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
가드스론.
인류 최후의 요새이자 희망의 불꽃이 시작되었던.
말 그대로 희망의 땅이라 불리던 난공불락의 위대한 요새.
하지만 그 가드스론 역시 처음부터 위대한 곳은 아니었다.
‘아니, 처음에는 엉망이었어.’
가드스론의 주점에 자리를 잡은 레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가드스론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멸망의 직전까지 이르렀음에도 이곳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건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지.’
타르타로스의 발길이 최후까지 닿지 않았던 건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광스러운 칭호로 불리는 땅이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최후의 도시들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치안은 최악이었으며 수많은 난민이 들이닥쳐 있었다.
자원은 한정적이었다.
결정적으로 언제 멸망으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이 사는 곳.
전장에서 싸운 자들이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울 주점은 있었다.
언제 요새가 무너지고 모두가 멸망할지 모르는 시대.
술을 마시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술이라도 진탕 먹어 취하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힘들었던 시대이기도 해.’
그만큼 이 세계에는 조금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벼랑 끝.
지금 레오가 들어온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타르타로스의 대공습이 끝났다.
이후에는 어떤 주점이라도 사람들이 붐빌 시간대.
하지만 지금 레오가 있는 주점 겸 여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에는 고작해야 레오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주점을 운영하는 엘프는 테이블에 커다랗고 투박한 술잔 두 개를 내려놓고 카운터에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곳은 살아남는 영웅, 카일의 단골 주점이기도 했다.
‘마지막 여정 직전에도 신세를 졌었지.’
기억 저편의 지인을 보며 레오가 쓴 미소를 지었다.
“미안, 미안.”
그때 2층에서 리시나스가 내려왔다.
“잠시 뭘 좀 하느라고.”
어딘지 모르게 후련한 미소를 리시나스가 레오 앞에 앉았다.
‘수기를 쓰고 온 건가?’
리시나스는 재앙의 시대에 관한 걸 모두 수기로 남겼다.
그리고 오늘은 자신이 파티에 들어 온 날.
그날의 수기를 떠올리며 레오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우리가 토벌대 파티를 창설한 역사적인 날이니까 마음껏 마셔. 마음 같아서는 모든 손님을 사주고 싶지만.”
리시나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와 네가 같이 있다 보니 이 주점에는 손님이 얼씬도 하지 않네.”
“살아남는 영웅은 불행의 상징이고 어리석은 자는 쓸데없는 희망이나 전하고 다닌다며 기피의 대상이니까.”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곧 우리를 보는 시선이 달라질 거야. 이 도시도 변할 거고.”
강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말을 하는 리시나스가 술잔을 들었다.
“자, 그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이제 시작이야.”
리시나스가 빙긋 웃었다.
‘이제 마지막이야.’
“우리의 앞날과 세계의 희망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건배.”
‘우리의 앞날과 세계의 희망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건배.’
5000년 전.
친구들과 마지막 술잔을 나눴을 때.
그때와 똑같은 축사를 전하는 리시나스를 레오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카일?”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레오를 보며 리시나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건배.”
툭-!
나무로 된 술잔이 투박한 소리를 냈다.
‘모두가 죽고 난 후, 수 천 년이 지나 다시 처음 술잔을 나눴을 때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카일?”
술을 홀짝이던 리시나스는 조금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왜 그렇게 웃는 거야?”
그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뜬 레오가 이내 턱을 괴고 웃었다.
“그냥, 좋아서.”
리시나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카일의 성격이라면 리시나스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카일을 파티에 끌어들이기 위해 쫓아다녔으니 그 꼬일 대로 꼬인 성격은 질릴 만큼 경험했다.
‘지금까지 나에게 어리석다느니, 도마뱀이라느니. 온갖 무례한 말을 다 했잖아.’
마음 같아서는 면상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꾹꾹 참아 왔다.
그런데 조금 전.
가드스론의 공방을 막아내고 파티에 합류한 이후로는 낯설게 느껴졌다.
‘뭐 어때. 뭐가 됐든 이 녀석이 내가 구성한 토벌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어.’
살아남는 영웅 카일.
그의 강함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준이다.
마족들은 그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수많은 전장을 뚫고 살아남은 진정한 실력자.’
리시나스는 그런 동료들을 원했다.
직접 카일을 본 이후에는 토벌대에 합류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전대미문의 올 클래스. 그는 분명 에레보스와의 전투에서 큰 힘이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리시나스가 “크흠!” 헛기침했다.
“좋아, 카일. 그럼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해. 앞으로의 일에 관해서지.”
술잔을 내려놓은 리시나스가 팔짱을 꼈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리시나스가 말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내 목표는 에레보스를 토벌하고 이 세계를 구하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꼭 필요해. 그래서 파티에 영입한 거야.”
“그래.”
“하지만. 너와 나만으로는 세계를 구하기에 부족해.”
리시나스가 심호흡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와 여정을 함께할 강한 동료들이 필요해.”
“생각 해둔 후보들은 있어?”
“물론, 우선 마법사가 필요해.”
리시나스는 아공간을 열어 지도를 펼쳤다.
5000년 전의 세계 지도.
땅 대부분이 시커멓게 칠해져 있었다.
에레보스에 의해 불타 사라진 영역이다.
그 중 리시나스는 아직 불타지 않은 영역 한 곳을 가리켰다.
“이곳이야. 남부 엘프들의 고향 숲. 마물 여왕에 의해 저주받은 땅. 이곳에는 엘프의 천재 마도사로 ‘루나 루비넌스’ 가 있어. 당신도 이름 정도는 들어 봤지?”
“응.”
“그녀는 그 누구보다 고결한 엘프라고 들었어.”
‘……그러고 보니 당시에도 그런 헛소문이 퍼져 있긴 했었지.’
“우리 뜻을 전한다면 고결한 그녀는 분명 우리와 함께 여정에 따라와 줄 거야.”
‘루나랑 처음 만났을 때 그 녀석이 나보고 뭐라고 했더라.’
‘너 혹시 또라이니? 뭘 잘못 먹었길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레오는 그저 리시나스의 뜻을 루나에게 고스란히 전했을 뿐이다.
하지만 또라이 소리 들은 건 리시나스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새삼 억울해졌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지금은 마물의 숲이라고 불리는 지형을 바라보고 있는 리시나스를 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니, 루나를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리시나스는 루나에게 굉장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리시나스가 처음으로 파티에 합류시킨 맴버가 꼬일 대로 꼬인 자신이었으니까.
‘이땐 몰랐겠지. 루나가 우리 파티에서 가장 지지리도 말을 안 들어 먹는 녀석이었다는 걸.’
“너 눈빛이 이상한데?”
“내 눈빛이 어때서?”
리시나스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다음으로 파티에 합류시켜야 할 멤버는 레이사르에 있는 ‘창천의 수호자’ 아곤이야.”
창천의 수호자 아곤.
아르온의 스승인 그는 재앙의 시대 이전부터 이미 막강한 영웅으로 명성이 높았다.
푸른 하늘을 오랫동안 지켜냈기에 얻은 이름이 바로 ‘창천의 수호자’ 였다.
하지만 리시나스와 카일, 루나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의지가 꺾여 있었다.
그런 아곤을 대신해 아르온이 파티에 합류했다.
“창천의 수호자는 수많은 마족을 저지해온 대단한 영웅이야. 언제나 당당하고 용맹하지. 든든한 전위가 되어 줄 거야.”
‘대신 아르온이 들어왔지. 큰 전투에서는 리시나스의 희망대로 든든한 전위의 역할을 해냈으나. 작은 전투에서는 그 누구보다 못 믿을 놈이지만.’
압도적인 실력과 위기 상황에서 보여줬던 용기는 분명 토벌대의 전위로 더할 나위 없었다.
‘첫 전투 때 리시나스의 얼굴이 볼만했지.’
아르온은 겁에 질려 리시나스의 뒤에 숨어 버렸다.
그때까지만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직은 미숙했던 소년이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왈가닥인 루나를 본 이후라 다음 파티원에 대한 기대가 더더욱 절실해져 있던 리시나스였기에 겁에 질린 아르온을 봤을 때는 처음으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루나 녀석이 그걸 보고 어찌나 웃었던지.’
“왜 자꾸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뭐가?”
“불쌍하다는 눈으로 날 보지 마.”
“그렇게 본 적 없어.”
레오의 말에 리시나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건 강력한 무구를 만들어 줄 대장장이야. 물론 우리가 수적으로 열세인 만큼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전사이기도 해야 하지. 그에 걸맞은 남자가 딱 한 사람 있어. 조금 별종이라는 소문이 있긴 한데.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
‘조금 별종 정도가 아니었지.’
‘드웨노,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여정에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첫 만남에서 드래곤의 예를 올리며 부탁하는 리시나스를 빤히 바라보던 드웨노는 함께 찾아온 레오를 보며 말했다.
‘자네.’
‘왜?’
‘이 용족의 처자와 연인 사이인가?’
‘저랑 이 인간은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정말인가?’
‘절대로요.’
‘흐음.’
의심스럽다는 듯 리시나스를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던 드웨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대신 조건이 있네, 흑룡이여.’
‘말하시죠, 대장장이 드웨노.’
드웨노는 숭고하기까지 한 얼굴로 말했다.
‘누드모델이 되어 주게.’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제대로 들었네. 자네의 아름다움은 후대에 길이길이 알릴 필요가 있어.’
그때 리시나스는 분명 세상을 다산 표정을 지었다.
‘가자, 카일. 이 작자는 아닌 것 같아.’
카일은 드웨노의 공방에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검을 주우며 말했다.
‘굉장한 검인데 왜 이렇게 처박아둔 거야?’
‘그건 실패작이네. 아름답지가 않아.’
‘실패작이 이 정도면 큰 힘이 될 것 같은데?’
‘가자! 성격 꼬인 녀석에! 왈가닥에! 겁쟁이면 충분해! 이런 변태까지 합류하는 건 절대 안 돼!’
리시나스는 필사적으로 레오를 뜯어말렸다.
‘어이, 드워프 영감. 우리 파티에 이 녀석만큼 아름다운 엘프가 있는데 들어 올래?’
‘호오? 그 정도라면 따라나설 가치가 있겠군!’
‘카일!’
비명을 내지르듯 절규하는 리시나스를 뒤로하고 드웨노가 파티에 합류했다.
레오는 측은한 눈으로 리시나스를 보았다.
“그러니까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세상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겠다 싶어서.”
“당연하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앞으로 함께할 동료 후보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굉장한 녀석들일 것 같아.”
“그렇지? 너처럼 성격이 지저분한 녀석과는 다를 거야.”
레오에게 당한 게 있는 리시나스가 살짝 감정을 담아 말했다.
“……그래. 분명 나 같이 성격 지저분한 녀석이랑은 다를 거야.”
훗날 리시나스는 술을 먹으며 고백했다.
첫인상이 가장 최악이라고 확신했던 녀석의 첫인상이 제일 멀쩡한 편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