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느닷없는 샨의 등장에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루메른 학생뿐만 아니다.
정상회의를 위해 참석했던 각국의 정상들과 영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가운데 모두의 시선이 샨 제국의 맨 선두에 선 미중년에게 쏠렸다.
동부의 전통 복장을 입고 어딘지 모르게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마치 다가가면 베이기라도 할 것만 같은.
그런 날카로움을 품고 있는 사내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 단번이 알아챌 수 있었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절대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림자들의 황제.
대대로 최강의 그림자라 불려 왔던 이들.
‘샨의 황제.’
수많은 영웅과 영웅 후보생들이 모인 자리임에도 좌중을 압도했다.
저벅- 저벅-
제국의 신하들을 이끌고 온 샤우가 루메른의 교장인 리이나 앞에 섰다.
“오랜만이네요.”
리이나의 말에 샤우가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오, 리이나 경. 아니 이제는 루메른의 리이나 교장이라고 불러야 하겠구려.”
어느 곳이나 빛이 비추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다.
당연하게도 루메른에도 그림자는 있다.
리이나는 루메른 그림자의 수장이었던 만큼 샤우와 마주할 일이 있었다.
“이렇게 참석하실 줄은 몰랐네요.”
“세계가 격변하고 있지 않소.”
샤우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덤덤히 말했다.
“샨 역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환영해요, 샨이 정상회의에 참석한다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말 그대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모두의 이목을 뒤로하고 샨의 자리로 가는 중 레오와 눈이 마주쳤다.
샤우가 웃으며 눈 인사를 하자 레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
샨 제국의 등장으로 장 내가 술렁이는 상황에도 워프 게이트를 통해 계속해서 정상들이 도착했다.
이윽고 데미안을 시작으로 아조니아, 세이룬의 순서로 다른 영웅 아카데미의 외부 인사들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번쩍-!
언제나 그렇듯 화려한 등장을 보이는 세이룬은 많은 이목을 끌었다.
작년에 이어 올 초까지.
연달아 터진 커다란 사건에 의해 세이룬 내부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성운의 시조 루나와 혜성의 마법사 세이룬의 재림은 얼핏 보면 세이룬에게 있어 좋은 사건인 것 같았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시작의 영웅과 성운의 시조의 활약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마물여왕 실라투나의 침공.
그리고 순혈회의 수장인 르하겐으로 인해 벌어진 사령왕의 수작까지.
마물여왕의 침공으로 인한 물리적인 피해도 피해였지만 가장 큰 충격은 순혈회가 타르타로스와 내통했다는 사실이었다.
엘프는 다른 종족과 비교해 폐쇄성이 강한 종족이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자신들의 영역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고 다른 종족이 엘프의 영역에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그렇게 폐쇄적이었던 엘프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통 사실은 다른 종족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렇기에 루나와 세이룬이 현세에 재림했다는 큰 이슈에도 불구하고 엘프 사회는 내부 상황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그런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세이룬의 교장 대행을 맡은 건 다름 아닌 룬 에르사르였다.
엘프 사회의 원로인 데다가 문제를 일으켰던 순혈회와는 거리를 둬 왔던 만큼 엘프 의회에서 적임자로 선택된 것이다.
룬이 이끄는 세이룬 학생들이 리이나와 인사를 나눈 후 자리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와중에 레오는 익숙한 얼굴들과 눈이 마주쳤다.
바로 2학년의 루니아와 에이란이었다.
레오의 얼굴을 본 루니아가 살짝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고 에이란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레오는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어 화답해주었다.
그렇게 각국의 정상들과 모든 영웅 사관 학교가 모였다.
하지만 회의 주체를 맡은 루메른의 관계자들은 환영식을 이대로 마무리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드래고니아는 아직 안 오네.”
“이번 정상회의도 회의 도중 대표만 보내려는 건가?”
“드래곤 로드는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가 봐.”
루메른 학 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상회의 개최는 드래곤 로드의 허락이 있어야 개최가 가능하다.
그런 만큼 드래고니아 역시 정상회의에 참석하지만 드래곤 로드가 무조건 참석하는 건 아니다.
특히나 지금의 드래곤 로드인 침묵의 용 멜리나는 더더욱 비밀스러운 존재.
세간의 많은 이들이 침묵의 용의 참가 여부를 주목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다른 대표를 보낼 것이라 전망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드래고니아는 모습을 드러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행을 맡은 사회진이 입을 열려는 순간.
번쩍-!
워프 게이트가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워프 게이트를 본 순간.
다섯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가운데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 면사포를 쓴 소녀가 있었다.
마치 바닥에 닿을 듯한 긴 은발에 드문드문 검은색이 섞여 있었다.
면사포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굉장히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소녀를 호위하듯.
네 사람이 사방을 점하며 소녀 주변에 서 있었다.
소녀가 스륵- 움직였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루메른 교장인 리이나 앞에 도착한 멜리나는 빙긋 웃더니 왼쪽 가슴을 세 번 두드리고 고개를 숙이며 살짝 무릎을 굽혔다.
처음 보는 인사법에 리이나는 조금 당황하며 어설프게 그 동작을 따라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루메른의 교장. 드래곤 로드, 멜리나라고 해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루메른의 교장, 리이나 플릭스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대답한 리이나를 보며 빙긋 웃은 멜리나가 말했다.
“정상회의 개최 연설이 끝나지 않았다면 제가 해도 될까요?”
“그리 해 주신다면 무한한 영광이겠습니다.”
리이나의 말에 부드럽게 웃은 멜리나가 가장 높은 단상으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 면사포 너머로 멜리나가 레오를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드러난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사실 조금 전 용족의 예법은 리이나에게 한 게 아니라 리이나 옆에 있는 레오에게 올린 것이었다.
멜리나 입장에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드래곤 로드로서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시작의 영웅이 참석한 정상회의다.
멜리나로서는 그런 자리에 레오에게 존경과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지금은 잊혀진 옛 예법으로 인사를 한 것이다.
“레오, 드래곤 로드님께서 레오를 보고 웃은 거 같지 않나요?”
“그랬었나요?”
레오는 시치미를 뚝 뗐다.
미소의 의미는 아마 ‘저 잘했죠?’ 일 것이다.
‘너 예법 틀렸어.’
물론 레오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디아 녀석도 그러더니.’
가슴은 왼쪽을 치는 게 아니라 오른쪽을 치는 거다.
레오가 한참 멜리나의 예법을 고쳐줘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멜리나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멜리나를 주목하는 가운데.
침묵의 용이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영웅과 그림자.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영웅 후보생 여러분.”
모두가 멜리나에게 주목했다.
“지금 시대는 변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오랜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 말에 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드래곤 로드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정상회의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각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사태와 기적.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관한 모든 것들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의미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멜리나의 말이 끝나고 여기저기서 박수가 쏟아졌다.
그렇게 세계 정상회의가 시작되었다.
***
그곳은 말 그대로 죽음의 영역이었다.
살아 있는 자는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영역.
타르타로스의 사령관, 사령왕 헬 카이저의 거처.
“침묵의 용이 움직였다?”
죽음의 권좌에 오른 사령왕은 보고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에 장송의 대공, 아트칸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하옵니다.”
심복의 대답에 사령왕의 검붉은 안광이 가늘게 뜨였다.
해골에 거대한 뼈 갑옷을 입은 망자들의 왕은 현재의 상황에 굉장히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사령왕을 보며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시는지요.”
사령왕의 시선이 여인에게 향했다.
“이미 오래전에 기력을 잃은 늙은 용 따위에게 두려움이라도 느끼고 있으시옵니까?”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여인을 보던 사령왕이 뼈만이 앙상하게 남은 손을 들어 올렸다.
“컥? 커거걱?”
“여왕은 호전적이고 단순할 지언정 생각이란 건 가지고 있었다. 마녀여.”
사령왕의 눈에는 짜증이 깃들었다.
사령왕의 힘에 목이 졸리던 마녀라 불린 이는 미친 듯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자격도 없이 단순히 군단장의 자리가 공석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리를 꿰찼다면 최소한 머리란 걸 굴릴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요, 용서를……. 용서를……! 제가 없다면 마물들을 이끌 군단장은……!”
“대체품은 많다.”
싸늘하게 웃은 사령왕이 눈길을 거두었다.
퍼억-!
그와 함께 마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털썩-
바닥에 널브러진 새로운 군단장, 마녀가 뼛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걸 본 다른 군단장들이 침묵했다.
여기 있는 이들 중 그녀가 군단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명색이 군단장의 직함을 달 정도의 고위 마족.
그런 고위 마족을 벌레 죽이듯 죽이다니.
말 그대로 격이 다른 강함이었다.
“마물 여왕이 토벌당하고 거인왕은 잠에 빠졌지. 그리고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던 침묵의 용이 움직였다.”
사령왕이 다른 군단장들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이 사태를 주도하는 무언가가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나마 그대가 났군. 피의 왕.”
사령왕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피의 왕.
사령왕과 거인왕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군단장이다.
“모든 중심에는 이 자가 있지.”
사령왕이 흑마력을 일으키자 허공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
“레오 플로브. 처음에는 올 클래스라는 것에 주목을 했었지.”
사령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시작의 영웅과 같은 특성을 지녔다는 범주를 벗어났다.”
두각을 드러낸 뒤 단 1년 동안 이루어낸 성과는 가히 놀라운 수준이다.
“마물 여왕의 죽음, 거인왕의 패퇴. 그 모든 상황에 이 자가 있었다.”
“레오 플로브가 시작의 영웅만큼 위협적인 존재라는 뜻입니까?”
“단순히 그 증오스러운 시작의 영웅만큼 위협적인 존재라면 좋겠지. 하지만 놈은 그 이상일지 몰라.”
“그게 무슨…….”
군단장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와중에 헬 카이저는 레오를 노려 볼 뿐이었다.
‘있을 수 없는 기적들의 중심에는 항상 이놈이 있었다.’
단순히 올 클래스의 특성을 가진 자라고는 설명 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제 십대 중반의 애송이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헬 카이저의 눈에 증오가 깃들었다.
‘그 증오스러운 시작의 영웅, 본인이라면 불가능한 일들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