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
“위대한 그림자의 신이시여, 저를 찾은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더 이상 레오를 가늠하는 듯한 모습은 없었다.
레오를 직접 만난 순간부터 키린의 태도는 돌변해 있었다.
무릎을 꿇은 키린은 양손을 맞부딪힌 자세로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신에게 기도라도 올리는 듯한 경건한 태도.
그에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턱을 괸 레오가 혀를 찼다.
“난 신 같은 게 아닌데?”
“아뇨, 당신은 저희에게 신과도 같습니다. 모든 그림자를 구원한 당신은 절대적인 빛이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본다면 레오는 아직 열여섯 살의 소년에 불과하다.
물론 행적을 본다면 놀랍다.
고작 1학년에 루메른의 학생회장이 된 것도 모자라 2학년에 학생회장에 걸맞은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공략해 온 히어로 레코드 역시 심상치 않다.
레오는 공식적으로 루나와 드웨노의 세계를 공략했다.
비공식적으로는 지난 1학년 여름 방학 당시 아조니아의 입학시험에 참석하여 아르온의 세계까지 공략해냈다.
신들에게 인정받는 위업을 이루어 영웅이 된 자들조차 일평생 찾아 헤매도 대영웅의 세계를 공략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데 레오는 벌써 세 명이나 되는 대영웅의 세계를 공략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개벽의 영웅 중 한 사람인 혜성의 마법사 세이룬에게 인정받기까지 했다.
세간의 사람들은 이미 레오를 단순한 영웅 후보생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머지않아 레오가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려 영웅이 될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내면을 들여본다면 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히어로 레코드.
그림자 서의 주인이자 샨 제국의 주인.
‘그것만 해도 대단하지만…….’
키린은 웃으면서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그림자 군주로서 오랜 시간 어둠 속에서 배신자들과 마족들을 참살해 왔다.
그림자의 특성으로 그녀의 존재는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키린은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린 영웅들조차 압도할 정도의 경험과 힘을 지닌 자다.
영상으로 봤던 투기장에서의 레오의 실력만으로도 샨의 주인이 될만하다고 감탄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영상만으로는 알 수 없던 레오의 진면목이 느껴졌다.
가장 확연하게 느껴지는 건 레오의 붉은 눈동자 속 너머에 똬리를 튼 어둠이다.
그림자 군주인 자신조차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그걸 고작 열여섯 살의 소년이 품고 있는 것이다.
영웅으로서 찬란한 빛과 그림자로서 수렁을 알 수 없는 어둠을 함께 지닌 이해 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
‘이런 분을 신이 아니라면 무어라 불러야 하지?’
레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키린의 눈에 깃든 무언가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냐스와는 다른 의미로 맛탱이가 가 있군.’
북부 그림자 군주의 딸, 아냐스 역시 처음 본 순간부터 레오를 따랐다.
그건 아냐스의 신념에 따른 결과였다.
세계를 위해 더러운 것에도 서슴없이 발을 담그는 고결한 영웅을 섬기는 종이 된다.
그것은 아냐스가 오래전부터 그림자로서 품어온 이상과 신념이었고 그에 부합하는 자가 레오였기에 레오를 따르기로 마음먹은 것이리라.
아냐스는 레오야말로 세상에 악을 몰아낼 위대한 영웅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키린은 레오를 오롯이 그림자로서 바라보고 있다.
레오는 그녀가 그림자로서 어떤 신념을 지녔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세계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어둠 속에서 철저하게 섬멸시킨다.’
그녀는 다른 그림자처럼 영웅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에 의해 살아가는 자.
그리고 그림자의 서가 생기면서 그런 신념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림자가 영웅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함과 동시에 궁극적인 그림자인 레오를 키린은 신이라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레오는 그런 눈을 가진 존재들을 알고 있다.
요즘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
머나먼 과거.
재앙의 시대 이전과 신의 시대에나 볼 수 있었던 감정.
‘엘프 순혈회들이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지.’
키린의 눈에 깃든 건 신앙을 넘어선 광기에 가까운 광신.
‘대화가 통할 것 같지는 않아. 뭐, 그렇지만 나에게 딱히 해가 될 것 같지는 않군.’
이런 부류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레오는 내버려 두기로 했다.
“우리는 지하 미궁을 탐색하기 위해 왔어.”
“출입 허가를 드리는 건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당신께서 찾으시는 건 아마 없을 겁니다. 이곳에 영웅 던전은 없습니다.”
“알아. 내가 얻으려는 건 개벽의 용, 로디아가 남긴 보물이야.”
“개벽의 용이요?”
레오의 곁에서 대화를 주시하던 첸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개벽의 용. 로디아님의 보물이라니……. 이 미궁의 끝에 있는 봉인의 너머에서 강력한 어둠의 힘이 느껴지기에 위험한 것이라 생각되어 특별히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 봉인이 개벽의 용 로디아님이 남긴 보물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둠의 힘이 느껴진다고?”
“예.”
키린의 대답에 레오는 생각에 잠겼다.
‘라르엘은 로디아가 리시나스와 연관된 물건을 이 보물고에 남겼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 곳에서 어둠의 힘이 느껴진다고?’
지혜의 용 리시나스.
대영웅들의 리더이자 세계를 구원으로 인도한 위대한 드래곤.
모든 대영웅은 특별하지만 리시나스는 더욱 특별하다.
레오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리시나스를 선택할 것이다.
그건 그녀가 세계를 구원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다.
‘재앙의 시대는 모든 것이 추락하는 시대였으니까.’
모두가 끝도 없이 타락해가던 시대다.
고결함을 잃고 끝없이 추악해지던 시대.
양심과 인간성은 비웃음의 대상이다.
그런 시대에도 빛나는 이들은 있었다.
루나와 아르온, 드웨노가 그러했다.
빛을 잃지 않았기에 아무 망설임 없이 토벌대에 합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차마 세계를 구원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 그들조차도 당시의 세계를 외면할 정도로 그때의 세계는 더러웠다.
리시나스는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세계를 구원하려 했다.
이미 더럽혀지고 타락한 자들조차도 구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빛과 희망을 본다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며 웃으며 말했다.
카일이 재앙의 시대를 종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시작의 영웅이라면.
리시나스는 세계를 빛으로 인도한 구원의 시작이다.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고결하며.
끝까지 자애로웠던 리시나스이지만.
그녀에게도 스스로 싫어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오직 레오만이 알고 있는 리시나스의 콤플렉스.
‘어둠.’
리시나스는 흑룡이다.
그리고 흑룡은 어둠을 먹고 사는 용족이다.
재앙의 시대 당시 가장 먼저 타락했던 용족들이 바로 드래곤이다.
끝없이 타락한 끝에 세계를 등진 용들도 많았다.
그들을 탓할 순 없다.
신의 시대 당시 그들이 했던 일이 바로 카일이 했던 일이며 지금에 와서는 그림자들이 하는 일이니까.
마족을 제외하고는 가장 어둠과 친숙했던 종족.
타르타로스의 마족과 변절자들을 집어삼키고 힘을 키웠던 흑룡이다.
그렇기에 리시나스는 자신이 품고 있던 어둠을 정말로 싫어했다.
타르타로스를 물리치고 에레보스를 토벌하는 기나긴 여정.
그 속에서 리시나스는 마법사로서 또 소환사로서 굉장한 위업을 남겼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리시나스를 역사상 최강의 소환사로 기억하고 있다.
확실히 현재 시대에 사용되는 강령술과 환수소환, 정령술의 기본 개념은 모두 리시나스가 만든 것이다.
리시나스는 마법과 관련된 업적에서는 과소평가되는 면이 있었다.
아마 루나가 없었다면 마법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라고 추앙받는 건 다름 아닌 리시나스였을 것이다.
타르타로스 마족들의 저주를 재해석하여 용언 마법을 개발했다.
그와 동시에 기존에 존재하는 용언 마법의 틀 역시 만들었다.
‘리시나스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한다면 각 용족들의 고유 마법을 모든 드래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거지.’
본디 화룡의 고유 마법은 화룡만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 시대에는 화룡이 수룡의 고유 마법을 사용한다.
‘용족이 최강의 종족이라 불리는 건 그 영향이 크지.’
원래도 강력한 종족이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용족의 위상은 신의 시대 당시의 위상보다 더욱 크다.
하지만 리시나스가 유일하게 남기지 않은 마법이 ‘흑룡’ 의 고유 마법이다.
그건 동료였던 레오조차 알지 못하는 마법이다.
리시나스는 자신이 흑룡으로서 정체성을 가졌다면 이 세계를 구원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사실이기도 했어.’
만약 리시나스가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자들을 망설임 없이 끊어냈다면 이 세계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의 추악한 면을 품을 수 있었기에 세계를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리시나스의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 바로 카일이다.
‘내가 가장 적임자였으니까.’
추악하게 물들었다고 해도 선을 넘는 자들을 안고 갈 수는 없다.
그들을 처단하는 건 카일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곤 했지.’
레오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리시나스와 관련된 어둠의 힘이라면……. 녀석이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흑룡의 고유 마법일지도 모르겠군.’
자신에게조차 알려주지 않은 마법.
하지만 그 고유 마법이 리시나스의 세계를 공략한 로디아에게 전해졌을 수도 있다.
히어로 레코드의 특성상 레오가 몰랐던 리시나스의 힘도 얼마든지 계승할 수 있을 테니까.
레오가 그런 결론에 도달할 때였다.
스륵-
어둠 속에서 수인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존재를 느끼고 있던 레오와 첸 시아, 키린의 덤덤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스터.”
“왜?”
“마물의 숲에서 영웅 던전의 폭주 징조가 포작 되었다는 보고가 왔습니다.”
그 말에 레오의 눈이 꿈틀거렸다.
***
저벅- 저벅-
가드스론의 어두운 밤.
온몸을 피로 물들인 채 집 앞으로 온 카일은 삭막한 정원의 의자에 앉아 있는 리시나스를 발견했다.
리시나스는 카일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서 와, 카일.”
“이런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밤이 늦었어.”
“드웨노에게 들었어. 네가…….”
리시나스가 이를 악물었다.
“변절자들을 처단하러 갔다는걸. 걱정 돼서 기다리고 있었어.”
“걱정도 많군. 타르타로스의 괴물들과 비교한다면 그따위 배신자들을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야.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리시나스가 자신을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려는 카일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카일은 그런 리시나스의 손길을 피했다.
리시나스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당황하는 리시나스를 보며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네 손이 닿기에는 너무 더러워.”
리시나스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것이 싫었다.
정확하게는 배신자들의 피가 리시나스에게 묻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는 어리석은 자에게.
연민조차 아까운 쓰레기들의 피가 묻는 걸 카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말에 리시나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고 억지로 카일의 손을 잡았다.
“절대 더럽지 않아. 너인걸?”
흉터 투성이와 피투성이의 손을 잡고 리시나스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나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세계를 위해. 어둠에 발을 담그는 네 손이야. 절대 더럽지 않아.”
부드럽지만 단오한 목소리에 카일이 쓰게 웃었다.
“오히려 걱정 돼. 네가 계속 이런 일을 하면……. 네 순수의 힘이 더럽혀질 까봐.”
“이 정도로 더러워질 거면 진작에 더러워졌겠지.”
카일이 피식 웃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동료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에 리시나스가 움찔했다.
“아, 머리는 안 되나?”
“아니야! 괜찮아.”
“전에 피 묻은 손으로 루나 녀석 머리 쓰다듬었다가 난리 치더라고.”
“그건 걔가 까탈스러운 거고!”
“아니야, 너도 기분 나쁠 거 아니야.”
카일은 문을 열었다.
“그럼 기다릴게. 씻고…….”
“너무 늦었어. 씻고 뭘 기다린다는 거야?”
“그러니까. 딱히 뭘 기다린다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너무 늦었으니까 너희 집에서 신세 좀 질게. 그 이야기였어.”
“나랑 있으면 괜히 불편할 걸? 어차피 공간이동 마법이면 바로 너희 집에 도착할 텐데 뭐. 내 걱정은 너무 안 해도 돼. 그러니 오늘은 그만 푹 쉬어. 피곤할 거 아니야?”
오늘 낮, 리시나스는 가드스론을 침공한 마족들을 토벌했다.
카일은 친구를 배려해주며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야속하게 닫힌 문을 보며 리시나스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바보! 왜 괜히 긴장해서 움찔한 거야……!”
루나의 머리는 자주 쓰다듬어주는 카일이었지만 리시나스의 머리를 한 번도 쓰다듬어 준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리시나스는 카일의 친구이자 동료이기 이전에 리더다.
고지식한 카일은 투닥거릴 때마다 도마뱀이니 뭐니 무례한 소리를 해대도 행동으로는 리시나스를 확실하게 리더로서 존중한다.
리시나스 입장에서 전혀 쓸데없고 짜증 나는 존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오누이처럼 친해 보이는 카일과 루나가 부러울 때가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했는데 괜히 긴장해서 그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다.
스스로를 자책하던 리시나스가 문을 열어보며 이를 갈았다.
고결한 드래곤인 그녀는 상스러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럴 때면 자신도 모르게 절로 입밖으로 나오는 말이 하나 있었다.
“진짜 병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