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그림자의 서?!”
“그런 게 있었어?”
정상회의 첫날.
회의가 끝나고 회의의 내용이 정리되어 발표되자 학생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은 것은 그림자의 서에 관한 것이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클로에가 옆에 있는 첸 시아에게 물었다.
“시아, 혹시 알고 있었어?”
“네.”
첸 시아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일리아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왜 말을 안 했어! 굉장한 발견이잖아! 게다가 그림자도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개념 없는 녀석들이 널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일리아나가 흥분된 반응을 보였다.
글로리 기숙사나 첸 시아와 1학년 당시 같은 반이었던 학생들은 그녀가 그림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도 편견 없이 대했다.
첸 시아 본인 역시 레오의 도움으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털어 버린 이후 영웅이라던가 그림자에 관해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녀가 샨의 황녀인 이상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학생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웅은 신들이 인정할 만한 위대한 위업을 이룬 자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도 사람인 이상 완전무결한 존재일 수는 없다.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고 이룬 위업과는 달리 인품이 고결하지 않는 자도 있다.
비난받아야 마땅할 일을 @저지르는 영웅도 존재했다.
하지만 신의 인정을 받았기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빨리 잊는다.
하지만 그림자는 신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영웅보다 엄격한 잣대에 놓였다.
그렇다고 해도 2학년 중에 대놓고 첸 시아를 멸시하거나 하는 학생은 없었다.
당장에 그녀가 소속된 기사학과의 셀리아는 물론이고 그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듀란 역시도 첸 시아를 라이벌로 여기고 있다.
마법 학과의 탑인 클로에, 첼시, 아바드 같은 경우에도 첸 시아와 절친한 사이다.
소환학과의 경우에는 엘리자가 유일하게 한 수 접어주는 상대 중 한 사람이 첸 시아다.
워레든은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쓸 위인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학생회장인 레오와 절친한 사이.
괜스레 학년 탑들의 눈 밖에 나서 학교생활을 스스로 꼬아 버릴 바보는 루메른에 없었다.
그렇다고 은연중 시선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첸 시아가 그런 시선을 내버려 두었기에 나서지 않았을 뿐.
같은 기숙사 학생인 클로에와 일리아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분하다는 듯 주먹을 꾹 쥐는 일리아나를 보며 클로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샨의 기밀 사항인 만큼 시아도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겠지. 게다가 그림자의 서의 존재가 알려진다고 해도 당장에 크게 바뀌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클로에 양의 말이 맞아요. 사람들의 시선은 나를 비롯한 그림자들 스스로가 바꾸어야 할 일이니까요.”
“웃. 그래도 드래곤 로드님이 차별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선언까지 하셨잖아! 이제 그런 식으로 널 보는 녀석들이 있으면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겠어.”
“고마워요, 일리아나 양.”
첸 시아가 빙긋 웃을 때였다.
“저기. 첸 시아님.”
그때 쭈뼛쭈뼛 에이란이 다가왔다.
같은 세대 세이룬 2학년 차석.
“네, 에이란 양.”
“첸 시아님은 샨의 황녀님이신만큼 그림자의 서를 직접 보신 적이 있나요?”
“물론이죠.”
“그럼 시작의 영웅님의 기록을 보신 건가요?”
“네.”
“아아, 정말 부러워요!”
영웅담을 좋아하는 에이란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나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에이란.
그에 따라 클로에와 일리아나 역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첸 시아를 바라보았다.
시작의 영웅 카일.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공상의 존재로밖에 평가받지 않는 대영웅이었지만 그가 실존했었다는 증거가 밝혀진 이후 계속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기록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그의 행적에 관한 연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카일의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영웅 후보생으로서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식판을 가지고 지나가던 첼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클로에가 말했다.
“그림자 서랑 시작의 영웅에 관해서.”
“그 이야기라면 나도 관심 있어!”
첼시가 눈을 반짝이며 냉큼 자리에 앉고 함께 있던 아바드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여기 앉아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린 아바드가 첼시 옆에 앉았다.
“나도 시작의 영웅이 어떤 마법을 썼는지 궁금해. 정말로 올 클래스야?”
“네.”
떠들썩한 분위기를 보며 멀찍이서 식사하던 루니아가 턱을 괴었다.
“정말 루메른은 떠들썩하지 않은 날이 없네.”
고개를 살짝 젓는 루니아.
그때 함께 앉아 있던 칼과 아르, 드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시작의 영웅 이야기를 한다잖아! 안 궁금해?”
아르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루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이 귀쟁이는 내버려 두게. 듣고 싶어도 괜한 자존심 때문에 뻗댈 타입이니.”
“맞아. 내버려 두면 알아서 올 걸?”
드리아나와 칼이 키득거리며 아르와 함께 첸 시아가 있는 쪽으로 갔다.
“진짜 별로 안 궁금한데.”
루니아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떠들썩한 이야기가 올 때마다 귀가 몇 번이고 쫑긋거렸다.
“아, 진짜!”
잠시 후 못 참겠다는 듯 소란스러운 곳으로 달려갔다.
***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영웅과 그림자의 경계를 허물어 협력을 강화할 예정이에요.”
멜의 교수실.
멜리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종족 간의 화합 역시 강화할 생각이에요.”
세계는 여러 이해관계 속에 나라 간의 불신.
그리고 종족 간의 불신이 이어져 왔다.
멜리나로서는 자신의 대에서 그런 불화를 모두 봉합하고 최대한 힘을 하나로 합치고 싶었다.
개벽의 히어로 레코드의 붕괴가 얼마 남지 않은 이상.
에레보스의 위협은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레오님 덕분에 로디아님께서 새로운 힘도 얻은 만큼 시간이 늘어났겠지만…….”
“그것 역시 시간 끌기에 불과하겠지.”
레오는 멜리나가 내온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금 시대의 영웅들은 어떠신 것 같으세요?”
멜리나가 물었다.
지금 시대에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린 영웅들.
그들은 분명 먼 미래에 에레보스와 타르타로스와 맞서 싸울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다들 훌륭하던걸.”
“그들에게 해줄 조언 같은 건 없으신가요?”
“글쎄.”
레오의 붉은 눈이 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신들이 인정할 만한 위업을 이루어내고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야.”
레오가 차를 머금은 후 내려놓았다.
“이미 무대에 올라서서 어엿하게 자기 몫을 하고 있는 녀석들에게 훈수를 두는 것도 웃긴 일이지.”
“그렇다면…….”
“나는 역시나 차세대를 이끌어갈 영웅 후보생들에게 관심이 더 가. 그래서 이번 여름 방학 때 계획을 짜놨는데 말이야.”
“계획이요?”
멜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오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멜리나에게 건넸다.
그걸 받고 읽던 멜리나가 말했다.
“음…… 훈련 일정이네요. 이걸 하실 계획이세요?”
“그렇지. 일종의 수련회라고 할까? 플로브 가문의 영지에서 할 계획이야.”
레오의 말에 멜리나가 측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들은 여름 방학 때 지옥을 경험하겠네.’
“거기 적힌 사람들을 교관으로 초빙하고 싶은데 좀 부탁해도 될까?”
“네. 준비는 제가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계획표를 품에 갈무리한 멜리나가 물었다.
“레오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언제까지 시작의 영웅의 환생이라는 것을 숨길 생각이신가요?”
그 물음에 레오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천장을 바라보았다.
“영원히 숨길 생각이신가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언젠가 나 스스로 정체를 알려야 할 날이 오겠지.”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최소한 과거의 나와 비교했을 때 꿀리지 않는 힘을 얻었을 때 밝히는 게 좋겠지.”
빠른 속도로 과거의 힘을 되찾고 있고 또 영웅의 세계를 통한 공략 보상으로 힘을 쌓고 있는 레오지만 아직 전성기 시절의 힘을 온전하게 되찾지는 못한 상태다.
“네.”
***
루메른에서 개최된 정상회의.
그리고 그에 따른 소식에 세상이 뒤흔들렸다.
첫날에만 해도 히어로 레코드, 그림자의 서의 등장과 이때까지 알지 못했던 대영웅들의 마지막 여정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다음 날에는 멜리나가 레오에게 받은 요르문간드 토벌전 당시 활약했던 영웅들의 히어로 레코드를 공개하며 계속해서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렇게 놀라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와중에도 1학년들의 기말고사 토너먼트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준결승전이 되었다.
“와, 반장 멘티…… 대단한데?”
일리아나가 혀를 내둘렀다.
“학년 꼴찌가 4강에 들었어? 게다가 상대는 무려 학년 대표!”
눈을 반짝거리는 일리아나를 보며 칼이 턱을 괴었다.
“즐거워 보이네.”
“물론! 오스틴이 안정권에 들었으니까!”
일리아나의 멘티이자 레오의 기사단인 오스틴은 안정권의 성적을 거두었다.
퇴학 걱정이 없어진 일리아나는 그때부터 오롯이 1학년들의 대련을 즐겼다.
“게다가 반장 멘티에 탑승한 덕분에 역배당도 여러 번 터졌고 말이야!”
일리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돈주머니를 흔들었다.
“나 필기시험을 망쳐서 용돈 끊길 뻔했는데! 덕분에 2학기 용돈 걱정은 사라졌단 말씀!”
그런 일리아나를 보며 옆에서 지켜보던 에이란이 감탄했다.
“대단하네요.”
“후훗-! 야수의 심장 일리아나님으로 불러줘.”
“뭔가 멋있어요!”
“멋있어 하지마요, 에이란 언니. 저건 야수의 심장이 아니라 짐승의 머리예요.”
@손뼉까지 쳐가며 감탄하는 에이란을 옆에서 지켜보던 첼시가 냉정하게 말했다.
“후훗. 어쨌든 이 돈을 더 불려볼까? 칼. 나 배당권 살래!”
“예~ 예~ 루크에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아이나지!”
“넌 이때까지 온리 루크 아니었냐?”
“훗! 진정한 승부사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 배당은 낮지만 이길 승부에서 확실히 돈을 챙기는 게 진정한 프로지!”
야수의 심장 운운하던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얼마 걸 건데.”
“전부.”
욕심에 눈을 번뜩이는 일리아나를 보며 칼은 망설임 없이 배당권을 판매했다.
“이 언니를 부자로 만들어주렴! 귀여운 후배야.”
일리아나가 눈을 반짝일 때였다.
“저도 그거 한 번 해볼게요.”
누군가 칼에게 다가왔다.
다름 아닌 레아였다.
할린드에게 잡혀간 이후 영혼이 가루가 된 레아였지만 며칠 사이에 가까스로 회복한 상태였다.
“누구에게?”
“아이나 베이드나에게 이만큼.”
레아는 돈뭉치를 칼에게 건넸다.
욕심과는 다른 감정으로 눈이 활활 불타는 레아를 보며 칼은 별말 없이 배당권을 판매했다.
‘내 돈 아니니까.’
칼이 돈뭉치를 아공간에 넣었다.
“난 슬슬 장사 준비해야겠다.”
***
“후우.”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 루크가 심호흡했다.
레오는 없었다.
사실 레오는 첫 번째 시합 이후 단 한 번도 루크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제 나 혼자 할 수 있다는 선배님의 뜻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뺨을 찰싹 때렸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1학기 내내.
먼발치에서 지켜만 봤던 대단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얼마만큼 잘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오면서 상대했던 다른 학생들도 충분히 대단했지만.
지금 상대는 격이 다르다.
말 그대로 1학년 최강.
불안감이 엄습하며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루크.’
스스로를 불안감을 떨쳐냈다.
‘1학년 최강에게 그동안 수련의 성과를 시험해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