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
쥬엔이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쥬엔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여긴?”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쥬엔은 곧 이곳이 병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나 졌구나.’
벌컥-
그때 문이 열리며 칼이 들어왔다.
“쥬엔, 깼구나?”
“어떻게 된 거예요?”
“마력 고갈로 인한 쇼크.”
칼은 병실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쥬엔의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
“진짜 근소한 차이였어. 다들 아이나에게 유리한 장소가 아니라 공평하게 싸울 수 있는 곳이었다면 네가 이겼…….”
“진 건 진 거예요.”
칼의 말에 쥬엔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다른 건 변명일 뿐이에요.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요.”
“……그래.”
쥬엔을 위로해주려던 칼이 입을 다물고 씁쓸하게 웃었다.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는 쥬엔을 바라보던 칼이 당황했다.
“야, 우냐?”
쥬엔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선배가 정말 열심히 도와줬는데.”
아이나를 상대로 필승전략을 짠 건 쥬엔이지만 그런 아이나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분석을 해준 건 칼이었다.
“멘토로서 당연한 걸 한 거야. 울지 마. 진짜 대단했다니까?”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치만 너무 분해서.”
“괜찮아. 한 번 졌을 뿐이야. 이제 고작해야 1학년 기말고사일 뿐이잖아? 앞으로 되갚아 줄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칼은 분해하는 쥬엔을 달래주었다.
***
1학년들의 기말고사 토너먼트 1차전이 끝나고 루메른이 떠들썩해졌다.
가장 주목도가 높았던 건 단연 루크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승리였기에 많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녀석이 왜 학생회장의 멘티인가? 라는 의문도 많이 사그라졌다.
“루크 학생! 지금까지 힘을 숨겼던 이유가 뭐죠?”
“다른 학생들을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나요?”
신문부 학생들이 루크에게 몰려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레오 선배님의 수련 방법이었어요.”
“호오? 학생회장의 수련은 어땠나요?”
그 질문에 루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대체 어떤 수련을 받은 거야?’
몸까지 덜덜 떠는 루크를 보며 신문부 학생들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다음으로 주목을 받은 건 아니아와 쥬엔의 대결이었다.
“아이나 학생, 쥬엔 학생과 대결한 소감은 어떤가요?”
“매우 강했어요.”
눈을 내리깔고 작게 대답한 아이나는 그 이상 대답하지 않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아이나 파벌이라고 자칭하는 학생들이 당황하며 아이나를 쫓았다.
그 모습을 보며 루크가 중얼거렸다.
“기뻐 보이지 않네요.”
“이 정도로 고전할 줄은 몰랐겠지. 실제로 질 뻔했으니까.”
루크와 같은 1반의 반장인 샤샤는 섭선을 살랑거리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훌륭했어, 루크. 1반의 명예를 드높였어.”
샤샤의 말에 루크가 머리를 긁적였다.
“너와의 승부, 기대할게.”
빙긋 웃으며 말하는 샤샤의 말에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샤 시에느 로드렌, 네가 루크 엘다와 맞붙을 일은 없을 거다.”
“뭐라고요?”
샤샤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 전에 나한테 패배할 테니까.”
“후훗-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당신이 하네요. 하비든 비르센.”
샤샤와 하비든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두 사람을 보며 다른 학생들이 슬금슬금 피했다.
“애초에 루크 엘다는 이전부터 내가 쓰러트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요?”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하비든과 같은 10반이자 첸 시아의 멘티, 제인이 아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루크 엘다는 안중에 없는 거 아니었어? 이때까지 실력을 몰랐잖아.”
“루크가 레오 선배님의 멘티가 되었을 때부터 쓰러트리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샤샤가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제인이 음흉하게 웃었다.
“질투?”
“아니거든요?!”
새빨개진 얼굴로 발끈하는 샤샤를 보며 하비든이 훗- 하고 웃었다.
“추하구나, 샤샤 시에느 로드렌.”
하비든에게 발끈한 샤샤가 루크에게 말했다.
“루크, 네가 말해! 나랑 이
작자 중 누구랑 더 싸우고 싶은지!”
“당연히 같은 기사학과인 나와 더 맞붙고 싶겠지.”
“둘 다 싸워보고 싶은데요.”
루크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루크 입장에서는 샤샤와 하비든 모두 1학년 입학 때부터 대단했기에 동경해 왔던 학생들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통할지 시험해보고 싶은 강자들이기도 했다.
‘이 사람들에게 지금 내 실력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시험해보고 싶어.’
그것이 루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물론 루크이 대답을 샤샤와 하비든이 납득할 리 없었다.
“선택해라, 루크 엘다.”
“선택해. 루크.”
사나운 얼굴로 자신에게 한 걸음 다가오는 둘을 보며 루크가 울상을 지었다.
“누가 도와줘요!”
샤샤와 하비든과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1학년들은 루크를 외면했다.
그렇게 1학년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멘티들을 찾아온 2학년 중 그 모습을 본 넬라가 중얼거렸다.
“레오의 멘티는 인기가 많네.”
“응, 그러게.”
일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저런 인기는 사절이지만.”
***
기말고사는 1학년들만 치르는 게 아니었다.
1학년들 토너먼트전이 끝나고 학년별로 시험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 기말고사 메인 이벤트는 1학년 토너먼트인만큼 다른 학년의 기말고사는 대체로 일찍 마무리되었다.
1학년 역시 필기시험은 일찍 마무리되고 토너먼트만 꾸준히 진행되었다.
루크는 순조롭게 승리를 차지하며 위로 올라갔다.
다른 학과 탑 학생들 역시 계속해서 승리를 차지했다.
대진표가 나빴던 쥬엔의 경우에도 패자부활전을 뚫고 본선에 합류했다.
그렇게 패자부활전이 진행되는 와중 이번 학기 최대 이슈.
정상 회의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모든 학년이 학과 별로 대연병장에 모였다.
“와.”
학교 신문을 가져와 읽던 일리아나가 탄성을 내지르며 혀를 내둘렀다.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니. 이러다가 에미오 녀석. 진짜 퇴학당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아.”
일리아나의 말에 클로에도 탄성을 내질렀다.
성적만 놓고 본다면 에미오는 졸업 때까지 루메른에 남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실력자다.
하지만 이번 1학년 토너먼트로 인해 일이 꼬였다.
에미오의 멘티인 레멘트는 첫 시합부터 루크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해 패자조로 떨어졌다.
문제는 쥬엔 역시 패자조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패자부활전에서 승리한 건 쥬엔.
마법학과 1등과 3등의 대결이었지만 쥬엔이 압도적인 승리를 쟁취하며 다시 패자조로 떨어졌다.
“1학년 퇴학 기준은 아직 명확하게 나오진 않았잖아. 어디 한 번 두고 봐야겠지.”
클로에의 말에 일리아나가 코웃음을 쳤다.
“할린드 교수님이 엄청 칼 같이 봤으면 좋겠네. 제발 그 재수 없는 면상 좀 안 보게.”
“나도 동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첼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넌 왜 여기 있어?”
“응?”
“기사학과로 썩 가버려.”
“헉! 함께 마법학과에서 공부해온 사이인데 그런 심한 말을!”
일리아나가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짓자 첼시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심하기는 개뿔. 너 마법학과로 온 이유가 훨씬 잘 보이는 자리기 때문이잖아! 너 편할 때만 마법학과지?”
첼시의 말에 일리아나는 딴청을 피웠다.
그런 일리아나를 보며 칼이 말했다.
“끌어낼까?”
“클로에! 애들이 나만 따돌려!”
여론이 좋지 않자 일리아나가 클로에에게 매달렸다.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뒤 결국 자리를 잡는데 성공한 일리아나가 말했다.
“그나저나 반장은 좋겠다. 특등석에서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랑 영웅들을 볼 거 아니야?”
레오는 학생회장으로서 세계 정상들을 마중 나가기 위해 워프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
“레오, 긴장하지 마세요. 제가 잘 보좌해줄 테니까요.”
“릴 선배. 말은 고마운데 절 보면서 이야기 해주면 안 될까요?”
릴은 긴장했는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각국의 정상들과 영웅들을 바로 앞에서 마중하는 임무는 각 학년을 대표하는 학년 대표들이었다.
하르크와 엘레나는 임무 파견에서 내일 복귀하기에 현재 가장 고학년이 릴이었다.
그렇기에 학생회장인지만 아직 2학년인 레오를 보좌해야 하는 게 바로 릴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상태로 쭈뼛거리고 있었다.
“우우- 레오는 긴장이 안 됩니까? 혹시 실수라도 보여서 추태라도 보인다는 그런 걱정은 안 드는 겁니까?”
“딱히요.”
“역시 레오는 굉장합니다.”
릴은 감탄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단순히 대단한 후배가 아닌 학생회장이자 소환사로서도 까마득히 높은 위치였다.
“릴 선배는 원래처럼 행동하면 돼요.”
“하긴, 그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겠군요.”
‘……원래처럼 행동해도 이상하게 볼 테고 원래처럼 행동 안 해도 이상하게 여길 텐데 뭐.’
레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릴은 스스로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물론 정령사로서 본다면 굉장히 무난하기도 했다.
‘물론 단순히 무난한 게 아닌 모난 데 없는 괴물이지만.’
릴은 그런 대단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자신보다 매번 자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찾아 비교하며 알아서 주눅 들어버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노력을 멈추지 않지.’
비교를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는, 밑보다는 위를 항상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레오가 아이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얘도 릴이랑 상태가 비슷하군.’
릴이 긴장해서 눈을 감고 있다면 이쪽은 아예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쥬엔과의 경기에서 충격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군.’
“아이나.”
“네?”
레오의 부름에 아이나가 화들짝 놀랐다.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인데.”
그 물음에 아이나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입을 닫았다.
이전에는 인정받을 거라면서 결코 레오의 눈을 피하지 않던 아이나다.
하지만 지금은 레오를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아이나를 바라보던 레오가 말했다.
“고민이 있으면 셀리아랑 상담해 봐. 네 멘토잖아.”
“…….”
그 말에 아이나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저따위…… 셀리아 선배님께서 상대도 안 해 줄 거예요.”
“너무 자신을 비하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아이나.”
이야기를 듣던 릴의 말이 타일렀지만 아이나는 그저 땅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아이나를 보며 레오가 말했다.
“너 멘토가 왜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
레오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든 아이나.
하지만 어느새 워프 게이트가 발동되면서 각국의 권력자와 영웅이 도착하기 시작했기에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
번쩍-!
여러 종족의 수많은 지배자와 영웅들이 도착했다.
그럴 때마다 루메른 학생들은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모두가 열렬한 환영을 보내는 가운데.
번쩍-!
다시 워프 게이트가 발동되면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다시 환성을 내지르던 루메른 학생들이 일순간 멈칫했다.
루메른 뿐만 아니다.
각자 인사를 나누던 왕들과 영웅들 역시 이번에 도착한 이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펄럭- 펄럭-
깃발이 휘날렸다.
대륙 동부인으로 구성된 그들이 걸음을 옮겼다.
개벽의 영웅들 이후 지금까지 많은 정상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개벽의 영웅들 이전부터 세계에 존속해온 그들은 단 한 번도 정상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
어둠 속의 역사를 써 온 그림자의 나라.
누군가 나직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샨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