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그날 저녁.
학과 일정을 마친 레오가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기숙사 방 원형 테이블에 다섯 환수가 방 한가운데 빙 둘러앉아 손에 카드 두 장씩을 쥔 채 게임을 하고 있었다.
-훗. 아무래도 이번 판은 이 몸이 이긴 것 같군.
키르안이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옆에 잔뜩 쌓인 사탕과 초콜릿을 칩처럼 배팅했다.
“웃기지 마요, 바보 요정.”
피오라가 코웃음을 치며 키르안의 배팅을 받았다.
두 사람의 불꽃 튀는 공방에 다른 환수들은 일찌감치 패를 버리고 상황을 구경했다.
이윽고 바닥에 다섯 장의 카드가 깔리고 패를 오픈하게 되었다.
“풀 하우스예요.”
-우하하하! 포카드다! 뚱땡이 병아리!
키르안이 방정맞은 웃음을 지으며 테이블에 수북하게 쌓인 사탕과 초콜릿을 가져가려고 했다.
일주일 치 간식을 한순간에 털린 피오라가 울상을 지을 때였다.
“어이, 요정 왕자.”
빛의 대정령, 라르엘이 살벌한 눈으로 키르안을 바라보았다.
-왜 불러?
“넌 마법으로 장난질이냐?”
쾅-!
-끄아아아악?!
라르엘이 키르안의 손을 짓밟은 후 카드로 손을 뻗었다.
“네가 환영 마법으로 카드를 바꿨다에 내 모든 걸겠다. 넌 뭘 걸래?”
라르엘이 키르안의 카드를 만지자 숫자가 바뀌었다.
그걸 본 피오라의 눈이 험악하게 변했다.
“손모가지를 잘라 버려요! 손모가지 잘라!”
흥분해서 마구 소리치는 피오라를 보며 엘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오라 양, 그런 험악한 말 쓰면 안 돼요.”
“자르는 건 너무하고 비트는 건…… 하악…… 생각만 해도 짜릿…… 커헉-!”
옆에서 말리지는 못할망정 헛소리하는 아티를 향해 눈을 흘긴 엘시가 작은 주먹을 그녀의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옆구리를 맞고 바닥을 나뒹군 아티가 ‘아흣!’ 거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오는 착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소환사들이 이 모습을 보면 분명 오열하겠지?’
그리고 냉혹한 현실을 저주할 게 분명했다.
사실 레오 입장에서도 자신의 소환수들의 이런 모습이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5000년 전, 리시나스의 맹약자였던 염제, 카타리우와 루미너스를 포함한 다른 대정령들은 굉장히 위엄 넘치는 존재였다.
루나의 맹약자이자 당시에는 요정왕자였던 실로드 역시 당시에 어렸지만 키르안처럼 방정맞지 않았다.
빛의 대정령은 저렇게 삐뚤어지고 험악한 성격도 아니다.
‘설마 내 잘못인가?’
소환수들이 저렇게 생겨 먹은 것에는 자신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알부스는 굉장히 고결한 페가수스였어. 아티처럼 변태가 아니었다고.’
그나마 현재 레오의 맹약자 중 정상도 있었으니 엘시였다.
엘시는 실질적으로 레오의 소환수들이 폭주하지 못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결론을 놓고 보자면.
‘요즘 소환수들이 이상한 거지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레오는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키르안을 응징하는 소환수들에게 다가갔다.
괜히 장난질했다가 처참한 꼴을 당한 키르안이 바닥에서 움찔거리고 있자 레오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잠자리를 잡듯 양 날개를 붙잡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불법 도박 현장을 주도한 건 누구야?”
“바보 요정이요.”
피오라가 망설임 없이 기절한 키르안을 가리켰다.
그에 혀를 찬 레오가 대충 키르안을 책상 위에 치워 버리며 말했다.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너희는 명색이 내 소환수거든?”
소환수들이 멀뚱멀뚱 레오를 바라보았다.
“체통을 조금 지키는 게 어때?”
“저만큼 우아하고 예의 바른 피닉스는 매우 드물어요.”
피오라는 가슴을 활짝 펴며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피오라를 보며 아티가 말했다.
“살쪄서 굴러다닐 때는 전혀 우아해 보이지 않던데요.”
그 말에 피오라가 아티의 머리카락을 마구 잡아당겼다.
“아흣!”
아티는 그런 피오라의 공격에 콧소리를 내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대외적으로 레오가 삼대 환수의 맹약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만큼 소환학과에서는 레오에게 삼대 환수를 연구하게 해달라는 요청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는 그 부탁을 들어 줄 수 없었다.
‘이것들을 보여줬다가 괜히 환상이 깨지면 얼마나 불쌍하겠어.’
레오의 맹약자들이 비정상인 거지 결코 삼대 환수 전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레오로서는 자라나는 새싹들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환수들이 추태를 보이는 와중에 레오가 말했다.
“어쨌든 나갈 준비를 해.”
“나갈 준비?”
엘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조금 시험할게 생겼거든. 환수의 섬에 갈 거야.”
“하지만 이제 통금 시간이잖아요. 환수의 섬에는 가면 안 되는 시간인데요.”
환수의 섬은 루메른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학교 바깥이다.
레오가 아무리 학생회장이라고 해도 통금 시간에 학교 바깥으로 나가는 건 교칙 위반이다.
애초에 아무리 학생회장이라도 허락 없이 환수의 섬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엘시의 말에 레오가 말했다.
“괜찮아. 몰래 가면 되니까.”
“학생회장이면 다른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라르엘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모범을 보여야지.”
“그런데 학칙을 어기겠다는 거예요?”
피오라도 라르엘과 함께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안 걸리면 죄가 아니야.”
레오의 덤덤한 말에 라르엘이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피오라는 눈을 깜빡거리며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말이 안 되지.”
“그럼 왜 더 이상 항의하지 않는 거예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빛의 대정령은 이 세상의 정의와 질서를 수호하는 존재라고요.”
“응. 그런데 난 충분히 나이를 먹었고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거든.”
라르엘이 피오라의 머리를 토닥여주고 외출할 준비를 했다.
그런 라르엘의 말에 고민을 하던 피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안 걸리면 죄가 아니라는 거죠?”
“절대 아니에요.”
보다 못한 엘시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환수의 섬에 도착한 레오를 기다리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멜이었다.
“어서 오세요, 레오님. 준비는 모두 마친 상태입니다.”
멜의 말에 키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준비를 마쳤다는 거야?
“실험할 게 있거든.”
레오가 도달한 곳은 환수의 섬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공터였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직원들의 발길도 잘 닿지 않는 최심부.
실험이라는 말에 레오의 소환수들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아티.”
레오의 부름에 아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그래.”
“절 가지고 시험을 하는 건가요, 주인님. 그거 혹시 아픈 건가요?”
기대에 찬 눈으로 묻는 아티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글쎄, 장담 못하겠는데.”
레오의 말에 아티가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은 레오가 말했다.
“본체로 현신이나 해.”
“네.”
아티가 페가수스의 몸으로 돌아왔다.
레오는 그런 아티의 몸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본 멜이 마법을 전개했다.
강력한 힘을 사용해도 외부에서 알지 못하는 결계를 친 것이다.
레오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아티가 엄청난 속도로 하늘로 치솟았다.
파지지지지직-!
아티의 몸에서 뇌전이 휘몰아쳤다.
-뭘 시험해보시려는 건가요?
“이번에 영웅의 세계를 공략하고 얻은 공략 보상 중 하나를 시험해볼 거야.”
-공략 보상이요?
아티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파지직-!
-……?
레오의 영력을 이용해 하늘을 달리던 아티는 일순간 레오의 영력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흠칫 몸을 떨었다.
-이건……?
페가수스의 힘이었다.
그 어떠한 페가수스 보다 강력하며, 또 순수한 힘.
순백의 뇌전이 아티의 온몸을 휘감았다.
파지지지지지직-
-아그그그그그그극?!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을 휘감은 뇌전의 폭풍에 아티의 몸이 부르르르 떨렸다.
그와 함께 아티의 힘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레오가 영력을 거두었다.
치이이이익-!
아티의 몸에서 연기가 치솟았다.
“야, 괜찮냐?”
레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오가 방금 사용한 힘은 이번에 공략 보상으로 얻은 뇌전의 정수였다.
페가수스 마지막 순백의 왕이자 레오의 맹약자였던 알부스의 힘이 담긴 정수.
그 정수 자체가 레오의 영력에 깃든 것이다.
처음 이 뇌전의 정수를 사용하여 페가수스의 힘을 끌어내려 했던 레오였지만 뇌전의 정수는 레오의 의지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실험을 통해 아티의 계약진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정확하게는 내가 계약한 페가수스에 반응하는 것 같았지만.’
레오가 아무리 뇌전의 정수를 가졌다고 해도 레오는 페가수스가 아니다.
뇌전의 정수는 대대로 페가수스에 깃들어 왔던 힘.
그런 만큼 인간인 레오가 사용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이 뇌전의 정수를 이용해 계약한 페가수스에 순백의 왕의 힘을 재현시키는 건 가능할지 모른다고 예상했는데,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군.’
문제는 설령 페가수스라 하더라도 순백의 왕의 힘을 아무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페가수스 중에서도 선택된 고결한 존재에게만 허락되는 힘.
아티는 분명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연륜이 깊은 강력한 페가수스이지만 뇌전의 정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인 것처럼 보였다.
“괜찮냐?”
-이, 이게 뭔가요?
“뇌전의 정수야.”
-뇌전의 정수…… 오래전 사라진 왕의 힘이군요.
아티의 목소리가 떨렸다.
5000년 전.
대가 끊겼던 전설로만 전해지는 왕의 힘이 부활했다는 사실에 아티는 순수하게 페가수스로서 감동하고 있었다.
“나와 계약을 한 페가수스는 순백의 왕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반동 역시 만만치 않은 모양이야.”
-그러네요. 확실히 지금까지의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어요.
“아무래도 이 이상 힘을 사용하면 무리가 갈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최고예요!
“…….”
-위대한 순백의 왕의 힘을 쓰면서 거기에 더해 이런 짜릿한 고통까지. 아아. 최고야.
진심으로 희열하는 아티의 반응에 레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걱정한 내가 바보지.’
파지지지지직!
-꺄흥~
레오가 뇌전의 정수를 사용하자 아티가 행복한 비명을 질러댔다.
잠시 후.
아티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레오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행복해.”
바닥에 드러누운 아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멜이 다가왔다.
“아티 양의 한계는 알아보셨나요?”
“그래. 앞으로의 전투에 굉장히 도움이 될 거야.”
레오의 대답에 멜이 빙긋 웃었다.
“아티양이 레오님의 맹약자가 된 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왜?”
“아티 양 말고는 뇌전의 정수를 이렇게 버틸 수 있는 페가수스는 없었을 테니까요.”
확실히 고통에 기쁨을 느끼는 변태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힘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움찔움찔 몸을 떨며 헤벌쭉 웃는 아티.
엘시는 피오라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
“저런 거 보면 안 돼요.”
“왜요?”
“해로워요.”
그 대화를 보며 레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습을 보면 울겠군.”
“누가요?”
“내 옛날 맹약자가.”
레오는 알부스를 떠올렸다.
분명 순수한 힘이 더럽혀졌다며 오열했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