?”
“여기서 놀다 왔지? 어른의 세계를 경험 한 거지? 그런 거지?”
그 말에 레오가 일리아나의 볼을 잡아당겼다.
“뭐라는 거야?”
“하, 하지 마!”
“이게 발랑 까져가지고. 너 내가 기숙사에 불건전한 잡지랑 소설 잔뜩 숨겨 왔을 때부터 알아봤어.”
“악! 악! 악!”
일리아나가 붉어진 얼굴로 레오의 말을 막기 위해 비명을 질렀다.
“말 안 하기로 했잖아!”
“그런 거만 잔뜩 읽으니까 이렇게 이상한 상상만 하는 거 아니야?”
“말하지 말라고!”
일리아나가 다급히 항의했지만, 레오에게 혼나면서 흑역사가 공개될 뿐이었다.
“난 가끔 레오가 애들 혼내는 거 보면 드는 생각인데.”
첼시가 칼을 보았다.
“부모님한테 혼날 때 생각나지 않냐?”
“응, 동감이야.”
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클로에를 보았다.
“표정이 살벌한데?”
“일리아나를 좀 혼내려고.”
기숙사장인 클로에는 일리아나가 반입 금지 물건을 들여온 것에 화를 내고 있었다.
“네가 엄마냐?”
퍽-!
“컥!?”
괜한 말을 했다 옆구리를 맞고 바닥을 뒹구는 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