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
파지지지지직-!
페가수스의 성역에 강력한 순백의 뇌전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어찌하여 왕께서는 저런 부정한 자의 부름에 응한 것인가?!”
아르피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그런 아르피아를 보며 팔짱을 낀 로디아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잖아?”
“뭐라?”
“뭐, 카일님의 평판이 어떤지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로디아는 뇌전의 영역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들, 페가수스는 왜 보이지도 않는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싸워나가는 거야?”
“그대도 우리가 어리석다고 할 생각인가?”
“전혀.”
로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노을이 물드는듯한 주황색 눈동자가 아르피아를 직시했다.
‘이 드래곤, 정말 어린 드래곤이 맞는 건가?’
아직 유년기의 드래곤에게서 관록이 느껴졌다.
아르피아가 유심히 로디아를 살피는 사이.
“당신들과 같은 고결한 이들이 있어 준 덕분에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 거야.”
로디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가 언젠가는 세계가 구원받을……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믿고 있기 때문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 따윈 없어.”
아르피아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은 미덥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래도 믿어 봐.”
로디아는 아르피아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카일님은 기적을 일으키실 테니까.”
“……우리, 전에 어디서 본 적 있나?”
“글쎄.”
로디아가 쓰게 웃었다.
짐짓 모르는 척을 했지만, 로디아는 아르피아를 잘 알고 있었다.
아르피아 뿐만 아니다.
그녀의 맹약자인 알레네 프리레네도 알고 있다.
‘그냥 아는 사이도 아니고 절친한 사이지.’
알레네와 아르피아는 탐식왕 요르문간드와의 전투에도 참전한 조력자였다.
그리고 둘은 몇 번이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로디아를 구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공격해요! 카일!’
‘보여다오! 네가 말한 희망을!’
미숙했던 시절, 카일의 몸에 빙의한 로디아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했다.
로디아의 말은 사실이다.
세계는 대영웅에 의해 구원받았으며 평화를 되찾았다.
불탔던 세계는 원래 모습을 되찾았고 수많은 종족은 다시 한번 찬란한 전성기를 꽃 피웠다.
하지만 이때의 사람들에게는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망상과도 같은 미래였다.
알레네와 아르피아는 그 망상과도 같은 말에 자신의 모든 걸 걸었다.
그런 말을 한 게 비록 악연이라 할 수 있는 살아남는 영웅 카일이라 할지라도.
진심이 담겼던 로디아의 말에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여 길을 만들어주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역시 마음이 아픈 일이야.’
로디아가 눈을 감았다.
‘우정을 나누고…… 몇 번이고 나를 구해준 친구가…… 나를 잊는다는 건.’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화악-!
그때 뇌전이 걷히며 레오와 알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모든 페가수스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 고개를 드세요.”
알부스의 말에 페가수스들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여기 있는 카일과 맹약을 맺었습니다.”
페가수스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를 완전한 맹약자로 인정한 건 아닙니다.”
알부스는 힐끗,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나와 계약할 자격이 있지만 아직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환수왕 정도 된다면 계약의 조건을 만족란 것만으로는 계약하지 않는다.
정말로 맹약자로서 가치가 있는지.
그가 추구하는 것을 도울 가치가 있는지도 평가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 할 수도 있었다.
알부스의 말에 레오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카일.”
알부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태초의 악을 토벌한다고 했죠? 계획은 있으신가요?”
“있지. 우선 가장 처음해야 할 일은 정해줬어.”
“뭐죠?”
“탐식왕, 요르문간드를 토벌하는 거야.”
일순간 페가수스 사이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레오의 입에서 서슴없이 거론된 가장 공포스러운 마족의 이름 때문이었다.
“뭐라…… 고?”
아르피아가 다시 물었다.
그런 아르피아에게 레오가 웃으면서 말했다.
“탐식왕, 요르문간드를 토벌한다. 그게 첫 목표야.”
***
‘알레네 프리레네는 역시 망설임 없이 합류해줬어.’
거리를 걸으며 리시나스는 토벌대 후보 명단을 떠올렸다.
알레네 프리레네.
리시나스는 가드스론에 온 첫날부터 그녀와 친분을 맺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리시나스는 알레네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선과 질서.’
리시나스는 어려서부터 수많은 지혜를 탐구해 왔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드래곤은 종족 별로 상징이 있다.
흑룡의 경우에는 어둠이다.
그리고 종족별로 자신의 상징과 익숙해져야 한다.
화룡과 수룡은 화산과 바다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유년기의 시절을 화산과 바다에서 보낸다.
흑룡 역시 마찬가지다.
어둠에 익숙해져야 하는 흑룡은 어릴 때부터 깊은 지하에서 자란다.
리시나스라고 다를 건 없었다.
칠흑과도 같은 어둠속에서 리시나스는 어둠을 받아들였다.
흑룡은 어둠 속에서 세계의 질서를 수호해가는 자.
세상을 배신한 배반자의 처단은 물론이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이 질서를 유지하는 흑룡의 방식.
리시나스 역시 그것을 당연시 여겼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우수했으며 어둠의 왕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걸 많은 동족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이르지만 바깥 세상을 볼 일이 있었다.
용족 회의에서 차세대를 이끌 게 될 어린 용들이 한 장소에 모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보게 된 세계는.
어린 리시나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충격이었지.’
어둠속에서만 살아온 리시나스에게 있어 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뭔가…… 감동이었어.’
이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라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때부터였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탐구하기 시작한 건.
세계를 알면 알수록 애정은 커져만 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쯤부터였다.
세계를 위해 필요 없는 자들을 도려내야 하는 흑룡의 가치관을 부정하게 된 건.
그리고…… 시대는 재앙을 맞이했다.
리시나스가 호기심을 품었던 세계는 파괴되었다.
세상은 빛과 희망을 잃고 어둠과 절망, 탄식만이 가득한 세상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리시나스는 다짐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세계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자고.
태초의 악을 토벌하기 위해 고대 문헌을 탐독했다.
그리고 태초의 악, 에레보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놈이 신에 필적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오랜 세월 신의 질서에 의해 구축된 이 세계에서 밀려난 존재라는 것.’
에레보스에 의해 탄생한 마족이 신의 시대 아래에서도 박멸되지 않은 이유.
그것은 신들조차 에레보스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신들이 빛이라면…… 에레보스는 어둠이니까.’
빛과 어둠.
절대 공존할 수 없지만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리고 신들이 구축한 질서가 무너지고.
에레보스의 불꽃이 세상을 덮쳤다.
신들은 하계에 발을 들일 수 없었고 세계는 멸망으로 치달았다.
신들이 에레보스를 증오하는 것처럼 에레보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서로가 존재하는 서로를 완전히 끝장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신들은 자신들의 질서로 어둠을 얽매었다.
하지만 에레보스는 아니다.
태초의 악은 모든 것을 불태워 사라지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자신이 증오하는 신들을 말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신이 세운 질서 아래에 사는 존재라면…… 에레보스를 쓰러트릴 수 없어.’
그래서 찾아 헤맸다.
이 세계를 구해줄 영웅을.
신의 질서에서 벗어난 기적 같은 영웅을.
그렇게 찾아낸 것이 바로 살아 남는 영웅 카일이었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순수한 특성을 지닌 마나. 그 덕에 전대미문의 올 클래스의 힘을 지닌 자.’
말 그대로 세계의 질서를 벗어난 존재.
리시나스의 예상이 맞다면 카일은 태초의 악, 에레보스의 천적이었다.
리시나스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맨 영웅.
‘뭐, 가까스로 찾은 녀석은 영웅과는 거리가 한 참 먼 녀석이었지만.’
그래서 리시나스는 섣부르게 카일이 에레보스를 쓰러트릴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엘프의 천재 마도사 루나.
수인의 창천의 수호자 아곤.
드워프의 대장장이 드웨노.
에레보스를 쓰러트릴 여정의 동료로 선택한 세 사람은 에레보스에게 닿을 길을 열어줄 영웅들이다.
‘나 자신도 포함해서.’
절대 꺼지지 않는 재앙의 불꽃의 힘을 억누를 수는 있어도 쓰러트리지는 못한다.
‘카일만이 에레보스를 쓰러트릴 수 있어. 결국 가장 위험한 일을 맡게 될 거야.’
그것은 세계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리시나스는 세계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혹시 카일이 마음이 바뀌어 에레보스와 싸우는 걸 거부한다면…… 세계는 구할 수 없어.’
세계를 구할 유일한 희망인 카일.
그렇기에 리시나스는 카일의 마나 특성에 대해 숨겼다.
카일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리시나스가 이를 악물었다.
손을 내밀며 꼭 세계를 구할 거라며 고결한 척 웃던 자신을 떠올렸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에 구역질이 나는 걸 느끼며 리시나스가 자조했다.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흑룡이라는 건가.’
대를 위한 소를 희생.
그렇게 혐오해온 흑룡의 가치관과 다를 게 없다.
리시나스가 스스로에 대해 치를 떨며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식사를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는 셋을 보며 멈칫했다.
“두 사람은 누구?”
조금 당황한 얼굴로 리시나스는 자신을 보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동족 소녀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리시나스님! 로디아라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리시나스님을 존경해 왔어요!”
“……난 그렇게 존경할 만한 드래곤이 아닌데.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네! 걱정 마세요! 이제부터 그런 불경한 말을 저지르는 모든 것들을 제가 불태워 버릴…….”
“시끄러워.”
레오는 한숨을 쉬며 로디아의 머리를 짓눌렀다.
그리고 리시나스를 보며 말했다.
“우리의 여정에 따라오고 싶대.”
빙긋 웃은 레오가 알부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쪽은…….”
-흐응. 순백의 왕이네?
리시나스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낸 카타리우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만나서 반가워요, 염제.”
-가장 고결한 존재가 이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맹약자로 삼다니, 의외인데.
카타리우의 말에 알부스가 말했다.
“카일의 목소리가 제게 닿았으니까요.”
덤덤히 말하는 알부스를 바라보며 리시나스가 다급히 레오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레오를 여관 바깥으로 데려가 물었다.
“어떻게 페가수스 왕이랑 계약을 한 거야?”
리시나스의 물음에 레오가 말했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내 마나 특성에 대해.”
“뭐?”
리시나스가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었어?”
“응.”
레오가 덤덤히 말했다.
“그게 네가 날 선택한 이유라는 것도 알고 있어.”
레오는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네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도 잘 알거 아냐? 그런데 왜 날 따라 온 거야?”
“네가 세계를 구원으로 인도 할 거라는 걸 믿고 있으니까.”
망설임 없는 대답에 리시나스가 숨을 들이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 리시나스. 우린 세상을 구할 거야.”
레오가 힘을 주어 말했다.
“난 준비가 됐어. 그러니 망설이지 마. 우린 그저…… 앞으로 나아가면 돼.”
레오는 알고 있다.
이때 태연하게 웃던 리시나스도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희망을 주고 싶었다.
‘내가 받은 것처럼.’
빙긋 웃으며 리시나스의 어깨를 토닥여준 레오가 말했다.
“들어가자. 저 로디아라는 녀석도 네 마음에 들 거야.”
“응.”
리시나스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내가 찾아 헤맨 영웅이 맞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일이 자신이 찾아 헤맨 영웅이라면.
카일의 여정을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고.
그렇다면…….
“그래. 카일. 넌 분명 세상을 구할 거야.”
‘내가 카일의 그림자가 되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