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
“후우-”
담배 연기를 내뿜은 쉐도우의 마스터, 키린은 마법 영상을 통해 펼쳐지는 공방을 보며 중얼거렸다.
“흥미롭군.”
‘리이나 플릭스가 따로 훈련이라도 시킨 건가?’
리이나 플릭스.
그림자 출신으로 루메른의 교장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로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인물.
그리고 현재 그녀와 관련된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림자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그림자의 임무는 어둠 속에서 세계를 수호하는 일.
그중에는 세계를 이끌 영웅을 호위하는 자들도 있으며 배신자를 추적하여 말살하는 자들도 있다.
그림자의 일은 대부분 어둠 속에서 일어나지만, 그중에는 자신들의 행적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본보기를 위해 배신자를 추격하고 잔인하게 말살하는 그림자들.
대외적으로 사람들이 가진 그림자의 이미지는 그런 그림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이 그림자에 대한 깊은 오해와 공포를 가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그림자가 루메른의 교장을 맡았으니 외부적으로 교장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었다.
물론 리이나를 직접 교장으로 선임한 루메른의 이사장인 알테크 제르온은 그 의견을 묵살하고 있었다.
리이나가 루메른의 교장이 된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녀가 강하기 때문이다.
루메른 교장은 교장으로서 학생들을 이끌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임무는 바로 학교를 지킬 수 있는 수호자로서의 무력이다.
알테크 제르온, 그리고 현재 루메른에서 가장 오랜 시간 교직 활동을 한 할린드와 세드젠은 그림자라고는 하지만 수호자로서 리이나 보다 완벽한 이는 없다고 판단하여 그녀에게 교장 자리를 제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리이나의 전설적인 일화는 같은 그림자들이 더욱 잘 알고 있다.
그녀는 그림자들 사이에서는 전설이다.
남부의 그림자 군주인 키린 역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왔다.
‘리이나 플릭스의 성격상 따로 훈련을 시켰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키린이 레오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분위기는 하루 이틀에 걸쳐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같은 그림자인 키린은 알 수 있었다.
레오가 타고난 심판자라는 사실을.
‘과연 공주님이 푹 빠질 만하다는 건가?’
후훗- 웃음을 터트리던 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샨의 주인을 이 이상 기다리게 하는 것도 무례겠군.’
키린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하압!”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보르만의 커다란 주먹이 레오의 얼굴로 날아갔다.
마치 레오의 얼굴을 으깨기라도 할듯한 맹렬한 공격.
그에 레오가 주먹을 쥐었다.
쿠웅-!
레오의 주먹과 보르만의 주먹이 맞닿으며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근력 싸움.
누가 보더라도 체구가 작은 레오가 불리해 보였다.
하지만 레오는 주먹을 내지른 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보르만이 콧김을 뿜어냈다.
“피가 끓는군!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오는 기개! 과연 루메른 최강이라 불리는 사내답구나!”
흥분 한 보르만이 레오에게 주먹을 연타하기 시작했다.
퍼버버버버버벅-!
레오는 그런 보르만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쿵-!
“흡?!”
상상 이상의 충격에 보르만의 몸이 휘청거렸다.
화악-!
레오는 회전 하며 보르만의 관자놀이를 발뒤꿈치로 후렸다.
뻑-! 쾅-!
레오의 발차기를 얻어맞은 보르만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보르만의 육중한 몸이 쓰러지자 모든 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텁-!
“후후후.”
보르만이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대단하군……! 대단해!”
‘기절한 줄 알았는데? 엄청난 맷집이군.’
“적당히 하지? 더 했다가는 피를 볼 걸?”
“적당히?”
보르만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는 위대한 용자! 아르온과 같은 대전사! 아조니아와 같이 용맹의 길을 걷는 자!”
쾅쾅-!
자신의 가슴팍을 치며 보르만이 소리쳤다.
“아르온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상처는 곧 나를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그거 내가 한 말인데.’
레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전투 후 부상을 입고 좌절한 전사들에게 카일이 해주었던 말이다.
후대에는 그게 아르온이 한 말로 와전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너와의 싸움은 분명 나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하압!”
보르만이 레오를 향해 돌격했다.
레오가 무릎을 굽혔다.
화악-!
일순간 레오의 몸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돌격하던 보르만이 딱- 멈추었다.
탁-!
어느새 보르만의 등 뒤에 착지한 레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보르만의 등을 떠밀었다.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기절한 보르만이 쓰러졌다.
“훌륭해.”
레오가 덤덤히 말했다.
보르만은 2학년임에도 굉장한 실력자였다.
다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레오는 들것에 실려 가는 보르만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풀었다.
그리고 입구에서 팔짱을 낀 채 걸어 나오는 아르를 바라보았다.
“훗, 각오해. 검은 토끼. 이제부터 이 투기장의 챔피언인 내가 상대해줄 테니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아르가 콧김을 흥-! 내뿜었다.
‘생각해보면 검은 토끼와 육탄전으로 제대로 맞붙은 적이 없지? 재미있겠는데?’
아르 역시 아조이아 학생인 만큼 강자와의 싸움을 즐긴다.
[네! 쉐도우 투기장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챔피언이 등장했습니다!]
아르의 등장에 흥분한 해설이 소리쳤다.
레오에게 압도되었던 관중들도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래빗! 래빗! 래빗!”
특히나 남자 손님들이 열성적인 반응을 보일 때였다.
“저게 무슨 토끼야? 고양이구만.”
일리아나가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조니아 대표는 왜 여기서 저런 옷을 입고 투기장 챔피언을 하고있는 거래?”
“무슨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 이 카지노와 거래를 했다던가.”
“사연은 무슨! 저 녀석 분명 도박 빚 때문일걸?”
첼시와 클로에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칼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함께 드웨노의 세계를 공략했던 칼은 아르가 왜 저런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르가 덤벼들 자세를 취할 때였다.
[긴급 공지 사항이 있겠습니다.]
해설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의 지시로 투기장 이벤트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손님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러운 투기장 중단 선언에 여기저기서 짜증 섞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뭐야?”
“갑자기?”
일행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였다.
“루메른의 학생 여러분.”
수인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를 보며 일행 모두가 움찔 떨었다.
수인 남성은 그런 일행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여러분을 모시라는 마스터의 명령이십니다.”
***
방 안에서 아르는 살짝 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조니아 교복으로 갈아입은 아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레오를 힐끗 바라보더니 말했다.
“검은 토끼.”
“왜.”
“나가면 나랑 붙어.”
“결과가 뻔한 싸움을 왜 해?”
아르가 주먹을 꼭 쥐었다.
“녀석만 재미 보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불만이면 놀아줄게.”
“놀아? 어떻게?”
레오는 테이블 위에 있는 티슈에 손을 뻗어 둘둘 말아 깃털처럼 만들었다.
그걸 본 아르의 귀가 순간 쫑긋거렸다.
팍-!
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티슈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얄밉게 아르의 손을 피한 티슈를 레오가 들어 올리자 아르는 박수치 듯 양손으로 붙잡았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아르가 핫-!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사냥 놀이를 한 아르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고양이 취급 하지 마!”
“고양이가 아니면 뭔데.”
“난 수인이라고! 고양이 수인! 네 애완 고양이가 아니라!”
“그럼 이런 거에 안 낚이면 되잖아.”
“본능이야! 계속 놀리면 확 깨물어 버린다!”
털을 곤두세우고 하악질 하듯 소리치는 아르를 보며 레오가 피식 웃을 때였다.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방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상대를 확인한 아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메른 기사 학과의 첸 시아?”
“만나서 반가워요, 아르 튠.”
첸 시아는 빙긋 웃으며 오른손 손바닥에 왼손 주먹을 대는 동부식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가워.”
아르도 방긋 웃었다.
그러다가 이내 첸 시아의 뒤를 이어 나타난 키린을 보며 털을 곤두세웠다.
딱히 아르가 키린을 경계하거나 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몸에 진하게 베인 피냄새에 수인의 본능이 반응한 것 뿐이다.
“아르 튠. 너와 아조니아 학생들의 빚은 오늘부로 사라졌다.”
“어째서요?”
“여기 계신 마음씨 고운 아가씨께서 모두 탕감해주셨거든.”
키린은 첸 시아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빙긋 웃었다.
“오오! 고마워!”
아르는 환하게 웃더니 첸 시아 앞으로 다가가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나중에 이 빚은 꼭 갚을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한 첸 시아.
“빚이 탕감됐다는 사실을 다른 학생들에게도 알려 줘.”
“검은 토끼는요?”
“루메른의 학생회장님과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 말에 아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세 사람만 남게 되자 첸 시아가 말했다.
“아조니아의 대표와 참 친하시네요.”
“친하니까.”
“흐응.”
첸 시아가 살짝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꽤 귀여워해주시던 걸요?”
“실제로 귀엽잖아. 너처럼.”
“네?”
느닷없는 말에 첸 시아가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얼굴을 붉히던 첸 시아가 이내 발끈하며 대답했다.
“레오 도령. 계속 저를 놀리는데 누누이 말하지만 제가 연상이에요.”
“그래, 그래.”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레오를 보며 첸 시아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하지만 이내 작게 한숨을 쉬고 레오 뒤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키린 네일라.”
“네, 공주님.”
첸 시아의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무미건조한 무표정.
그림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낸 첸 시아가 말했다.
“레오 도령에게 무례를 범한 이유가 뭐죠?”
키린이 첸 시아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그림자 군주.
엘프와 수인, 드워프 각각의 그림자들을 이끄는 그들은 분명 그림자의 나라인 샨과 분리된 독자적인 세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최초의 그림자 카일.
그 카일의 유지를 이은 비하르를 선조로 둔 것이 샨이다.
모든 그림자는 샨에서 파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는 샨 제국과 분리된 건 맞지만 완전히 독립된 세력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림자 군주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 역시 샨의 황제다.
그렇기에 그림자 군주들은 샨의 주인을 존중했다.
만약 첸 시아였다면 쉐도우에 도착하자마자 키린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첸 시아는 차기 샨의 황제니까.
하지만 레오는 그러지 못했다.
키린은 레오를 가늠했고 첸 시아는 그 사실에 화가 났다.
그림자들은 레오에게 구원받았다.
레오로 인해 그림자의 서가 탄생했고 비로소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런 레오를 감히 시험해 봤다는 것이 첸 시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분노를 드러내는 첸 시아를 보며 키린이 말했다.
“부디 분노를 풀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공주님, 저는 그림자 군주입니다.”
키린은 레오를 바라보았다.
“제 결정에 수천의 그림자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가늠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레오님께서 그림자를 품을 수 있는 그릇인지 아닌지.”
“그래서.”
레오가 턱을 괴었다.
“만족스럽나?”
“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키린이 웃었다.
“당신께서 보여주신 심판자로서의 모습이 그 누구보다 그림자의 신에 어울린다는 사실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