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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급 영웅은 아카데미 우등생-387화 (387/483)

387.

고오오오오오-!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주변을 휘감은 꺼지지 않는 검은 불꽃.

손에 닿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재앙의 불바다.

그 사이를 걷고 있음에도 회색머리카락의 사내와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의 눈에서는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멀리 불타오르고 있는 검은 탑을 보며 카일이 중얼거렸다.

마치 하늘이라도 꿰뚫을 것 같은 끝없는 높이의 거대한 탑.

태초의 악, 에레보스의 거처인 재앙의 탑이었다.

재앙의 불꽃이 가장 처음 불타오른 곳.

토벌대의 마지막 종착점.

카일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움켜쥔 손에서는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갔다.

뚝- 뚝-

카일에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리시나스가 말했다.

“카일, 진정해.”

“걱정하지 마.”

카일이 손을 펼쳤다.

오랫동안 계속된 처절한 사투의 흔적이 손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그 상처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향해 계속해서 손을 뻗었다는 증거.

손이 남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참혹한 상처를 몇 번이고 입었다.

그때마다 가까스로 회복하고 무기를 쥐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보기 싫은 흉터투성이 손.

하지만 대영웅들에게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의미 있는 손이었다.

***

“새삼 느끼는 거지만. 카일, 자네의 손은 참 아름답군.”

여정을 떠나기 전.

술잔을 쥔 카일의 손을 보며 드웨노가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런 손, 당신의 취향이 아니지 않아?”

“확실히 내 취향의 손은 아니지.”

드웨노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카일 못지않게 상처투성이였으며 그건 아르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서 후방에 있는 리시나스도 세 사람 만큼은 아니지만, 손에 상처가 많았다.

루나도 상처가 많았지만 장갑을 끼거나 마법으로 상처를 가리고 있어 티가 나지 않았다.

드웨노는 술을 홀짝였다.

“하지만 그 손은 이 세계에 희망을 일구어낸 손이 아닌가? 비록 겉보기에 내 취향은 아닐지라도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네.”

“꿀꺽- 꿀꺽- 푸하! 드웨노가 카일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한 건 처음 같은데.”

커다란 맥주잔에 담긴 황금색 액체를 한 번에 목구멍에 털어 넘기며 입을 쓱 닦은 루나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이 녀석에게서 아름다운 점이라고는 손밖에 없지. 그리고 우리 모두 같은 손을 가지고 있어.”

“……그러면 결국 드웨노. 네가 보기에 카일만의 아름다움은 없다는 소리야?”

아르온이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이지.”

“어쩌니? 자칭 미학자가 넌 아름답지 못하대.”

“음…… 카일도 분명 아름다운 점이 있을 거야. 포기하지 마.”

“이것들이 진짜. 니들 잣대로 날 계속 평가할래!”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드워프와 깔깔거리며 웃는 루나.

진심으로 걱정하는 아르온을 보며 격노한 카일이 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뒤 자리로 돌아온 카일이 턱을 괴었다.

“다들 마지막 여정을 앞두고 있는것 같지 않게 천하태평들이군.”

카일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누가 뭐래도 최악의 사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절대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최후의 여정.

그런 거대한 시련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친구들에게서는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카일은 드웨노를 이기겠다며 무리하게 대작하는 루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술을 권유받아 당황하며 거절하는 아르온의 모습도 보였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네.”

카일 앞에 맥주잔을 가져와 앉은 리시나스가 빙긋 웃었다.

“나쁜 모습은 아니야. 오히려 다들 희망찬 게 보기 좋네.”

파티가 벌어진 주점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입에 한 모금 머금은 리시나스는 피로가 풀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레 겁먹고 있는 것보다는 저게 훨씬 낫지.”

“뭐 하다 늦었냐?”

“수기를 쓰고 왔어.”

리시나스가 카일처럼 턱을 괴었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여기서 너랑 나, 둘이서 회의했었지.”

“그랬던가?”

카일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리시나스와 술잔을 부딪쳤다.

꿀꺽- 꿀꺽- 술을 들이켠 리시나스가 입을 닦은 후 말했다.

“내가 말했지, 카일.”

“뭐가?”

“우리는 세상을 구할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웃는 친구를 보며 카일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그래. 대단하네.”

“초창기에 계속 삐딱하게 굴었던 거. 당장 사과해.”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사과한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코웃음을 치는 리시나스가 취기가 올라 온 얼굴로 카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네 말이 맞았어.”

귀찮다는 듯 말을 하는 카일을 보며 리시나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너랑 한 약속도 지킬 거야.”

“……?”

“약속했지?”

팔짱을 낀 리시나스가 웃었다.

“혼자 남겨두지 않겠다고.”

“……그래.”

카일이 웃었다.

“카일, 넌 더 이상 살아남는 영웅이 아니야. 넌.”

리시나스가 씩-

웃었다.

“새로운 시작이야.”

***

“난 누구보다 냉정해.”

카일이 덤덤히 말했다.

“잃은 게 너무나도 많아.”

가라앉은 눈으로 카일이 리시나스를 바라보았다.

“짊어진 것도 많고. 그러니 해내야 해.”

“…….”

“실패는 용납할 수 없어.”

그 말에 리시나스가 주먹을 쥐었다.

“그래.”

리시나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걱정 마, 카일. 혼자만 떠안게 하진 않을 테니까.”

리시나스가 말했다.

“처음 했던 약속, 꼭…… 지킬 테니까.”

***

똑똑똑-

확-!

들려온 노크 소리에 레오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레오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일어나, 카일. 아침이야.”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별일이군. 그때 일을 꿈으로 꾸다니.’

어젯밤 이야기를 나눈 후 로디아는 여관 방을 떠났다.

에레보스 토벌대는 어제 시작되었다.

아직 레오와 리시나스.

두 사람뿐인 파티.

그런 곳에서 예정에 없던 로디아를 갑작스럽게 합류시킬 수 없었다.

‘원래 사건에 다른 변수가 생기면 영웅의 세계가 어떻게 꼬일지도 알 수 없어.’

누가 뭐라 했든 레오는 이 시련을 한 번 이겨냈다.

레오 입장에서는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최대한 변수를 배제해 가며 영웅의 세계를 클리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고 로디아 역시 이 의견에 동감했다.

그렇기에 로디아는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다.

레오가 문을 열었다.

리시나스는 팔짱을 끼고 레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카일.”

팔짱을 끼며 어딘지 모르게 깐깐한 얼굴로 인사하는 리시나스를 보며 레오가 인사했다.

“그래, 좋은 아침.”

레오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그런 레오를 보며 리시나스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어제부터 당신의 태도에 적응이 안 돼서.”

“적응이 안 돼?”

“지난 몇 주간 대단히 까칠하고 꼬였던 당신이 하루 아침 만에 유한 성격이 되었잖아.”

당혹감을 내비치는 리시나스가 말을 이었다.

“혹시나 당신과 파티를 맺는 일이 생겨도 꽤 많이 다툴 거라고 생각했거든. 오늘만 해도 그래.”

리시나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어제 큰 전투가 있었잖아.”

“…….”

레오는 지난 과거를 떠올렸다.

레오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과거.

하지만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고작 하루 전의 일이다.

목숨을 오가는 전투를 한 번 거치고 난 후에 카일은 언제나 술을 잔뜩 퍼먹었다.

어떻게든 전장에서의 기억을 강제로라도 털어내기 위해.

하지만 지금의 레오는 아니다.

그런 자신은 이미 머나먼 과거에 사라졌다.

지금 리시나스의 눈앞에 있는 건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잿더미 같은 공허한 눈으로 살아가던 남자가 아닌 동료들에게 건네받은 꿈을 짊어지고 태초의 재앙에 맞서 세계를 구원했던 남자였다.

같은 사람이라도 낯선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누가 가르쳐줬거든.”

“뭐?”

레오가 빙긋 웃었다.

레오가 영웅 후보생들에게 곧잘 지워주던 미소였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면, 희망을 쥘 수 있게 된다는 걸.”

레오의 말에 리시나스가 눈을 깜빡였다.

“아침을 먹으러 가자.”

레오는 방을 나가 1층으로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리시나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화르륵-

-그 얼빠진 표정은 뭐니?

백색의 화염이 리시나스의 머리에 일렁이더니 손바닥 크기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시나스의 머리 위에 한 손에 머리를 바친 채 옆으로 누운 카타리우가 손으로 리시나스의 검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조금 색다른 모습이군요.

작은 빛무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광휘의 정령, 루미너스가 나긋한 동작으로 리시나스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뭐가?”

피닉스 킹과 빛의 대정령.

두 맹약자의 물음에 리시나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 물음에 카타리우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울 좀 볼래?

“거울은 왜?”

-첫눈에 반한 소녀의 얼굴이거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발끈하는 리시나스를 보며 루미너스가 웃었다.

-저는 보기 좋은걸요? 항상 신념에만 얽매여 있고 여유가 없었던 리시나스가 또래 여자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니까요.

-걸작이긴 하지.

“그런 거 아니야!”

리시나스가 빽- 소리친 후 코웃음을 치며 1층으로 내려갔다.

“그저 내가 알던 살아남는 영웅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놀랐을 뿐이야.”

-그래서 좋은 거 아니야?

카타리우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좋지. 세상 다 산 것 같은 모습보다는 저런 모습이 좋잖아?”

-저런 모습이 뭔데요?

“동화 속 영웅들 같은 모습.”

-그게 내 맹약자의 취향이었군.

“아니라니까.”

투덜거린 리시나스가 두 맹약자를 돌려보냈다.

뚜벅- 뚜벅-

계단을 내려가며 리시나스가 왼쪽 가슴을 쓸어 보았다.

‘어제부터 심장이 술렁거려.’

레오가 자신의 손을 잡아 준 순간부터였다.

‘그때부터 카일은 변했어.’

그 변화를 리시나스는 확실하게 눈치챘다.

‘그래, 마치 내가 바라고 바랐던 영웅의 모습이야.’

절대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리시나스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그렇구나. 나 오랫동안 그런 영웅을 기다려 왔구나.’

***

아침 식사를 하며 리시나스가 말했다.

“엘프의 숲으로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인데?”

“엘프의 숲에 저주를 내린 마물 여왕, 실라투나와 맞서 싸울 토벌대를 구성하는 거야.”

리시나스와 카일, 최초의 위업인 요르문간드 토벌.

그 위업은 단둘의 힘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리시나스와 카일을 도왔던 조력자들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그 둘이라고 할지라도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당대 가드스론의 강력한 수호자들.

그들이 요르문간드의 발목을 잡아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역사에는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들도 절망의 시대를 함께 헤쳐나갔던 동료였다.

원래는 리시나스가 실라투나와 맞서 싸우기 위해 구성한 토벌대였지만.

요르문간드와 조우하게 되면서 토벌대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루나를 파티에 합류시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엘프의 숲을 포기하게 되었다.

“요 며칠 동안 바쁘겠군.”

“응. 준비는 내가 할게. 넌 그때 까지 휴식을 취하고 있어.”

리시나스의 말에 레오가 턱을 괴었다.

“아니, 나도 해야 할 일이 조금 있거든.”

“해야 할 일? 어떤 거?”

리시나스의 물음에 레오가 웃었다.

“계약.”

“계약?”

그 대답에 리시나스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라면 이보다 더 훗날에 맺게 될 계약이지만. 지금은 만날 수 있어.’

수많은 전장을 함께 헤쳐간 파트너.

순백의 왕이라 불리는 페가수스의 우두머리.

‘알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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