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파지지지직- 파지직-
허공에 시커먼 균열이 생성되었다.
마치 금이라도 간 듯.
쩌저적- 갈라진 어둠의 틈새로 검붉은 기운이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잠시 후.
균열에서 쏟아진 검붉은 연기는 지독한 죽음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바닥의 푸른 잔디가 썩어 들어간다.
아마 학생이 보았다면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공포에 질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의 기운은 이내 사람의 형상을 취해갔다.
이윽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가 루메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정체.
그건 다름 아닌 지난 5000년 동안 전율스러운 재앙으로 군림해온 타르타로스의 총사령관, 사령왕 헬 카이저였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공기가 오염되었으며 그의 발길이 닿는 모든 것이 죽음을 맞이했다.
타르타로스의 군단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힘인 ‘죽음’을 다루는 군단장.
말 그대로 죽음의 화신이었다.
저벅-
그런 헬 카이저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머리카락에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
헬 카이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가 오늘 루메른에 오게 된 계기.
“만나고 싶었다, 레오 플로브.”
***
루메른에 침입한 사령왕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레오뿐만이 아니었다.
-레오님.
“알고 있어.”
마법으로 들려온 멜리나의 다급한 부름에 레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너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하지만.
“놈이 이곳에 온 건 분명 꿍꿍이가 있어서겠지. 무턱대고 쳐들어올 녀석이 아니야.”
정상 회의는 지금 시대 최고라 불리는 영웅들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다.
아무리 사령왕이 강대한 존재이고 또 5000년의 세월을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다고 해도 지금 이 자리에 쳐들어오는 것은 무모했다.
“쳐들어왔을 거라면 마물 여왕이 살아 있고 거인왕이 건재했던 시절에 쳐들어왔겠지.”
-그렇다면 대체 왜 그가 온 걸까요.
“짐작 가는 게 하나 있어.”
그렇게 대답한 레오는 사령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저벅-
5000년 전과 변함 없는 모습으로 사령왕은 서 있었다.
레오를 본 헬 카이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만나고 싶었다, 레오 플로브.”
터벅- 터벅-
헬 카이저가 레오 앞으로 다가왔다.
“나의 계획을 몇 번이고 방해하고 수없이 기적을 일으킨 차세대를 이끌 영웅 후보생이라지?”
고오오오오오-!
헬 카이저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흑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일전에 너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멸할 존재라고 했던가?”
헬 카이저의 검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다시 한번 묻겠다.”
스윽-
들어 올린 손 끝에서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네놈의 정체는 무엇이냐.”
콰아아앙-!
지축이 울리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자욱한 연기를 뚫고 화염의 오러가 헬 카이저의 목을 노렸다.
콰악-!
레오의 검이 헬 카이저의 목을 쳤다.
하지만 목을 베지는 못하고 막혔다.
고오오오-!
레오의 몸에 강대한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그걸 본 헬 카이저가 손을 들어 올렸다.
흉측한 검은 뼈로 만들어진 지팡이가 그의 손에 나타났다.
화악-!
지팡이를 휘두르자 검은 기운이 레오를 덮쳤다.
레오는 오러 스텝을 이용해 그런 사령왕의 공격을 피했다.
치이이익-!
‘부패의 저주.’
저 검은 기운에 닿는 순간 모든 것이 썩어 들어간다.
레오는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주변 일대에는 저주가 펼쳐져 있었다.
‘단절의 저주로군.’
외부와 저주 내부를 차단하는 저주.
지금 이곳에서 헬 카이저가 날뛴다고 해도 외부에서 알 수 없었다.
레오가 헬 카이저를 바라보았다.
‘예상대로군. 놈은 내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왔어.’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사령왕 본체가 아닌 분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공할 만한 힘을 품고 있었다.
우웅-!
검을 쥐지 않은 레오의 손끝에 마법이 생성되었다.
별의 마법.
번쩍! 콰가가가가강-!
마법진에서 쏘아져 나간 수백 개의 빛의 탄환이 사령왕을 덮쳤다.
“조잡한 장난을 치는군.”
헬 카이저의 눈이 빠르게 마법을 훑었다.
화악-!
빛의 탄환이 헬 카이저의 몸에 닿기도 전에 증발하듯 사라졌다.
헬 카이저의 힘에 막힌 것이 아니다.
해석하여 해제한 것이다.
“루나의 마법조차 해제했던 나다. 그녀가 남긴 유산을 조잡하게 만지작거린 결과물 따위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레오 플로브, 아니.”
고오오오오오-
레오의 머리 위로 검은 공간이 열렸다.
그와 함께 뼈와 살점,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살아남는 영웅.”
투두두두두두두둑! 철퍽! 철퍽! 솨아아아아!
뼛조각과 살점, 그리고 핏물이 레오를 덮쳤다.
그걸 보고 싸늘하게 웃은 헬 카이저가 흑마법을 발동시켰다.
콰가가가가가가강-!
시체 더미가 폭발하며 지축이 뒤흔들렸다.
“역시 이런 마법은 그대에게 통하지 않는군.”
헬 카이저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이다, 광채의 정령, 3000년 만인가.”
-사령왕.
라르엘이 뿌득- 이를 갈며 증오를 드러냈다.
3000년 전, 개벽의 용 로디아와 몇 번이나 맞서 싸웠던 가증스러운 적.
라르엘의 힘으로 흑마법을 막아낸 레오는 사방으로 흩어진 뼈와 살점의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굽힌 레오는 뼈와 살점의 폐허에서 나뒹구는 검의 손잡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미 제구실을 잃어버린 무구였다.
방금전 덮친 시체 더미 중 한 사람이 살아생전에 사용했던 무구인 모양이었다.
레오가 고개를 들어 헬 카이저를 바라보았다.
“영웅의 시체들이냐?”
“재회의 선물이다, 살아남는 영웅이여. 그대는 수많은 영웅의 죽음을 딛고 끝까지 살아 남지 않았던가?”
헬 카이저가 웃음을 터트렸다.
“심지어 목숨보다 소중했던 대영웅들의 죽음조차 뒤로 하지 않았던가, 살아남는 영웅.”
헬 카이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자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을 때 그대는 울고 있었나? 불경한 무구를 남긴 드웨노의 죽음 앞에 자네는 무슨 심정이었지?”
레오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자신보다는 그대가 살아남는 게 좋다던 루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뿌득-!
“결국에는 모든 걸 자네에게 떠넘긴 리시나스가 감고 결국에는 또 혼자 살아남아 최후의 영웅이 되었을 때. 그대는 어떤 마음이었나?”
고오오오오오-!
레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공기가 술렁였다.
헬 카이저의 기운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살아 남은 모든 생명체가 최대한 카일과 멀어지려고 발버둥쳤다.
“가슴을 펴라, 살아남는 영웅. 아니 최후의 영웅이여.”
헬 카이저가 귀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미소 짓는 해골이 양팔을 벌렸다.
“세상의 모든 자들이 신을 쓰러트린 그대의 불경을 잊더라도 내가 기억하고 있다.”
헬 카이저가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결국에는 다른 이들은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죽음조차 혼자 거슬러 또다시 혼자 신에게 맞서는 그대의 어리석음을 내가 알고 있다!”
딱딱딱-
뼈가 마주치는 소리가 울렸다.
“결국 또다시 그대는 최후의 영웅이 되겠지! 그대야말로 이 시대의 시작이자! 최후!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신의 은총으로 세계가 불타 사라지는 그날까지 내가 기억하겠다! 그대라는 존재가 있었음을! 하하하하하하하하!”
우웅-!
라르엘이 빛으로 변함과 동시에 레오의 양발을 감쌌다.
정령으로 무장하는 스피릿 아머드.
“도발은 다 끝났나? 사령왕.”
레오가 웃었다.
그 소름 끼치는 미소에 헬 카이저가 움찔 몸을 떨었다.
‘통하지 않는군.’
레오를 도발할 생각이었지만 먹히지 않는다.
들끓는 분노에도 레오는 지극히 냉정했다.
화악-!
레오가 헬 카이저를 향해 질주했다.
한 줄기 섬광처럼 헬 카이저와 거리를 좁혔다.
콱-!
레오의 검이 헬 카이저의 목을 베었다.
몸에서 분리된 헬 카이저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스피릿 아머드는 정령을 무장하여 육체로 정령의 능력을 끌어내는 정령술.
현재 레오의 속도는 빛의 정령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네놈이 기억할 필요는 없어.”
레오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 세계가 멸망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콰가가가가각-!
빛의 궤적을 그리며 레오가 순식간에 헬 카이저의 몸을 난도질했다.
“다시 내가 최후의 영웅이 되는 일도 없을 거다.”
고오오오오오-!
헬 카이저의 몸에서 흑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흑마법이 레오를 감싸려는 순간.
화악-!
레오의 그림자가 치솟았다.
콰가가각-! 콰득!
그림자는 칼날이 되어 헬 카이저의 본 스태프를 부러트렸다.
일순간, 헬 카이저의 눈이 부릅 떠졌다.
“이건…….”
어둠의 정령.
하지만 단순한 어둠의 정령이 아니다.
헬 카이저는 이 어둠의 정령을 알고 있었다.
“그림자 정령?”
5000년 전.
자신의 손에 소멸한 어둠의 대정령의 힘에 헬 카이저가 처음으로 동요했다.
레오의 어깨 위에 올라 탄 엘시를 발견한 헬 카이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콱!
그 순간 헬 카이저에게 접근한 레오가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레오가 오러를 활성화 시켰다.
회색의 오러를 몸에 두른 레오가 그대로 하늘 높이 치솟았다.
콰앙-!
일순간 헬 카이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벽에 처박혔다.
단절의 저주가 만들어낸 벽이었다.
콰가가가가가각-!
레오는 헬 카이저의 얼굴을 갈아 버리듯 단절의 벽에 처박은 채로 하늘로 날올랐다.
쩌적- 쩌저저적-!
단절의 저주가 레오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금이 갔다.
챙그랑!
이윽고 단절의 저주에 구멍이 생기며 헬 카이저는 레오에게 붙들린 채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네놈은 수천 년 전부터 수많은 영웅을 죽음으로 내몰았지.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조롱하고 시체를 능욕해 왔어. 그 대가를 이제 치르르게 될 거다.”
레오가 목소리를 내리 깔고 말했다.
헬 카이저는 존재 그 자체가 세계를 위해 목숨을 바쳐온 이들을 향한 모독이었다.
그걸 알기에 헬 카이저는 레오를 도발했다.
하지만 레오는 분노할 지언정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놈……!”
레오의 냉정한 눈을 본 헬 카이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레오는 틀어쥔 헬 카이저의 안면을 강제로 돌렸다.
우두두둑!
섬뜩한 뼛소리가 울려 퍼졌다.
콱-!
순간 레오가 헬 카이저의 머리를 몸통에서 뽑아 버렸다.
“잘 봐. 그리고 기억해.”
레오가 댕그러니 남은 헬 카이저의 머리를 틀어쥐고 1학년 토너먼트 시합이 펼쳐지고 있는 경기장을 보게 만들었다.
“저 아이들이, 에레보스를. 타르타로스를…….”
헬 카이저의 머리를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든 레오가 사납게 말했다.
“너를 멸망시킬 거다. 헬 카이저.”
와아아아아아아아-!
순간 루크와 아이나의 승패가 갈렸는지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 환성을 들으며 레오가 웃었다.
“불타 사라지는 건 우리가 아니야!”
“카일……!”
우드득-!
헬 카이저의 머리에 금이 갔다.
“바로 네놈들이다!”
퍼억-!
레오의 손아귀에서 헬 카이저의 머리가 터지듯 박살 났다.
솨아아아아아아아-!
헬 카이저의 분신이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그 순간.
화르르륵-!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재앙의 불꽃?’
느닷없는 재앙의 불꽃에 레오의 눈이 꿈틀거렸다.
화악-!
마나를 일으켰다.
회색의 마나가 절대 꺼지지 않는 검은 불꽃을 휘감았다.
화악-!
재앙의 불꽃이 사그라 들었다.
그 순간.
우웅-!
사그라들던 재앙의 불꽃이 하얀 빛을 내뿜더니 이내 회색의 마나로 스며들었다.
레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신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