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
“후아, 살벌하네. 검은 토끼.”
하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영상 마법을 통해 화면에 비친 모습을 보던 아르가 혀를 내둘렀다.
“검은 토끼는 루메른의 학생회장이 아니라 너 같은데?”
“누구더러 토끼래? 난 고양이야 바보 호랑이.”
아르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는 보르만을 보며 눈을 흘겼다.
아조니아 2학년 서열 5위인 호랑이 수인 보르만은 그런 아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거울 보여줄까?”
그 말에 아르가 코웃음을 쳤다.
“그나저나 놀랍군.”
“뭐가 놀라운데.”
“루메른의 학생회장이 저렇게나 터프할 줄은.”
보르만은 감탄하며 화면에 비친 레오를 손으로 가리켰다.
화면 속에서 레오는 거대한 전투 해머로 무장한 드워프 전사의 얼굴을 틀어쥐고 있었다.
단순히 힘과 기술만으로 우위를 가진 게 아니었다.
“난 그가 전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다.”
“너 바보야? 쟤 올 클래스거든? 쟤가 전사가 아니면 뭔데?”
“후후, 전사라도 다 같은 전사는 아니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아르를 보며 보르만이 손을 쥐락펴락했다.
“상대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며 비겁하게 마법과 정령에 의존하는 사나이답지 않은 전사도 많다. 레오 플로브도 그런 부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리석었어.”
“근육 바보가 뭐라는 거야. 마법이랑 정령이 왜 비겁해?”
“힘과 기술만으로 부딪치는 당당한 정면승부야말로 진정한 싸움이지!”
아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보르만은 신경 쓰지 않았다.
보르만 티서.
수인의 다섯 나라 중 하나.
철의 나라에 있는 강철의 콜로세움의 챔피언이자 수인 영웅 보테크 티서의 아들이다.
투쟁의 종족인 수인의 나라에는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각 나라에 존재하는 콜로세움의 챔피언이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린다.
물론 수인의 최강자들이 모두 콜로세움의 투사인 건 아니었다.
아르의 가문인 튠 역시 콜로세움에서 활약하는 가문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수인 명가들이 콜로세움에서 활약하는 가문이라는 건 변함 없다.
콜로세움이야말로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고 자신을 알리는 자리.
챔피언의 아들인 보르만은 어려서부터 투사로 자라왔다.
그런 만큼 투쟁심이 강한 아조니아 학생 중에서도 유독 특출난 투쟁심의 소유자였다.
새로운 강자를 보면 흥분감을 느끼는 남자였다.
보르만이 손에 힘을 주자 근육이 꿈틀거렸다.
“싸우는 모습을 보니 알겠군. 놈은 진정한 전사다. 나나 너와 같은 사나이지!”
“그래, 그래. 검은 토끼는 우리랑 같은 진정한 전사에다 사나이…….”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아르가 멈칫했다.
“내가 왜 사나이야!”
“커헉?”
그리고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보르만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던 보르만이 잠시 후 회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 플로브와 사나이다운 대결을 펼칠 기회가 오다니. 오러를 사용한 승부도 멋지지만 역시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펼치는 투쟁 역시 흥분되는 싸움이지.”
진심으로 기뻐하는 보르만이 당당하게 말했다.
“도박 빚을 지길 잘했어. 아르, 나서지 마라. 녀석과 싸우는 건 나다.”
“마음대로 하셔.”
아르가 코웃음을 쳤다.
아르도 아조니아 학생인 만큼 레오와 맞붙고 싶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참았다.
빚을 빨리 갚고 싶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레오에게 보르만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
‘……이런 머저리 같은 소리를 하는 녀석이 있다는 걸 알아야 검은 토끼가 날 바보 고양이로 안 부르지.’
***
털썩-!
레오에게 안면이 잡힌 수인 전사는 안면이 함몰된 채 무너져 내렸다.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수인 전사를 레오는 흥미 없다는 듯 옆으로 치웠다.
평소라면 환호와 탄성, 야유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할 지하 투기장은 침묵만이 감돌 뿐이었다.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건 붉은 눈을 번뜩이고 있는 레오,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레오가 상대하는 투기장의 전사들은 모두 질이 나빴다.
맨 처음 사형 선고를 받아도 이상할 것 없는 죄수를 시작으로 바깥세상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실력자까지.
명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구경거리가 되기 위한 싸움.
그 싸움에서 레오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죄수를 향한 분노라던가 단순히 쾌락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데 열광하는 자들에 대한 혐오도 비치지 않는다.
자신의 손에 쓰러진 이들에게조차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눈앞의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처럼 무미건조할 뿐.
그 모습이 이곳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레오의 모습은 심판자를 연상시키는 것만 같았다.
정의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부정하게 살아온 자들을 무감정하게 도살하는 것만 같았다.
죄악을 저지르고 사는 자들은 그런 레오의 모습에 근본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렇기에 감히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레오는 가볍게 손가락을 풀며 해설자를 바라보았다.
레오의 붉은 눈과 마주친 해설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만으로 카지노 전체를 압도한 레오를 보며 칼이 혀를 내둘렀다.
“레오 녀석, 장난이 아니네.”
학교에서 가장 절친한 칼에게도 낯선 모습이었다.
“뭔가…… 우리가 상상해왔던 레오 선배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쥬엔이 마른침을 삼켰다.
레오 플로브.
루메른 3000년 역사상 유일무이한 최연소 1학년 학생회장.
레오가 걸어온 행보는 수없이 많은 전설과 일화를 낳은 수많은 영웅들과 비교해도 찾아보기 드물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다.
당장에 수많은 1학년이 가장 선망하는 학교 선배가 다름 아닌 레오다.
실전을 치르는 레오의 모습은 상상하던 것과 달랐다.
모든 이들을 아우르고 사람들을 이끌 것 같은 정의로운 모습을 상상해왔다.
그리고 대다수 1학년이 레오처럼 되고 싶다고 상상해왔다.
만약 영웅이 된다면.
레오와 같은 위대한 위업을 1학년 때부터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쥬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죄인이라도 하더라도 무미건조하게 해치우는 모습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도…… 저래야 하는 걸까요?”
“나는 기사이니까 도련님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어.”
베티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오스틴이 어두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 심각한 분위기에 골똘히 생각했다.
‘……충격적이긴 하지만…… 저게 틀린 길은 아니야.’
영웅은 때로 비정해져야 하는 존재다.
그런 면에서 지금 레오의 모습 역시 영웅의 덕목에 가깝다.
‘하지만 뭔가 달라.’
갈등하던 쥬엔이 루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의외로 덤덤하다?”
“네?”
루크가 의아한 얼굴로 쥬엔을 바라보았다.
“너도 레오 선배를 진심으로 존경하잖아. 레오 선배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랬었죠. 하지만 레오 선배가 얼마 전에 해준 말이 있어요.”
“무슨 말?”
“레오 선배처럼 되지 말래요.”
“뭐?”
“나처럼 되지는 마.”
“네?”
훈련을 하는 와중에 느닷없이 말한 레오를 보며 루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넌 아무리 노력해도 나랑은 다른 길을 걷게 될 거야.”
레오는 피식 웃으며 루크를 바라보았다.
“넌 너무 착하거든.”
“하지만…… 레오 선배는 루메른 학생 중 가장 영웅에 가까운 사람이잖아요. 모두가 레오 선배와 같은 길을 걷고 싶어 하는걸요?”
어릴수록 가장 가깝고 강렬한 빛에 이끌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루메른 1학년들에게 있어 가장 가깝고 강렬한 빛은 다름 아닌 레오였다.
“난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고결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걸어왔고 걸어갈 길이 그다지 꿈과 낭만이 가득한…… 그런 깨끗한 길도 아니고 말이야.”
루크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너희 나이대 애들은 가장 대단해 보이는 길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답은 없어. 그냥 각자의 길이 있을 뿐이지.”
“레오 선배가 말했어요. 가고 싶은 길을 가면 된다고.”
루크의 말에 쥬엔과 베티, 오스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말을 듣고 칼이 혀를 내둘렀다.
“걘 진짜 가끔 보면 속에 인생 다산 아저씨가 들어있는 것 같다니까?”
혀를 내두르며 칼이 힐끗, 클로에와 첼시를 바라보았다.
아마 1학년보다 레오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낀 게 두 사람일 것이다.
‘나야 뭐, 뺀질이에다가 영웅 같은 건 딱히 꿈꾼 적 없지만.’
정확하게는 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루메른의 교훈이지만.
칼은 한계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학생 중 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레오를 대하는 마음이 첼시와 클로에와는 사뭇 달랐다.
칼은 누구보다도 레오의 대단함을 잘 알고 있다.
친구이지만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으며 또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할 위업을 이룰 영웅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레오의 등 뒤에서 도움이 되고 싶지만, 곁에 서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없다.
하지만 첼시와 클로에는 다르다.
처음 만난 날부터 동경의 대상으로 삼은 첼시와 길을 잃고 방황할 때 도움을 받은 클로에.
레오의 등을 쫓으며 같은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해온 두 사람으로서는 전혀 다른 레오의 모습을 본 것이다.
“반장 뭐랄까, 위험한 남자의 향기를 풀풀 풍기네. 뭔가 멋있지 않아?”
한편 일리아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넌 좋겠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뭐얏!”
일리아나가 눈을 치켜뜨고 칼을 보았다.
칼은 혀를 차며 걱정된다는 듯 첼시와 클로에를 보았다.
두 소녀는 무섭기까지 한 레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분위기를 뒤바꿀듯한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깜짝 놀라 투기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호랑이 수인이 양팔을 치켜든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
“저 녀석은…….”
2학년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탄성을 내질렀다.
“아는 사람이에요?”
베티가 묻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조니아의 2학년 서열 5위 보르만 티서야.”
클로에의 말에 1학년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느닷없이 등장한 다른 학교 거물의 등장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군! 레오 플로브!”
“아조니아의 보르만이었던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뀐 레오가 피식 웃었다.
그런 레오를 보며 보르만이 씩- 웃었다.
“내 이름을 기억해주다니! 영광이군 그래!”
콱-!
분위기가 바뀌자 카지노 손님들이 환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너의 그 거침 없는 야수성에 감동했다, 레오 플로브! 너와 같은 전사를 만난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이 상황이 진심으로 감격스럽군!”
“쟨 여전하네.”
첼시가 혀를 내둘렀다.
그에 클로에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넌 저번 스미스 전속 계약 당시에 타르캄에서 보르만과 파티를 맺었었지?”
“응.”
“어땠어?”
“돌격밖에 모르는 바보.”
“그런 무모한 사람이 아조니아 2학년 서열 5위라는 소린가요?”
첼시의 말에 베티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응. 하지만 강해. 그래서 서열 5위인 거야.”
“오러를 쓰지 못하니까 레오도 고전할지 모르겠네. 저 무지막지한 덩치를 봐.”
수인은 모든 종족 중 백병전에 가장 강한 종족이다.
그들의 야수성은 전투에서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한다.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이 수인이었다.
“안 그럴걸?”
첼시가 빙긋 웃었다.
“말했잖아? 레오 오빠는 입학시험 때 오러를 쓰지 않은 상태에서도 몬스터를 해치우고 다닌 실력자야.”
“첼시 말이 맞아. 기사학과 2학년 수업 중 가장 끔찍할 때가 언제 줄 알아?”
첼시의 말을 이어받아 일리아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름 아닌 반장과 순수하게 육체의 힘으로 대련할 때야. 반장은 괴물이라고.”
일리아나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서리쳤다.
***
사람들 속에서 델레안이 레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작의 영웅과 같은 올 클래스? 전대미문의 힘을 가진 2학년?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는 싸늘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이나 하는…… 신들에게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천박한 그림자들과 똑같지 않은가? 그 누구보다도 고결한 영웅이 필요한 시기에 저런 녀석을 학생회장으로 삼다니. 루메른도 갈 데까지 갔군.’
델레안이 코웃음을 쳤다.
‘역시 루메른은 틀렸어. 시대에 맞지 않아.’
델레안이 주먹을 쥐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새로운 영웅의 시대를 열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