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토너먼트 전 1차전.
토너먼트는 누구나 볼 수 있었지만 세계 정상 회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런 만큼 외부 인사들은 아직 루메른에 오지 않은 상황.
“조금은 애들의 부담감이 덜 하려나요?”
2학년 소환학과 담당 교수, 유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물음에 2학년 기사학과 담당 교수 아인이 고개를 저었다.
“1학년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을 거다.”
“하긴.”
유라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 행사 때면 주변에 알짱거리는 녀석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팝콘! 버터 오징어구이! 군옥수수! 음료! 없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유라의 기대에 부응하듯 칼이 등장했다.
그걸 본 유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 여기!”
“옙! 옙! 지금 갑니다!”
칼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고는 유라를 보더니 아인에게 말했다.
“뭐가 필요하신가요?”
“난 안 불렀다.”
아인이 특유의 차가운 얼굴로 대답한 후 턱짓으로 유라를 가리켰다.
“버터 오징어 줘.”
“……다 팔렸습니다.”
“없는 게 없다며?”
유라가 눈을 게슴츠레 떴지만 다 팔렸다는데 어쩌랴?
“그럼 팝콘.”
“……다 팔렸습니다.”
“너 나랑 지금 장난쳐?”
유라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런 유라를 보며 칼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다 팔렸는데요.”
힘겹게 대답하는 칼을 보며 유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소환된 소환수들이 칼의 짐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칼의 짐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간식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것들은 대체 뭐야? 날 우롱하는 거야?”
유라의 얼굴이 험악해지자 칼이 울상을 지었다.
“유라 선생님께 팔 건 없어요.”
“이게 지금 누굴 놀리나?!”
유라의 얼굴이 야차처럼 변할 때였다.
“후훗, 맞습니다. 유라 선배님께 팔 물건 따윈 없다. 아아, 이 얼마나 좋은 울림이란 말인가. 잘 말해줬어. 칼 학생.”
터벅- 터벅-
렌이 관중석을 내려왔다.
검은 마법사 망토까지 휘감은 그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손에 와인 잔까지 들고 있었다.
와인 잔에 담긴 와인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더니 한 모금 머금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건 또 뭔 꼴깝이야?”
유라가 얼굴을 구기며 말하자 렌이 손에 들린 와인잔을 옆으로 치우듯 버렸다.
챙그랑.
와인잔 깨지는 소리를 뒤로하고 다가온 렌이 손가락을 튕겼다.
유라의 소환수들이 들고 있던 칼의 상품들이 렌의 마법에 의해 다시 가방으로 돌아갔다.
“칼 학생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라 선배. 칼 학생을 포함한 상인 동아리 학생들은 저와 계약을 맺었으니까요.”
“그건 또 뭔 개소리야?”
유라가 얼굴을 팍 구기며 말하자 칼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보여주었다.
이번 토너먼트 기간 동안 상인 동아리가 유라에게 물건을 팔지 못하는 조항이 적힌 계약서였다.
“너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후훗, 감히 레오 플로브를 소환학과라고 우기는 유라 선배님을 응징하기 위한 거죠.”
이쯤 되면 유치함을 넘어선 광기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헛웃음을 터트리던 유라는 칼에게 손짓했다.
“그 계약서 줘 봐.”
그 말에 칼이 계약서를 넘겼다.
“독소조항까지는 아니네?”
유라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위약금을 대신 지불해주면 어떻게 돼?”
“그럼 계약서 효력은 없어지는 거죠?”
“좋아, 그럼 계약서 내용 바꿔. 저 자식한테 못 파는 걸로.”
“그러죠.”
“칼 토마스! 지금 마법학과를 배신하는 건가!”
렌이 언성을 높이자 칼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상인은 원래 돈에 따라 움직이는 법이라서요.”
“신용! 상인은 신용을 쫓아야 하는 법 아닌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파기한다고 제 신용에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은데요.”
“좋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위약금 조항을 강화해서 다시 계약서를 쓰지!”
티격태격하기 시작하는 두 후배를 바라보던 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인 교수님, 어디 가세요.”
“다른 곳에 간다. 저런 것들이랑 같이 못 앉아 있겠다.”
아인이 냉정하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
터벅- 터벅-
밝은 빛을 따라 기나긴 복도를 빠져나오자 시야가 확 트였다.
경기장 반대편에는 레멘트가 서 있었고, 동그랗게 경기장 주위를 둘러싼 관중석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지금 막 두 학생이 경기장에 입장했습니다! 두 학생을 큰 환호로 환영해주시길 바랍니다!
큰 행사 때면 어김없이 해설을 맡는 룬바 테스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했다.
그 말에 학생들이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학생들의 열렬한 환호에 루크는 더욱 긴장된 얼굴로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심판을 맡은 1학년 마법학과 교수, 멜이 서 있었다.
멜은 두 학생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후 말했다.
“후회가 없는 시간이 되길 바라요. 어떠한 공격이든 허용이 되니 마음껏 싸우세요.”
그 말에 레멘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떠한 공격이라도요?”
“예. 목숨을 빼앗는 치명적인 공격도 가능합니다. 물론 정말로 위험한 공격이라면 제가 개입할 테니까요.”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1학년이 작정하고 하는 공격을 교수진이 못 막을 리 없다.
멜이라면 더더욱.
멜의 대답에 레멘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루크도 긴장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각자의 자리에서 가서 기다리세요. 신호가 주어지면 바로 시작이에요.”
멜은 경기장에서 벗어났다.
자기 자리로 가기 전 레멘트가 말했다.
“도망치지 않은 건 칭찬해주지. 하긴, 도망쳤으면 학생회장님을 볼 낯이 없지.”
“…….”
레멘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에 안 들었어. 너 같은 게 렌 교수님 같은 분께 개인 과외나 받고 말이야. 학생회장 멘티라고 특별 취급받으니 기분이 좋던?”
그 말에 루크는 렌과의 수업을 떠올렸다.
사실 루크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건 다름 아닌 렌의 부교수 안나였다.
렌은 천상 마법사.
그가 관심을 가진 건 어디까지나 루크의 마나 특성.
그 점을 제외하고는 마법사로서 루크는 평범한 편이었다.
아직 마법의 기초도 다지지 못했으니 더더욱 렌에게 있어 논외였다.
루크의 마법 특성을 연구할 때 이외에 관심을 보일 때는 하나뿐이었다.
‘안나 부교수.’
‘네, 렌 교수님.’
‘루크 학생을 해부해보는 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제발 닥쳐요.’
렌은 농담이라고 주장했으나 그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때를 떠올리며 루크가 부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그다지 좋지는 않았어.”
“흥, 자신이 누린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지도 못하는 녀석.”
레멘트는 코웃음을 치며 자가 자리로 돌아갔다.
자기 자리로 돌아간 루크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내가 이때까지 해온 게 얼마나 통할까?’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수업 이후에는 늘 체력 단련을 했다.
말 그대로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레오가 루크에게 가르쳐 준 건 체력 단련과 전투와 관련된 훈련뿐.
조금도 발전 없는 스스로에 의문을 가진 적도 수없이 많았다.
언제나 자신의 한계를 직감했다.
그럴 때마다 레오는 말했다.
‘한계에 부딪힌다는 건 자신의 한계와 조우했다는 걸 의미해. 그걸 계속한다는 건 계속해서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걸 의미하고. 끊임없이 한계를 넘어온 스스로를 믿어 루크 엘다.’
몸을 돌린 루크는 웃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도전이다.’
“웃어?”
레멘트가 얼굴을 구겼다.
멜은 그런 루크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런 부류의 사람이 가끔 있지. 위기 때 웃는 사람.’
그런 생각을 하며 멜이 손에 들린 손가락을 튕겼다.
팅-! 휘리리릭-!
동전이 핑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회전하며 날아간 동전은 이내 경기장 한가운데 떨어졌다.
팅-!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레멘트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어스 웨이브.”
고속 영창으로 순식간에 마법을 완성했다.
쿠구구구궁-!
경기장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물처럼 경기장이 일렁였지만 이건 단단한 땅바닥이 물렁해진 건 아니었다.
이 출렁임에 휩쓸리는 순간 바닥에 충돌하는 셈이었다.
루크가 오러를 일으켰다.
은빛 오러가 발끝에 맺혔다.
화악-!
루크가 빠르게 레멘트에게 돌격했다.
“멍청한 녀석.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레멘트가 비웃음을 날렸다.
루크의 눈이 땅의 출렁거림을 쫓았다.
그리고 그 패턴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높이 치솟아 오른 땅끝을 살짝 밟고 박찼다.
레멘트의 눈이 꿈틀거렸다.
루크는 폴짝- 폴짝- 안전지대를 찾아 밟으며 레멘트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레멘트와 거리를 좁히는 순간. 루크는 레멘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았다.
콰앙-!
“크윽!”
땅에서 치솟은 주먹이 루크를 후려갈겼다.
가까스로 오러를 끌어 올려 공격을 막은 루크가 튕겨 나갔다.
“제법이군. 하지만 순순히 거리를 좁히게 둘 거라고 생각되진 않겠지?”
레멘트의 주변에 마력이 일렁였다.
“최대한 가지고 놀고 싶지만, 관중들은 재미없겠지.”
레멘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기서 끝내주마.”
우웅-!
레멘트의 마법에 반응하듯 주변의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앙-!
레멘트 주변으로 땅바닥에서 엄청난 속도로 바위 송곳이 치솟기 시작했다.
무차별하게 상대를 찢어발기는 공격.
콰가가가가가강-!
순식간에 바닥에서 치솟은 송곳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자욱하게 흙먼지가 치솟았다.
피할 곳은 하늘.
하지만 도약해도 피할 곳은 없었다.
그걸 예상하고 이미 경기장 상공은 레멘트가 바람 계열 마법으로 장악을 한 상태였다.
‘점프해서 피했다면 바람의 칼날에 몸이 난도질당했겠지.’
“역시 시시하군.”
레멘트가 코웃음을 치며 경기장을 나가려한 순간.
쉭-!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뭣?”
송곳을 뚫고 나온 루크가 레멘트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레멘트가 가까스로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했다.
촤악-!
레멘트의 목덜미에 피가 솟았다.
탁-!
루크가 바닥에 착지했다.
조금만 깊었다면 경기는 루크의 승리로 끝났다.
“이 자식이! 무슨 술수를 부린 거냐!”
“피했어.”
루크가 검 끝에 묻은 레멘트의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웃기지 마. 그 공격을 피했다고?”
극심한 분노로 인해 레멘트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때 1학년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그런 낙제생에게 공격을 허용하냐?”
“레멘트 너도 별거 없구나?”
킥킥- 거리는 소리에 레멘트의 눈이 뒤집혔다.
“눈 좋네. 저걸 보고 피할 생각을 하다니.”
2학년 관중석에서 첼시가 중얼거렸다.
“애초에 레오의 멘티가 된 것도 눈이 좋아서야.”
셀리아가 팔짱을 꼈다.
“물론 공격을 성공시킨 건 상대가 방심해서지만. 저 공격이 실패한 이상 끝이야.”
그 말에 첼시가 턱을 괴었다.
“이제 진짜 실력을 보여주지 않을까?”
“끝장내주마! 망할 낙제생!”
쿠구구구궁-!
바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가강-!
바닥이 마치 슬라임처럼 루크를 덮쳤다.
퍼억-!
“커억?”
손바닥처럼 펼쳐진 바닥이 루크를 후려갈겼다.
그에 맞고 루크가 튕겨 나갔다.
쾅-!
“끅?!”
루크의 등을 바닥으로 만들어진 주먹이 후려쳤다.
그렇게 바닥에서 튀어나오는 물리적인 공격에 난타당하던 루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온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공격이 멈추자 루크가 몸을 일으켰다.
“역시 안 되네.”
“하, 네가 이길 줄 알았냐?”
레멘트가 같잖다는 듯 으르렁거리며 바닥을 박찼다.
쾅-!
“컥?”
바닥이 치솟으며 루크를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휘오오오오오오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루크는 자신의 손에 걸려 있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 상태로는 여기가 한계로구나.’
아래에 보이는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봉인을 푸는 법은 간단해. 그냥 마음속으로 진심을 다해 해제라고만 말하면 풀려.’
봉인을 푸는 건 쉬웠다.
하지만 참아왔다.
1학기 내내 낙제생이라며 멸시당하고 무시당했지만 참았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해제.’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팅-!
루크를 구속하고 있던 팔찌와 발찌가 풀리더니 날아갔다.
그 순간.
‘몸이, 가벼워.’
루크가 놀란 표정으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거라면.’
루크가 온몸의 마나를 일으켰다.
우웅-!
일순간 발끝에 오러가 감돌았다.
루크는 오러 스텝을 이용해 허공을 박찼다.
***
“땅에 처박히면 끝나겠네.”
“아아, 자이언트 킬링이 일어나나 했는데.”
“야! 차라리 레멘트한테 욕을 해.”
“아, 너무 심했나?”
1학년들이 킬킬거리며 웃을 때였다.
번쩍-! 쾅-!
하늘에서 은빛 섬광이 번쩍이더니 경기장에 꽂혔다.
“뭐, 뭐야?”
“방금 하늘에서 뭔가…….”
자욱한 먼지에 1학년들이 당황했다.
“이건…… 뭐…….”
레멘트도 당황하는 순간.
번쩍-!
은빛 섬광과 동시에 무언가 날아왔다.
퍼억-!
“커억?”
복부를 걷어차인 레멘트가 처참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탁-!
바닥에 착지한 루크가 은빛 섬광을 온몸에 두른 채 말했다.
“이제부터가.”
루크가 레멘트를 향해 힘있게 말했다.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