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1학기도 다사다난했네.”
“그러게요. 작년보다 더 정신없었던 1학기였어요.”
클로에의 중얼거림에 첸 시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루메른 전교생은 대연병장, 에레크에 모여 있었다.
방학식이 끝나고 한 학기가 마무리되었다.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의 노력에 대한 평가를 받았다.
방학식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 역시나 1학년 대표였다.
“그나저나 결국에는 학년 대표가 됐네.”
4강 전에서 아이나를 쓰러트린 루크는 결승에서 하비든을 만나 승리했고 결국 학년 대표 자리에 올랐다.
정상회의가 열리는 와중에 이루어낸 쾌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이변의 주인공이 된 루크는 단번에 세계의 주목을 받는 영웅 후보생이 되었다.
“루크도 조금은 학년 대표로서 관록이 생긴 것 같죠?”
첸 시아의 말에 클로에는 1학년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루크와 쥬엔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하비든과 샤샤, 베티가 합류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곧 쥬엔과 하비든이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하는가 싶더니 중간에 끼인 루크가 고통받는 모습이 보였다.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클로에가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셀리아와 아이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이가 다시 좋아졌구나.’
우등생인 셀리아는 다른 학생을 챙겨주는 걸 잘했다.
그렇기에 셀리아는 아이나에게 선배로서 또 멘토로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셀리아를 통해 클로에는 1학기 내내 두 사람이 조금씩 삐걱거려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기말고사 토너먼트에서는 완전히 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루크와의 준결승전 이후 아이나가 다시 셀리아를 찾아옴으로써 사이가 다시 회복되었다.
‘잘 됐어.’
셀리아가 아이나를 크게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황녀님! 샨으로 돌아갈 때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때 제인이 눈을 반짝거리며 첸 시아에게 다가왔다.
“제인, 학교에서는 선배라고 부르라고 했잖아요.”
“방학식이 끝났으니 이제 학생이 아닌 걸요! 저는 지금 바로 시아 황녀님을 모시는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제인이 교복을 벗어 던졌다.
훌렁거리며 하늘을 나는 교복 상의와 치마에 순간적으로 무수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어떻게 한 거야? 마법이야?”
클로에가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인은 교복 안에 대륙 동부의 전통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풀거리는 샨 제국 특유의 옷차림을 어떻게 교복 안에 숨겼단 말인가?
“마법이 아니에요. 샨의 황녀를 모시는 자로서 환복 기술은 기본이에요.”
제인이 빙긋 웃었다.
“누가 교복을 함부로 훌렁훌렁 벗어 던져도 된다고 했지?”
“히익?”
하지만 뒤에서 들려온 공포의 목소리에 비명을 내질렀다.
“따라 와라, 엘 제인.”
괜히 분위기를 냈던 제인은 그대로 할린드에게 끌려갔다.
그 외에도 멘토와 멘티 관계였던 1, 2학년들은 1학기 동안 정이 들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는 1학년들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죄송해요, 선배님. 저 때문에. 흑흑.”
“아니야. 네가 아니라도 난 퇴학이었을 거야. 오히려 너 때문에 2학기까지 있을 수 있었어. 오히려 내가 못 도와줘서 미안해.”
1학년과 2학년 중에 이번에 루메른을 떠나는 학생이 많았다.
1학년만 남는 경우도 있었고 같이 퇴학당하는 일도 있었다.
서로 말도 안 섞는 멘토와 멘티들도 보였고 함께 오열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역시 저건 도통 익숙해지지 않네.”
클로에가 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글로리에서도 퇴학당하는 학생이 제법 있었다.
“어쩔 수 없어요. 루메른에는 남는 자와 떠나는 자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에는 같은 곳을 향해 걷는 거잖아요. 길은 갈라졌지만 분명 언젠가 다시 만날 일도 오겠죠.”
첸 시아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클로에 선배님! 방학식 이후에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클로에의 멘티였던 베티가 다가왔다.
“기숙사 친구들끼리 뒤풀이를 하려고.”
“그럼 저도 같은 반 애들이랑 뒤풀이 끝난 다음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응.”
“와!”
베티가 기뻐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외에도 1, 2학년들이 멘토와 멘티들끼리 약속을 잡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3학년 대표, 릴이 중얼거렸다.
“1, 2학년들은 부럽습니다. 선후배 관계가 저렇게 친밀하다니.”
“어머, 우리도 쟤들 못지않게 친밀한걸?”
엘레나는 릴의 머리카락을 마음대로 땋으며 싱긋 웃었다.
그에 릴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레나 선배님은 절 장난감 취급하시는 거잖습니까.”
“어머, 그럴 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도 릴의 머리카락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걸 멈추지 않았다.
“소환학과 후배들에게 방학 동안 잘 지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말입니다.”
소환학과에서 릴은 인망이 좋은 선배였다.
“하지만 배은망덕한 1, 2학년들은 너한테 인사하러 오지 않는 걸?”
‘제가 아니라 선배가 무서워서 안 오는 것 같은데요.’
릴은 울상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성격 꼬인 엘레나라면 그 말을 듣는 순간 집에 갈 때까지 집요하게 릴만 쫓아다닐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레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힘, 신력이 느껴졌다.
‘확실하게 신력이 늘었어.’
헬 카이저의 분신과 전투한 이후.
레오가 품고 있는 신력은 증가했다.
물론 아주 미비한 양이다.
“어떻게 된 걸까요?”
멜의 물음에 레오는 자신이 신력을 손에 넣은 순간을 떠올렸다.
“분명 사령왕이 내뿜은 재앙의 불꽃을 제압했을 때였어.”
“레오님의 힘은 에레보스에게 있어 상극이죠?”
“맞아.”
리시나스가 순수라 이름 붙인 이 힘은 유일하게 꺼지지 않은 에레보스의 불꽃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었다.
이 힘으로 레오는 에레보스를 토벌했다.
“하지만 전생에도 에레보스의 불꽃을 꺼트렸을 뿐이야.”
레오의 말에 고민하던 멜이 말했다.
“그 피브아라는 신은 분명 에레보스를 신에 필적하는 흉물이라고 표현했죠?”
“맞아.”
“그리고 신들이 빛의 존재라면 에레보스는 어둠의 존재라고 했고요.”
“그랬지.”
“그렇다면 신들과 태초의 악의 근간은 같지 않을까요?”
“내 힘으로 재앙의 불꽃을 정화했다?”
“예.”
멜의 추측에 레오가 생각에 잠겼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5000년 전에 나는 에레보스의 힘을 정화하거나 흡수하지는 못했어.”
“그렇다면 사령왕이 내뿜은 불꽃이 재앙의 불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세계를 불태우고 동료를 불태우고 끝내는 나 자신도 불태웠던 불꽃이야.”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착각할 리 없어.”
“그렇다면 각성이 아닐까요.”
“각성이라.”
“네. 그럴 확률이 높아요. 아르 양도 아르온님의 능력을 다시 한번 각성시켰잖아요?”
단 한 번뿐이지만 아르는 하울링으로 다른 수인을 수화시켰다.
아르온이 그토록 바랐던 기적 중 하나.
아르는 각성을 통해 능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화시킨 것이다.
“후후후.”
“왜 그러세요?”
“더 강해질 길이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워서”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그렇고 리시나스도, 루나도, 드웨노도. 우리가 걷는 길의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했거든.”
물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걸 멈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여정을 떠날 당시.
레오는 물론이고 리시나스와 루나, 드웨노는 힘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성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하긴. 최고의 경지에 오르셨으니 에레보스를 토벌할 수 있으셨겠죠.”
거기까지 말한 멜이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아르온님은요?”
레오와 리시나스, 루나, 드웨노의 이야기는 했지만 아르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멜의 물음에 레오가 턱을 괴었다.
“아르온은 부족한 점이 있었지.”
“아르온님께서 부족한 점이 있으시다고요? 하지만 분명 용자는 역사상 최강의 전사이시잖아요.”
쓰게 웃는 레오를 보며 멜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가 뭐라 해도 용자 아르온은 최강의 전사다.
“맞아. 무력으로만 따지면 녀석은 최강이지. 녀석이 겁쟁이이긴 하지만 그 사실은 변함없어.”
“그렇다면 아르온님의 부족한 점은 뭔가요?”
“정신적인 부분.”
레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여정에서 우리는 아르온을 제외하고 모두 준비가 되어있었어.”
“어떤 준비요?”
“죽을 준비.”
“…….”
“그리고 서로를 떠나보낼 준비.”
덤덤하게 비장하기 그지없는 말을 내뱉는 레오를 보며 멜이 침묵했다.
“우리의 마지막 여정은 불가능한 여정이었으니까. 물론 포기한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 모두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그렇기에 대영웅들은 목숨보다 소중했던 친구가 죽는다 하더라도 멈추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여정에 나섰다.
“하지만 아르온은 자신이 죽을 각오는 되었어도 우리의 죽음을 지켜볼 각오는 끝내 하지 못했어.”
그렇기에 아르온은 가장 먼저 자신을 희생했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대신 죽는 건……. 가장 선두에 섰던 드웨노였을 거야.”
“…….”
“아르온은 우리 중에 제일 어렸거든.”
대영웅 중 재앙의 시대에 태어나 유일하게 푸른 하늘과 밝은 별빛을 보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엘시와 똑같았다.
“아르온님이 그런 각오를 하셨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요?”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야.”
레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후회했어. 아르온에게 그 녀석의 용기에 우리는 지나치게 의존했었으니까. 친구이자 동료이기 이전에 형으로서, 또 누나로서 다독여줬으면 어땠을까 하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며 눈을 감았던 아르온을 떠올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멜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멜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했다.
“재앙의 불꽃을 신력으로 정화하셨다면 곧 그 힘을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쎄. 원래 하계의 종족에게 허락된 힘이 아닌 만큼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히네.”
이전의 피브아가 폴리움에 담아 빌려줬던 신력은 피브아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 신력은 다르다.
그 누구의 의지도 깃들지 않은 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젠가 활용할 수 있는 순간이 오겠지.”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가볼게. 더 늦으면 녀석들이 닦달할 거야.”
“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멜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부탁했었던 인원들의 초빙은 어떻게 되어가?”
“잘 되고 있어요. 일주일 뒤 초대장을 보낼 생각이에요.”
“그래, 수고해.”
그 말을 남기고 레오는 멜의 교수실을 떠났다.
그런 레오를 마중한 뒤 멜은 교수실 한 곳에서 현수막을 꺼내왔다.
이번 방학 기간 동안 수련회에 입소할 이들을 환영하기 위한 현수막이었다.
[수련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단정한 글시로 써인 환영글을 보며 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밋밋해.’
뭐가 됐든 상상 그 이상의 굉장한 수련회가 될 건 분명했다.
그런 수련회 환영 글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멜이 이내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리고 현수막을 고쳐 썼다.
‘아이들에게 긴장감을 주기에는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
[지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수련회를 지우고 붉은 글씨로 친히 지옥이라는 단어를 썼다.
현수막을 본 멜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