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
레오는 눈앞에 앉아 있는 델레안을 바라보았다.
델레안은 그런 레오를 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이곳, 쉐도우의 지하에는 개벽의 용, 로디아님이 남긴 유산이 잠들어 있을 확률이 높아.”
델리안의 레오 옆에 앉아 있던 아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죠? 직접 본 건가요?”
“나는 오랜 시간 이 나라에서 영웅 학자로서 많은 걸 조사해 왔거든.”
영웅 학자.
영웅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영웅의 흔적을 발굴하는 자를 말한다.
그들이 활동하는 분야는 다양하다.
히어로 레코드에 기록은 되어 있으나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아 영웅의 세계를 여는 것이 불가능한 영웅들의 유물을 추적하고 찾는다든가.
혹은 머나먼 과거에 사라진 국가의 유적을 찾아 그곳에서 영웅의 흔적을 찾는다든가.
혹은 사라진 히어로 레코드를 발굴해내는 일 등을 한다.
그 과정에서 영웅 던전의 공략을 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영웅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던 영웅 사관 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많은 영웅 학자들이 엘레헴을 주목하지 않고 있어. 기나긴 역사를 지닌 만큼 많은 영웅이 탄생한 나라임에도 말이야.”
“엘레헴의 영웅들과 관련된 기록과 유적은 전부 현재 엘레헴의 영토 바깥에서 발견되고 있으니까요.”
델레안의 말에 아르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 말대로 엘레헴 출신의 영웅들의 기록은 모두 엘레헴의 옛 영토에서 나오고 있다.
그 대부분이 오래전에는 엘레헴의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완전히 독립하여 다른 나라에 소속된 영웅 명가다.
“그렇지. 게다가 엘레헴에서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영웅이 탄생하지 않았으니까.”
과거의 영웅들은 모두 엘레헴과의 연관성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난 수백 년 동안은 영웅이 탄생하지 않는다.
영웅 학자들이 관심을 둘만 한 요소가 어디에도 없는 나라였다.
“하지만, 이 나라는 개벽의 용 로디아님이 탄생한 나라야. 그것만으로도 연구 가치는 무궁무진하지.”
“개벽의 영웅들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끝이 났을 텐데요.”
레오가 말했다.
“3000년 동안 연구된 덕분에 개벽의 영웅들의 유산은 대부분 밝혀졌습니다.”
“맞아. 황혼의 기사 루메른, 혜성의 마법사 세이룬, 대전사 아조니아, 불굴의 데미안까지. 그분들의 유지는 영웅 사관 학생들이 이어가고 있지. 나 역시 루메른님의 유산을 이어 조금은 이어받았고 말이야.”
개벽의 영웅들의 유산은 그들이 후대에 남긴 정신과 히어로 레코드.
그리고 그들이 사용했던 ‘무구’를 의미한다.
개벽의 세계 자체는 현재 남아 있지 않기에 실질적인 계승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너희도 알지 않아? 모든 개벽의 영웅들이 대영웅과 관련된 유산을 남겼지만 로디아님만큼은 리시나스님과 관련된 유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
델레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상하지 않아? 로디아님은 개벽의 상징과도 같은 분이야. 그분의 뜻에 의해 영웅 사관 학교가 탄생했어.”
영웅 사관 학교를 설립한 것은 황혼의 기사와 혜성의 마법사, 대전사와 불굴.
이렇게 넷이지만 최초로 학교를 설립하여 영웅을 육성하자는 의견을 낸 것은 로디아였다.
영웅 사관 학교의 설립자인 네 영웅은 후대를 위한 자신들의 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로디아는 아니다.
용족을 위해 남긴 것은 있지만 다른 동료들과 비교한다면 확실하게 부족하다.
델레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신의 뒤를 이을만한 자격이 있는 이를 위해 안배를 남겨뒀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난 오랫동안 그렇다고 생각하고 개벽의 영웅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했어. 그리고 로디아님이 남긴 것이 로디아님의 고향인 이곳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리고 이 쉐도우 지하의 미궁은 유일하게 이 나라에서 내가 연구하지 못한 곳이야.”
그 추론은 옳았다.
실제 로디아는 라르엘의 맹약자가 될 이를 위해 이곳에 보물고를 남겼다.
라르엘의 도서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설 역시 존재한다.
델레안의 말에 레오가 말했다.
“그 이야기를 우리한테 하는 이유가 뭐죠?”
지하 미궁에 로디아의 유산이 있다고 생각을 했다면 혼자서 공략을 하는 게 옳다.
그래야 유산을 독차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델레안은 협력을 제안했다.
물론 레오는 보물고의 정체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레오가 라르엘과 맹약을 했기에 아는 사실이다.
“애석하게도 난 쉐도우 지하에 미궁의 존재는 확인했어도 공략은 하지 못했거든.”
“루메른의 졸업생이 공략에 실패했다면 2학년인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을까요?”
“루메른의 최연소 학생회장께서 겸손이 심하시군.”
빙긋 웃던 델레안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하게는 공략시도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이 쉐도우의 마스터가 허락하지 않았거든.”
“그렇다면 저도 허락받지 못하면 끝 아닌가요?”
“그렇지. 하지만 쉐도우의 마스터는 마음에 든 이에게 공략을 허락한다고 했어. 너라면 충분히 그녀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거야. 그녀와 면담하기 위해 1억 포인트가 필요하지? 그 부분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어때?”
‘만나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상대에게 그만한 거금을 선뜻 건넨다고?’
레오는 빙긋 웃었다.
“제의는 고맙지만 거절하죠.”
“어째서지?”
“지나친 호의는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델레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호오. 지나친 호의를 거절하는 건 거절하지만 호의를 베푼 상대에게 그 사실을 말하는 건 어리석군.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가?”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연구를 했다고 했죠?”
“그래.”
“그렇다면 엘레헴 왕실 소속이라는 말이겠죠.”
그 말에 델레안이 멈칫했다.
“루메른 학생들이 왜 엘레헴에 왔는지는 알고 있죠? 여기서 척지든 말든 어차피 함께할 수 있는 사이가 애초에 아니잖아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오를 보며 델레안이 선한 웃음을 지었다.
“선배로서 충고하겠는데. 이 나라에는 루메른에서 생각하는 건 없어. 그러니 괜한 시간 낭비를 하지 말고 내 제의를 받아들여. 선배로서 베푸는 마지막 관용이다. 학생회장으로서 성과가 있는 편이 너에게도 좋지 않겠어?”
“시간 낭비인지 아닌지는 조사가 끝나보면 알겠죠. 그리고 딱히 당신과 협력하지 않아도 미궁 탐사는 할 수 있어요.”
“후후. 최연소 학생회장이라 그런가? 자신감이 지나치다 못해 오만하군. 주제 파악을 해라. 넌 2학년이야. 졸업생인 내 입장에서는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일 뿐이지. 하르크 리그아르드나 엘레나 제르온이라면 내 제의를 받아들였을 거다.”
‘엘레나는 다짜고짜 공격을 했을 거고 하르크는 잔다고 무시했을 걸.’
레오가 아는 학교 선배들은 그런 인간들이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두 사람은 루메른의 3대 명가 출신.
루메른의 뜻에 반하는 자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델레안을 보며 혀를 찬 레오가 아르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갑자기 고압적인 자세가 됐네. 눈도 살짝 맛이 간 것 같았어.”
아르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에 레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런 눈을 가진 놈들을 알고 있지.’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의 눈이다.
그리고 그 수단과 방법이 어디까지 가는지도 잘 알고 있다.
레오는 관자놀이에 손을 댔다.
우웅-!
작은 마력의 파동이 일렁였다.
-이런 식으로 부르시는 건 처음이네요.
레오의 귓가로 살짝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첸 시아였다.
첸 시아가 레오에게 건넨 아티팩트를 이용한 통신이었다.
영웅을 꿈꾸는 첸 시아지만 그림자로서의 자신도 부정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레오에게 구원받은 후에 첸 시아는 그림자로서 레오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 아티팩트를 이용한 이유라면 단 하나.
-명령을 내려주세요, 주인님.
“그 호칭은 집어치워. 뭔가 이상한 놈이 되는 기분이니까.”
-하지만 저는 좋은데요?
장난기와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떤 명령을 따르면 될까요, 레오 도령.
“우아르겔라의 지하 카지노인 쉐도우에 와줄 수 있어?”
-지금 당장 갈게요.
통신이 끊긴 후 레오가 아르를 바라보았다.
“너 말고 이 카지노에 빚을 진 아조니아 학생들은 몇이나 있어?”
“나 포함해서 17명.”
꽤 많은 숫자에 레오가 혀를 찼다.
“빚은 갚을 수 있어?”
“걱정 마! 다들 다음 주면 다 갚고 이 지긋지긋한 곳을 탈출할 수 있으니까!”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활짝 펴며 당당하게 말하는 아르를 보며 레오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 학교 애들은 아조니아 애들처럼 바보 같지 말아야 할 텐데.’
“빚을 갚는 방법이 뭐야?”
레오의 물음에 아르가 씩- 웃었다.
“투기장.”
*
“그러니까.”
첼시가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포인트를 다 잃었단 말이야?”
“반장 쓰리 사이즈만 알았어도 1억 포인트를 모을 수 있었어.”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일리아나를 보며 첼시가 말했다.
“바보.”
“윽.”
첼시의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는지 일리아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래도 빚은 안 졌어!”
“후배 포인트까지 끌어다가 탈탈 털어 먹었는데 빚까지 졌으면 바보가 아니라 멍청한 거지.”
첼시의 싸늘한 말에 일리아나는 딴청을 부렸다.
“일리아나만 탓할 건 아니야. 우리도 대부분 돈을 잃었으니까.”
클로에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칼이 칩을 허공에 튕겼다.
띵!
청량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회전하는 칩을 탁- 잡은 칼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난 땄는데.”
“얼마나?”
“1000 포인트.”
“많이 따기는했디만 턱도 없네.”
첼시가 작게 한숨을 쉴 때였다.
“역시 돈을 벌만한 건 이벤트 뿐인 모양이네요.”
쥬엔이 한숨을 쉴 때였다.
“그나저나 레오는 언제 오는 거야?”
이미 약속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올 생각을 하지 않는 레오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오늘도 쉐도우를 방문해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 반갑습니다!]
갑자기 확성 마법이 카지노 전체를 강타했다.
카지노 내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중앙으로 몰렸다.
바닥이 갈라지며 천장에서는 철제 우리가 내려왔다.
[오늘도 명예로운 혈투의 무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남자 해설의 말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일행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철컹- 철컹-
천장에서 내려온 철창이 거대한 투기장을 만들었다.
안에 들어간 이가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팟-!
카지노 내부의 조명이 꺼지고 투기장 가운데 스포트라이트가 비췄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소년을 본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어머, 저렇게 어린 소년이 첫 도전자란 말인가요?”
“아아, 안타깝군요.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귀부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는 그들의 말투와는 다르게 눈에는 묘한 흥분감이 깃들어 있었다.
곧 저 소년이 절규에 찬 비명을 내지를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눈이었다.
[오늘의 첫 도전자는 챔피언을 꺾는 것이 목표라는 당찬 포부를 남겼습니다! 자! 과연 도전자는 챔피언에 도달할 수 있을지! 대망의 첫 경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그와 함께 바니걸들이 나타났다.
[도전자의 첫 상대는 빈민가에서 잔인하게 7명의 소년, 소녀를 죽인 빈민가의 쓰레기! 제이돈입니다!]
“그워어어어어어!”
얼굴에 마스크를 쓴 거한이 손에 거대한 칼을 쥐고 포효를 내질렀다.
“천박하군. 살인을 저지른 쓰레기라니.”
“저런 놈에게도 살 기회를 주는 것인가?”
사람들은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흥미롭다는 듯 돈을 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배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투기장으로 향했다.
“어떻게 썰어줄까. 애송이.”
살벌한 미소를 짓는 제이돈을 보며 레오가 말했다.
“고통 없이 죽고 싶어? 고통스럽게 죽고 싶어?”
“건방진 애송이가!”
제이돈이 거대한 칼을 치켜들고 레오에게 덤벼들었다.
콱-!
거대한 칼이 레오의 목을 치려는 순간.
콰득- 콰드득!
“끄어어어어억!”
칼을 든 제이돈의 팔이 기묘한 각도로 꺾였다.
레오는 팔을 움켜쥐고 무릎 꿇은 채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제이돈의 무릎을 걷어찼다.
그러자 무릎이 꺾였다.
고통에 찬 제이돈의 비명에 레오가 말했다.
레오는 제이돈의 멱살을 잡고 쓰레기를 치우듯 한 쪽으로 집어던졌다.
퍽-!
육중한 소리와 함께 제이돈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고통에 찬 몸부림을 치며 제이돈이 서서히 죽어갔다.
그 모습을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레오의 친구들 역시 포함 되어 있었다.
‘칼을 빼면 꽤 충격이 클지도 모르겠네.’
레오는 친구들 쪽을 바라보지 않고 손가락을 풀었다.
아마 올바른 모습만 보아온 친구들에게는 지금 레오의 모습은 큰 충격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언제나 좋은 모습만은 보여줄 순 없지.’
레오는 쓰게 웃었다.
‘내 방식이 정답은 아니지만, 더러운 것을 상대하는 방법을 아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