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뚜벅- 뚜벅- 뚜벅-
경기장으로 향하는 복도에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쥬엔은 복도에서 승리자인 루크와 마주쳤다.
“경기 잘 봤어, 멋지던데?”
쥬엔이 눈을 찡긋거렸다.
그런 쥬엔을 보며 루크가 빙긋 웃었다.
“열심히 했어요.”
“열심히 한 것 정도가 아니던데? 대체 비법이 뭐야.”
“지옥 같은 훈련이랄까요.”
루크가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라보았다.
‘레오 선배님 훈련이 가혹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장난 아닌가 보네.’
“그나저나 넌 언제까지 동급생인데 꼬박꼬박 존댓말 할 거야?”
“네? 하지만 쥬엔 양은 남부 마탑주님의 따님이잖아요.”
“같은 학생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람.”
흥! 하고 가볍게 코웃음을 친 쥬엔이 말했다.
“어차피 계속 같이 학교 다녔잖아? 입학 때부터 친하게 지냈는데 불편해.”
“그러면 앞으로 말 편하게 할게.”
“진작 그랬어야지.”
루크의 말에 쥬엔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
“응. 당연한 말이지만 이길 생각이야.”
싱긋 웃으며 대답한 쥬엔이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빛이 들어오는 경기장 앞에 선 쥬엔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심호흡을 한 번 한 쥬엔이 양 뺨을 찰싹- 때렸다.
‘긴장하지 마, 쥬엔 토르비나. 너답지 않아.’
입학 당시부터 쥬엔은 마법학과의 독보적인 1등이었다.
하지만 1학년 전체로 보자면 1등의 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부동의 1학년 최강, 아이나 베이드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한 시대를 짊어졌던 검성의 증손녀.
그 혈통부터가 남다르다.
게다가 쥬엔은 정통형 마법사.
1:1 대결에서는 상성상 기사인 아이나와 좋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시험 최고의 빅매치.
하지만 쥬엔의 승리를 점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아이나는 압도적이다.
언제나 당당한 쥬엔은 긴장감 때문에 손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심호흡하고 입구로 걸어갔다.
-쥬엔 토르비나가 입장합니다! 환호로 맞이해주시길 바랍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아가씨 파이팅!”
“쥬엔 이겨라!”
여기저기서 환성이 쏟아졌다.
그중 마법학과 고학년 중에서도 열렬하게 쥬엔을 응원했다.
다름 아닌 남부 마탑 소속의 학생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생긋 웃은 쥬엔이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 위에서는 이미 아이나가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쥬엔은 발이 떨리는 걸 느꼈다.
1차전 상대로 아이나가 뽑혔을 때 이길 거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쥬엔이었지만 사실 부담감을 떨칠 수 없었다.
1:1 대결에서 자신이 불리하다는 건 그 누구보다도 쥬엔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어떻게든 허세를 부리고 당당하게 행동했다.
스스로 암시를 걸듯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왔고 철저하게 준비해 왔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할 수 있어, 쥬엔 토르비나. 할 수 있다고.’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쥬엔이 심호흡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릴 때였다.
“쥬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물건을 파는 칼이 있었다.
관중석 맨 앞으로 온 칼이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긴장 하지 마! 이길 수 있어!”
“……선배.”
쥬엔이 살짝 미소 지었다.
“아니! 네가 이길 거야! 꼭 이겨야 해! 승부 예측에서 네가 이긴다에 이번 토너먼트 매상을 전부 걸었어! 네가 지면 난 완전 망한다고!”
감동하던 쥬엔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쥬엔이 말했다.
“내가 이기면 진짜 비싼 거 사야 하는 거 알죠?”
“물론이지!”
칼이 엄지를 치켜들며 씩- 웃었다.
그런 칼에게서 고개를 획 돌린 쥬엔이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긴장감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이길 수 있어. 이기기 위해 준비를 해온 거잖아?’
쥬엔의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척-
쥬엔이 아이나 앞에 섰다.
무관심하게 눈을 감고 있던 아이나가 쥬엔을 바라보았다.
두 소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자! 모두가 기대하던 1차전 빅 매치! 아니! 어쩌면 이번 토너먼트 시험 최대의 빅 매치라고 할 수 있는 시합입니다!
룬바가 흥분한 어조로 해설을 시작했다.
-1학년 기사학과 1등이자 학년 대표! 아이나 베이드나vs 마법학과 1등! 쥬엔 토르비나의 대결입니다! 뭐! 누가 이기든 소환학과에게는 좋은 일이죠! 우하하하하!
-룬바 테스, 누가 해설을 보면서 학과 문제를 엮어 편파 해설을 해도 된다고 했지?
-히이이이익?!
싸늘한 할린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나서기 좋아하는 세드젠이 냉큼 마이크를 잡았다.
-이런 저질스러운 편파적인 해설을 내버려 둘 수 없지! 엘레강스하지 못해!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 해설은 이 몸이 맡겠다. 모두 이 몸의 엘레강스한 해설에……!
-끌어내.
-읍! 읍! 읍!
1학년 행사에 2학년 총괄 교수가 나서는 상황을 할린드가 용납할 리 만무했다.
주변 학생들에게 세드젠이 끌려나간 후 룬바는 주의를 받고 간신히 해설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 멜이 경기장 위로 다가왔다.
“두 사람 모두 후회 없는 시합이 되길 바라요.”
룰을 설명한 멜이 물러섰다.
팔짱을 낀 쥬엔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비든 비르센! 샤샤 시에느 로드렌! 그리고 루크 엘다!”
느닷없는 그녀의 외침이 소란스럽던 관중석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기다려!”
쥬엔이 손가락으로 아이나를 가리켰다.
“다음은 너희야!”
-오오오오! 1학년의 쥬엔 토르비나! 갑자기 라이벌들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룬바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학년 대표 자리는 내가 차지하겠어! 그리고 차기 학생회장도 내가 될 거야!”
당당하게 선언한 쥬엔이 지팡이 끝을 아이나에게 겨누었다.
배짱 좋게 선언하는 쥬엔을 보며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오오오!”
“멋진데!”
“응원한다! 쥬엔!”
느닷없는 선언에 아이나는 특유의 인형 같은 얼굴로 쥬엔을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나에게 쥬엔이 소리쳤다.
“각오해!”
“관심 없어.”
“뭐?”
“학년 대표든 학생회장 자리든. 별 관심이 없어.”
아이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검을 뽑았다.
“방해된다면 쓰러트릴 뿐. 그게 다야.”
그런 아이나를 보며 쥬엔이 이를 갈았다.
“난 네가 싫어. 아이나 베이드나.”
멜이 손가락 위에 동전을 올렸다.
“모두가 원하는 걸 무시하는 그 태도가!”
띵-! 핑그르르르르!
“남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그 말투가!”
동전이 회전하며 허공을 갈랐다.
“난 정말 싫어!”
팅-!
동전이 경기장 바닥으로 떨어지자 마자 황금색 섬광이 쥬엔을 향해 질주했다.
그 순간.
화악-!
쥬엔의 모습이 사라졌다.
‘은신 마법.’
아이나의 날카로운 감각이 순식간에 경기장 전체를 뒤덮었다.
쥬엔의 장기중 하나가 은신 마법이라는 건 아이나도 익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은신 마법이 굉장히 정교하고 또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것 역시.
은신 마법을 쓰고 모습을 감춘 쥬엔은 아이나도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리 은신 마법을 썼을 때의 이야기.’
아이나의 황금색 눈이 빠르게 경기장 전체를 훑었다.
인지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감각이 순식간에 쥬엔을 찾아냈다.
콱-!
아이나의 검이 쥬엔을 벤 순간.
번쩍-! 콰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
“이번 시합 어떻게 생각해?”
클로에의 물음에 첸 시아가 말했다.
“아마 쥬엔 양이 이기기 힘들겠죠?”
첸 시아가 덤덤히 말했다.
정통형 마법사와 기사의 1:1 대결.
서로 실력이 비슷하다는 전제하에 기사 클래스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거기다 아이나는 1학년 중 최강.
쥬엔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클로에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1학년 후배를 바라보았다.
멘티는 아니지만 바로 한 학년 아래인 만큼 클로에는 쥬엔을 주시하고 있었다.
‘입학 시험 당시에 나한테 덤비기도 했었지.’
쥬엔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클로에도 알고 있다.
하지만 클로에 역시 쥬엔이 이기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레오, 네 생각은 어때?”
“객관적인 전력으로 놓고 본다면 아이나의 승리가 거의 확실하겠지.”
레오는 덤덤히 말했다.
“하지만 1:1 승부에서 변수는 다양해. 특히나 쥬엔의 멘토는 칼이야. 아이나에 대한 대비를 안 했을리 없어.”
“확실히 쥬엔에게는 칼이 있구나.”
비록 마법 실력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칼은 상대를 분석하고 작전을 짜는데 능하다.
그건 칼이 지금껏 살아남은 원동력이기도 하다.
“칼군이 상대의 허를 찌르는 데는 특화 되긴 했죠.”
첸 시아 역시 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만이 변수 요소인 건 아니야. 아이나 본인의 문제도 있어.”
“아이나 본인의 문제?”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첸 시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이나 양의 문제가 가장 치명적이겠네요.”
“무슨 뜻이야?”
클로에의 물음에 첸 시아가 빙긋 웃었다.
“쥬엔 양을 있는 그대로 바라봤다면 아이나 양은 이기기 힘들지도 몰라요.”
첸 시아의 말에 클로에가 고민하더니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절친인 셀리아와 멘티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올랐다.
‘다른 1학년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
1학기 동안 아이나를 쓰러트리기 위해 준비해 온 쥬엔과 그렇지 않은 아이나.
이 차이는 분명 컸다.
그 순간.
번쩍-! 쾅-!
거대한 섬광과 동시에 지축이 흔들리는 폭발이 일어났다.
경기장이 빙판으로 뒤덮였다.
첸 시아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마법이죠?”
“얼음 마법에 폭발 마법을 융합시켰네.”
클로에는 단번에 어떤 마법인지 알아봤다.
‘얼음 분신.’
클로에의 주특기 마법 중 하나였다.
‘세 개 마법. 아니. 마법을 네 개나 융합시킨 건가?’
클로에가 감탄했다.
마법 융합.
여러 마법을 융합시켜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마법 강화다.
레오가 피식 웃었다.
‘두 개까지는 어떻게든 노력으로 해볼 수 있지만.’
문제는 세 개부터다.
‘세 개부터는 재능과 센스의 영역이니까.’
레오도 세 개가 한계다.
2학년 마법 학과 최고 우등생인 클로에와 아바드의 기록 역시 세 개다.
첼시는 융합 마법 쪽으로는 소질이 없어 두 개까지만 해냈다.
‘뭐 클로에와 아바드, 첼시의 경우에는 발전 가능성이 있지만.’
참고로 루나의 경우에는 일곱 개의 마법을 융합했었다.
‘그 녀석이야 뭐, 마법 바보에 마력 괴수니까.’
쥬엔은 1학년이면서 그걸 네 개까지 해냈다.
“융합 쪽으로 특화되었나 보네. 전혀 몰랐어.”
클로에가 감탄하며 눈을 빛냈다.
‘어떻게 할 거냐, 아이드 베이드나.’
레오는 팔짱을 끼고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상대를 똑바로 보지 않으면, 이길 수 없어.’
***
쩌저적-
아이나는 몸에 붙은 얼음을 털어냈다.
강력한 얼음 폭발에 휘말렸음에도 큰 타격이 없어 보였다.
아이나의 감각에 여러 명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전부 쥬엔 토르비나.’
척-!
아이나가 검을 고쳐쥐었다.
“이게 전부야?”
“그럴 리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상태로 쥬엔이 대답했다.
“널 쓰러트리기 위해 많은 걸 준비했어.”
쥬엔이 이를 갈았다.
“이건 그 일부분일 뿐이야! 기대해도 좋아.”
강렬한 투지를 가지고 쥬엔이 소리쳤다.
“모든 힘을 다해 널 쓰러트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