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
저벅- 저벅-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온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어.’
한계 이상의 힘을 계속 쥐어짜 냈으니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 리시나스가 지켜주었다고 해도 요르문간드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직격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 망할 도마뱀, 나중에 한 번 퍼부어 줄 테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버텨.’
레오가 이를 악물었다.
뿌득-! 이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구할 세상을 구할 거라고?’
그래, 세상을 구할 거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네가 세상을 구하자고 했잖아!’
꽉-!
레오가 지팡이에 손을 쥐었다.
‘네 염원이잖아!’
마나가 일렁였다.
카일은 이 여정의 끝을 알고 있다.
언젠가 자신은 리시나스가, 루나가, 드웨노가, 아르온이 맡긴 소망을 짊어지고 태초의 악과 맞설 것이다.
‘녀석들의 것만 짊어졌던 게 아니야.’
세계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재앙 앞에 스러져갔던 영웅들.
그들이 염원했던 단 하나의 소망.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절망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바라보며 나아갔던 이들의 소원.
‘포기하지 않은 게 아니야. 포기할 수 없었던 거야!’
리시나스가 최후의 순간 레오에게 맡긴 건 세계.
그 가녀린 어깨로 짊어지기에는 너무도 거대했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함께 짊어질 수 없었던 것.
‘포기할 수 없게 떠넘겼다면…….’
꾹-!
레오가 손을 움켜쥐었다.
회색의 마나가 레오의 몸에서 넘실거렸다.
‘너도 포기하지 마!’
회색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어리석은 놈! 쓸데없는 발버둥을!
고오오오오오-!
레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에 요르문간드가 뒷걸음질 쳤다.
자신도 모르게 기세에서 밀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격노하며 포효했다.
-다 죽어가는 놈이!
화르르르르륵-!
검붉은 불꽃이 요르문간드에게서 치솟았다.
레오가 몸에 남은 마나를 연소시키며 로디아를 바라보았다,
두근- 두근- 두근-
로디아는 자신의 드래곤 하트가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내 마나가 카일님의 의지에 반응하고 있어.’
정확히는 영웅의 세계를 공략하고 공략 보상으로 얻었던 리시나스의 마나가 반응하고 있다.
‘……그래. 카일님은 최후의 결전에서 리시나스님께 드래곤 하트를 받았었지. 즉, 리시나스님의 힘 또한 카일님의 힘.’
두근- 두근- 두근-
힘이 원래 주인의 뜻을 따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
‘지금 난 움직일 수 없어. 그렇다면…….’
로디아가 레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든 힘을 카일님께 맡기겠어!’
고오오오오오오오-!
레오의 의지에 부응하듯 로디아가 리시나스의 마력을 끌어냈다.
마치 폭주라도 하듯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입으로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심장이 터지더라도. 전력을 다해 카일님을 도와!’
그런 로디아를 보며 레오가 손에 힘을 주었다.
‘미안하다, 조금만 도와줘.’
레오가 자세를 낮췄다.
고오오오오! 화륵-!
레오의 몸에서 황금색 오러와 불꽃이 치솟았다.
아르온의 오러와 드웨노의 불꽃.
콰악-!
레오의 발이 바닥을 파고 들어간다.
콰앙-!
도약하자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서 있던 땅이 움푹 꺼졌다.
엄청난 속도로 요르문간드와의 간격을 좁혔다.
-무슨……!
요르문간드가 눈을 부릅떴다.
미래를 예지하는 그로서도 미처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
콱-!
레오가 요르문간드를 아래에서 위로 걷어찼다.
화악-!
거대한 요르문간드의 몸이 하늘로 치솟았다.
레오의 몸이 한 번 더 질주했다.
요르문간드가 날아간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낸 레오가 다시 한번 발차기를 작렬시켰다.
뻐억-!
콰가가가가가가가강-!
요르문간드의 거체가 바닥에 처박혔다.
재앙의 불꽃이 레오의 몸을 잡아먹으려 했지만 드웨노의 불꽃은 갑옷처럼 레오를 지켜냈다.
레오가 창을 치켜들었다.
리시나스의 마나를 기반으로 아르온의 오러와 드웨노의 불꽃을 구현해냈다.
허용범위를 아득하게 넘어선 힘.
레오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으스러졌다.
하지만 그 상처는 로디아의 치유 마법에 의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남는 건 뇌를 태우는 듯한 고통뿐.
투콱-!
레오가 창을 투척했다.
거대한 황금의 창이 요르문간드의 몸을 꿰뚫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재앙의 불꽃에 의해 몸이 불타는 고통에 못지않은 거대한 충격이 덮치자 요르문간드가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몸에 거대한 창이 박힌 요르문간드는 도망가지 못했다.
‘아직 멀었어!’
레오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의 공격은 생명을 담보로 시간을 끌고 있을 뿐.
이 정도로 요르문간드를 끝장낼 수는 없다.
레오에게는 요르문간드를 토벌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의 나로서는 턱없이 부족해.’
이 시간 끌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믿고 있다.
‘녀석은 여기서 죽지 않을 거야.’
레오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여기서 꺾이지 않아.’
우웅-!
‘내가 아는 리시나스는…… 어리석을 정도로 자신의 신념을 추구하는 녀석이니까!’
레오가 지팡이에 힘을 주었다.
‘세계의 구원자니까!’
이미 한계를 한참 넘어선 상태에서도 레오는 나아갔다.
찬란한 마법진이 허공에 수놓아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프 마도사, 페리크가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보는 마법 술식.
하지만…….
“어찌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마치 별을 깎아 만든 듯한 그 마법.
세계를 밝게 비출 또 다른 빛.
화악-!
밤이 찾아온 세계가 마치 대낮이라도 된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레오의 지팡이 끝에서 빛나는 빛은 마치 절망적인 어둠을 몰아내는 것만 같았다.
레오는 친구가 자신에게 전해준 마법을 개방했다.
태초의 악.
결코 꺼지지 않는 재앙의 불꽃.
불멸의 존재를 멸할 유일한 마법.
그 이름을 레오가 불렀다.
“이노센트.”
***
깊은 어둠이었다.
리시나스가 멍하니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영혼만이 남은 상태라는 걸 영령술사인 리시나스는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어둠이 사라졌다.
숲 한가운데.
이제 막 소녀의 티를 벗은 듯한 아름다운 엘프 여인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탐식왕을 쓰러트렸다고? 대단하네. 하지만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놈을 처치한 건 내 몫이었을 거야.”
‘미래의 일인가?’
탐식왕을 쓰러트리다니.
아무래도 카일은 위업을 이룬 모양이었다.
“어쨌든 대단해! 내 동료가 될 자격이 있어!”
우쭐하는 모습이 철부지 아가씨처럼 느껴지면서도 어딘지 밉지 않았다.
이내 엘프 여인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루나! 루나 루비넌스! 장차 위대한 대마법사가 될 몸이야, 잘 부탁해, 리시나스.”
“뭐?”
만난 적 없는 여인은 자신에게 인사하자 리시나스는 당황했다.
그 순간 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폐가가 들어선 곳.
작은 공동묘지.
어딘지 모르게 겁을 먹었지만 확고한 의지가 깃든 눈으로.
수인 소년이 말했다.
“제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요.”
소심해 보이는 수인 소년은 주먹을 꾹 쥐었다.
“저도 같이 갈게요. 대단한 일은 할 수 없겠지만…… 여러분을 대신해 앞에 서서 적을 막아내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용기를 내볼게요!”
수인 소년이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아르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리시나스씨.”
또다시 기억에 없는 인물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마치…… 영혼의 기억을 읽는 것 같아.’
하지만 이건 누가 보더라도 자신의 기억이었다.
‘대체 무슨…….’
수많은 지식을 쌓은 지혜로운 그녀조차도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흠!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눈이야. 자네라면 세계를 구할지도 모르겠군.”
또다시 풍경이 바뀌며 드워프가 씩- 웃었다.
“그 눈은 분명 어둠 속에서도 빛날 테지. 무구라면 걱정하지 말게. 나 드웨노가 만들어 줄 테니. 잘 부탁하네, 리시나스.”
역시나 동료 후보군으로 생각해뒀던 드웨노였다.
마치 타인의 생전 기억을 보는 것처럼, 자신의 것이 아닌 자신의 기억을 읽어갔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청년이 된 수인 청년은 울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드워프는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엘프는 믿는다는 말을 전하고 숨을 거두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의 마지막 인사에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마음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타닥- 타닥- 타닥-
어느새 리시나스는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재앙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거대한 흑룡 앞에 무릎 꿇은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절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청년의 절규를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몹시 괴롭고 슬퍼 보였다.
“카일…….”
절규하는 낯익은 남자의 얼굴을 나직이 불렀다.
그리고 숨을 거둔 흑룡은…….
“나?”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부름에 반응하듯, 흑룡의 죽음과 카일의 절규를 바라보던 여인이 돌아섰다.
“나…… 잖아.”
리시나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런 리시나스를 보며 또 다른 리시나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맞지만 틀려.”
“뭐?”
“넌 어리석은 자고. 나는 지혜의 왕, 리시나스니까.”
지혜의 왕은 웃으며 말했다.
“넌…… 대체 뭐야?”
“난 너야.”
지혜의 왕이 말했다.
“카일과 함께 여정을 떠나고…… 루나와 아르온, 드웨노와 함께 에레보스와 맞서 싸울, 미래의 너.”
저벅- 저벅-
지혜의 왕은 리시나스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끝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끝끝내 카일에게 모든 걸 맡기고 먼저 떠나버릴 너야.”
리시나스가 숨을 삼켰다.
“어리석은 자, 리시나스. 너 혼자선 세계를 구하지 못해.”
지혜의 왕의 말에 리시나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일이 절규하는 모습이 보였다.
까마득한 절망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리시나스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때.
스윽-
절규하던 카일이 몸을 일으켰다.
터벅- 터벅-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혼자서 세계를 구하지 못하는 건 카일도 마찬가지야.”
지혜의 왕이 말했다.
“‘우리’ 였기 때문에. 세계를 구할 수 있었던 거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영웅은 나아간다.
“과거의 나.”
지혜의 왕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카일은 분명 우리의 비원을 이루어 줄 거야. 하지만…… 그건 네가…… 내가…… 우리가…… 많은 것을 카일에게 떠넘겼기 때문이야.”
리시나스가 이를 악물었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음에도 포기하지 않은 건…… 너무 많은 걸 떠안았기 때문이라고.”
지혜의 왕은 리시나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와 나를 믿고 미래를 맡긴 사람들 앞에 부끄러워지지 말자.”
지혜의 왕이 힘을 주어 말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카일의 저 뒷모습에 당당해지자.”
리시나스는 혼자서도 나아가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혼자 남겨 두지 않겠다던 약속…… 우린 결국 지킬 수 없겠지만.”
리시나스는 자신의 손을 잡아주며 세계를 구할 거라고 웃던 카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지키지도 못한 약속을 전했던 자신의 손을 잡았을지 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혜의 왕이 말했다.
“지금의 카일에게는 네가 필요해. 널 기다리고 있어.”
결국에는 지키게 되지 못할 약속이라도 지금은 아니다.
약속을 어기는 건 먼 훗날의 이야기.
“카일이 힘내고 있어.”
지혜의 왕이 힘을 주어 손을 내밀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어리석은 자는 그 손을 잡았다.
마치…… 카일이 자신의 손을 잡아줬던 것처럼.
“응.”
어리석은 자의 대답에 지혜의 왕은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